-소설-
1.
병원 문을 막 나섰다. 눈이 내리고 있다. 도시에 눈이 내리고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부의 눈은 수직하강 내리고 있고 일부의 눈은 붕붕 떠올라 올라가고 있다. 일부의 눈처럼 나는 지구의 중력을 거스르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것 같다. 마치 UFO가 나를 빨아올리는 것처럼. 순간 정신을 잃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며칠 후면 12월이지만 아직 11월이다. 11월에 눈이라니 온난화 이후 처음이지 않을까. 말이 안 된다, 말이…
“췌장암 3기에서 4기로 넘어가고 있는 상태로 보입니다. CT상으로는 폐, 신장 등 다른 장기로 일부 전이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의사의 얼굴이 굳어지고 난감해 하는 표정이다.
“선생님, 망설이지 말고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남은 시간은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정도로 보입니다. 열어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다행히 말기가 아니면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 등으로 몇 년 이상 사실 수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완치도 가능하고요. 하루빨리 입원하셔서 수술 날짜를 잡으시죠.”
다행이라… 장기가 썩어 내가 죽어가고 있는데 다행이라니. 악에 물든 내 몸, 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럴 때 종교가 없어 다행이다. 종교가 있었으면 절이나 교회에 가서 펑펑 울며 하소연할 것 아닌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나한테 왜 이러냐고. 대답 없는 자기 목소리의 메아리에 금방 합리화해버릴 것이다. 신의 뜻에 따르겠노라고. 종교가 없는 나는 나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오랜 만이야.”
“어, 정말 오랜만이다. 지나치면 모르겠네. 자세히 봐야 알아보겠어.”
“난 바로 알아보겠는데. 넌 어릴 때 모습 많이 남아 있어. 근데 우리 몇 년 만이지?”
“28년.”
“그걸 어떻게 그렇게 바로?”
“내가 기억력이 좋잖아. 24세 때 그 일이 있었어. 그 사건 후 처음이니.”
“근데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너, 일부러 기억을 안 하는 거니? 아니면 못하는 척 하는 거야? 니가 10년 전에 내 폰으로 문자했잖아. 만나기로 해놓고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놓고선.”
“아, 맞아, 그랬지. 기억력 하난 이전이나 지금이나 알아주겠네. 그때 니 번호는 페이스북에서 찾았던 것 같아. 아니면 옛날 친구한테 물어봤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나는 살기 위해 입원을 택하는 대신 그녀를 만났다. 그녀를 만나 꼭 물어보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는 의문을 해결하는 것, 그것이 입원해 수술하는 것보다, 그래서 허망하게 죽는 것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그나마 생생할 때 그녀를 꼭 만나고 싶었다. 커피숍에서 그녀를 만났다. 중년이 된 그녀와 나, 세월이 이렇게 빠른데 인생은, 그 기억은 그대로였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거짓이었다. 뽑지 않은 썩은 이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살면서 한 번씩 터져 나오는 인생통증은 사는 동안 무시로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고 마음을 아프게 했다.
“10년 전에는 왜 니가 먼저 연락해놓고선 만나기로 한 약속을 어겼어?”
“미안해. … 실은 10년 전에 이혼했는데 마음이 심란해서 연락했다가 실제 만나려고 하니 이건 아니다 싶기도 했고, 아들 문제로 갑작스런 일도 있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30분쯤 흐르자 어색한 분위기도 사라졌고 마시던 커피도 떨어졌다. 반면 그녀와 나의 대화는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그때 왜 상기는 나를 오해했지? 그리고 너는 왜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내가 너희 둘을 이어주려고 했잖아.”
“거짓말 아냐. 기억이 서로 다를 뿐이지. 아니, 자신의 감정을 위해 우리 모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기억과 사실을 혼동시키고 왜곡하고 있어.
2.
92년 연말. 지금과는 연말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과는 별개로 세준, (김)준, 상기, 미지, 정미, 장호는 이제 막 시작한 20대 초를 끝장 낼 기분으로 연말을 맘껏 즐길 태세다. 작년 고3 때 미팅 겸 스터디 겸 만난 이들은 올해 누구는 대학신입생이 되어 1학년을 마쳤고 누구는 재수 끝에 내년에 신입생이 된다. 내년에는 모두 대학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들은 내년에 순차적으로 모두 입대할 예정이었다. 이런 저런 조건이 92년 연말을 보내는 이들을 가만둘 리 없었다.
낮부터 모인 이들은 낮에는 남자끼리 여자끼리 놀다가 5시쯤 한자리에 모두 모였다. 5시이지만 12월이라 벌써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20대 초의 남녀들이 모여 할 수 있는 최고의 유흥은 역시 술 마시는 것이었다. 고깃집, 나이트클럽, 호프집으로 이어진 술자리는 자정을 넘기고도 끝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집에 가야 한다는 친구도 있었지만 모두가 말렸다. 말이 안 된다고. 20대 초 연말을 이렇게 끝낼 수 없다고. 결국 이들은 여관방에서 밤을 새기로 했다. 싼 여관방 두 개를 잡고 한 방에 모여 게임도 하며 밤새도록 놀며 마셨다. 남녀 방 두 개를 잡았는데 밤새도록 마시다보니 그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누구는 졸고 누구는 쪼그려 자고 누구는 술 마시고, 자다 일어나 다시 마시고… 취할 대로 취한 그들에게 남녀의 구분은 없었다. 그런 줄 알았다.
태초 이래 언제나 그렇듯 남녀 모임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나는 법, 그들의 모임도 그랬다. 그것도 미숙하고 불타오르는 감정 나이대인 20대 초의 남녀모임이라면 더욱. 그들 모두 어렸지만 모임이 만들어 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알고 있었다. 깨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큰 싸움으로 끝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예쁘고 날씬하고 여성스러운 미지는 남자 모두에게 인기가 좋았다. 거기다가 타인에 대한 배려까지 좋아 남자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 준, 장호, 상기와도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 미지는 그러나 세준과 당당히 사귀는 사이였다. 그런 줄 알았다. 아무튼 준, 장호, 상기는 둘의 사이에 끼어들어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둘을 응원했다, 열렬히. 겉으로는.
세준 또한 남자로서 점잖고 듬직했다. 거기다 리더십도 있어서 친구들이 그를 잘 따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 흔한 문학소년이었던 그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한 잡지사에서 시 부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체하거나 나서지 않았다.
고등학교 같은 반 문과생으로 문학을 좋아했던 세준과 준은 모임에서 특히 친했다. 운명이었는지 이름 끝자도 같아 둘은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어린 스물 살에 작가가 된 세준을 친구로 두게 된 준은 자기도 모르게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체가 되어 갔다. 문학천재라며 세준을 치켜세워주고 축하도 해주며 세준 본인보다 세준을 더 자랑스러워했다. 그럴수록 자격지심과 질투는 심해졌고 준의 마음이 허했다. 그러나 둘은 정말 친했다. 자격지심, 질투라는 마음과는 별개로 친한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언제까지 술을 마셨는지 모두 기억이 없다. 준은 목이 말라 눈을 떴다. 새벽 5시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세준과 미지를 뺀 친구들이 같은 방에서 자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정수기는 각방에 있지 않았고 각층 복도에 하나씩 있었다. 준은 물을 마시러 복도로 나갔다. 춥고 깜깜한 겨울밤, 적막한 여관 복도를 아스라이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끊어질 뜻 이어지고 때론 깊고 때론 엷게 떨리는 여성의 신음이었다. 부끄러움을 알던, 무엇보다 젠틀한 준이었지만 목이 마른 것도 잊고 자기도 모르게 그 소리 나는 방으로 몸이 끌려갔다.
‘어, 우리가 잡은 방이잖아.’
그는 망설였다. 대충 짐작은 되었다. 열면 안 된다, 안 된다,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바깥쪽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살짝 열었다. 정말 문고리 돌리는데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고 흥분되는 것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난생 처음 겪은 일이었다. 바깥쪽 방문을 열고 들어와 안쪽 방을 살짝 훔쳐보았다. 세준과 미지의 합일된 몸이 흥분과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여자의, 한 인생에서 최고의 시기 여성의 벌거벗은 몸을 본다는 것은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흥분의 도가니다. 들어가고 나온 그녀의 몸매는 흡사 비너스보다 황홀했고, 붉고 탐스러운 유방과 가느다란 목덜미, 매끈한 허벅지에서 뻗어져 나온 얇은 종아리는 마치 미지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한 신비 그 자체였다. 준은 미지의 몸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3.
95년 12월 중순, 준과 그의 남자친구들은 모두 군대를 막 제대하였거나 이미 제대하여 복학한 후 한 학기를 마쳤다. 여자 친구들은 직장 생활 중이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조금은 성숙도를 올렸는지 이전보다 전부 모이는 횟수는 훨씬 줄었다. ‘따로 또 같이’라고 했던가, 그들도 이제 어엿한 20대 중반이어서 그런지 따로 만나다가 아주 가끔 전부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따로 만나게 된 것이 단지 나이의 성숙도만은 아니었다.
‘미묘한 금’, 모든 관계는 부지불식간에 미묘하게 금이 가게 되어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들의 모임에는 단지 둘 만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남녀가 모인 단체에는 반드시 남녀문제가 불거지게 되어 있는 것인지, 그들 누구도 처음에는 그것이 금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지냈다. 아니, 이전과 다른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그들 모두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애써 외면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 미묘한 금이 모임의 파탄은 물론이고 한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앗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우와 강원도다!”
“강원도에 우리 두 번째구나.”
“야, 너 누구랑 강원도에 왔었어?”
“아니,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강원도에 다 오잖아.”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따로 또 모이다가 주말을 이용하여 오랜만에 다 같이 강원도로 놀러왔다. 그러나 그들 모임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모임의 핵심 중 핵심인 세준이 빠졌다. 그리고 남자친구 한 명과 여자친구 한 명이 들어왔다. 이들도 세준이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아는 친구들이다. 고등학교 때 스터디를 같이 하던 친구였다. 아무튼 모임의 핵심인 세준이가 빠졌는데도 그 누구도 세준이에 대해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산을 바라보았다. 12월 강원도의 산은 겨울천국처럼 흰 눈으로 덮여있었다. 그들이 간 날은 맑았으나 거의 모든 길가에 눈이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고 내뱉는 말에서 입김이 짙은 안개마냥 풍성하게 나올 정도로 추웠다. 낮에 도착한 그들은 경포해수욕장을 비롯한 경포8경 중 일부를 둘러보고 해가 지기 시작한 5시쯤 숙소에 도착했다.
“고등학교 때 우르르 단체로 올 때는 전혀 몰랐는데 강원도가 정말 아름답고 좋네.”
“단체로 가면 제대로 경치와 그 곳의 진면목을 알기 힘들기는 하지. 근데 우리가 나이가 들었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을까. 이제 경치를 즐기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맞아. 나도 얼마 전까지 사진 찍는 거 안 좋아했는데, 나이드니 진짜 사진밖에 안 남더라. 기억은 흐릿해지는 것도 문제지만 왜곡이 심한 게 더 문제야. 내가 얼마 전 친구와 몇 년 전에 간 곳에 대해 얘기하다가 기억이 서로 너무 다른 거야. 서로 막 우기고. 사진이 없었으면 싸울 뻔 했다니까.”
준이 한 마디 거든다.
“그런 것을 회상성 기억조작이라고 해.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만 조작하는 현상이지.”
단정하고 힘 있는 준의 말에 친구들이 조금 어색해한다. 순간 분위기기 싸해진다.
“어, 합리화나 조작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누군가는 속으로 ‘잘난 척은.’ 하고 아니꼬워하고 있었다.
숙소에서 제공해준 바비큐 파티와 근처 마트에서 산 술을 마음껏 마시며 즐거운 강원도의 하룻밤을 보내고 있었다.
“얘들아, 여기 정말 좋지 않아? 강원도도 강원돈데, 우리 1년에 한 번은 모여 놀러가자.”
정미가 말을 꺼내자 미지가 맞장구친다.
“그래, 곗돈처럼 한 달에 한 번 돈을 거둬 가끔 놀러가자. 우리도 벌써 20대 중반인데 언제까지 이럴 수 있겠어?”
“좋지, 좋아.”
이들의 이런 단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니, 말이 나오기 무섭게 바로 그날 깨지고 말았다. 인생은 의도건 아니건 남녀들의 우정을 허락지 않았다. 남녀모임의 우정은 남녀의 미묘한 사랑 앞에 너무나 약했다. 젊은 남녀에게 강원도의 힘은 무력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주저리주저리 떠돌아다니고 빈 술병이 늘어날수록 그들은 취해갔고 한두 명씩 골아 떨어졌다. 그러던 중 미지와 상기도 자리를 비웠다. 술자리에는 정미와 준만 남았다. 정미가 말을 꺼냈다.
“준아, 복학하고 대학생활은 좋아?”
“응. 열심히 공부하고 글 쓰고 있어.”
“근데 세준이는 어디 갔어? 세준이를 어디 보냈어? 요즘엔 도통 세준이에 대해 말을 안 하네. 너희 둘이 제일 친했으니 너는 알거 아냐. 히히.”
“글세… 세준이가 말하지 말래서.”
준이 술기운이 오른 정미의 넉살을 잘 받아쳐주고 있다.
“그건 그렇고, 너 아니? 미지랑 상기가 사귀고 있는 거? 나는 너랑 미지가 잘 되었으면 했는데.”
“뭐? 정말이야?”
준은 놀라기도 했지만 너무 황당하고 기분이 나빴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정미에게 화난 목소리처럼 큰소리를 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3년 전에 상기가 나에게 미지와 자기를 연결해 달라고 부탁해서 내가 미지에게 상기와 사귈 생각 없냐고, 상기와 잘 해보라고 우리가 다 있는 술자리에서 다리 놓아줬잖아. 근데 미지가 상기와 사귈 생각 없다고 말하면서 분위기가 냉랭해졌고 그때부터 상기가 나를 멀리했잖아. 미지와 나의 관계를 상기가 오해하면서 나 때문에 자기와 미지가 사귀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거 아냐. 그때부터 우리 모임 분위기도 안 좋아지고. 너도 다 알잖아? 안 그래?”
“그 글쎄… 니 말은 그 과정만 보면 다 사실인데. 그러니까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감정들은 다 다른가봐. 그 다른 감정들이 사실까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어. 상기와 미지는 너와 전혀 생각이 달라. 아니, 생각이 다른 것을 넘어 사실까지 다르게 말해 둘 다. 나는 솔직히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어.”
“무슨 소리야 그게? 둘이 사귄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사귀는 거면 상기는 왜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건데?”
이해하는 듯 정미는 준을 처다 보았지만 큰 소리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아, 미안해. 너한테 화낸 거 아냐.”
준은 자리를 박차고 나와 미지와 상기를 찾으러 숙소로 갔다. 직접 그들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따지러 가야 했다. 너무 기분이 상해있었다. 여기저기 숙소에서 그들을 찾고 있는데 3년 전 한 여관방에서의 일이 재현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여성 방의 뒤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복도 구석이었다.
상기의 손은 미지의 허벅지와 팬티 속 계곡을 어루만지고 있었고 그의 입은 미지의 입술을 지나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향해 급하게 돌진하고 있었다. 미지의 치마는 격정적인 둘의 감정마냥 어지럽게 들쳐 있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미세하게 떨리는 여성의 신음소리, 그리고 너무나 강력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녀의 벗은 몸의 굴곡… 그때처럼 숨이 멎을 듯 준도 흥분했다. 향기가 너무 강해 그 어떤 벌과 나비도 피해갈 수 없는 절대적인 꽃, 그 꽃은 삶과 죽음의 교차점이자 관계의 파괴자였다.
준은 복잡한 듯 표정 없는 얼굴로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굳이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상한 낌새를 느낀 미지가 준을 보고 황급히 상기를 밀치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뒤를 돌아본 상기는 준을 보고는 대뜸 화를 냈다.
“윽! 너, 뭐야! 인마.”
“둘 다 옷 제대로 입어.”
“왜? 뭐?”
내려간 바지를 올리고 옷을 고쳐 입자 상기와 미지에게 준이 물었다.
“너희 둘 사귀는 거냐?”
‘아니.’라는 말이 미지의 입에서, ‘그래.’라는 말이 상기의 입에서 동시에 나온다. 미지와 상기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준이 어이없다는 듯 화를 내며 말한다.
“뭣들 하는 거야. 끝까지 나를 갖고 놀겠다는 거야. 사귀면서 3년 동안 나를 바보로 만들고 사귀지 않는 것처럼 행사하며 오늘처럼 이 짓을 하고 다녔냐? 상기 너는 그럼 왜 나를 오해하고 미워했어? 니 부탁으로 내가 너희 둘을 이어주려고 했잖아.”
“너를 미워한 적 없어. 그건 다 너의 오해야.”
“뭐, 이자식이. 너 때문에 우리 모임 분위기 험악해진 거 아냐? 처음에는 좋았는데 니가 나를 오해하고 씹기 시작하면서.”
“그럼, 너희 둘은 무슨 관계냐?”
상기의 갑작스런 질문에 준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한다.
“우리 둘? 미지와 나는 그냥 순순한 친구 사이지.”
“뭐? 순수한 친구 사이? 남녀 사이에 순수한 친구 사이가 어디 있어? 장난해!”
“그럼, 지금 너희 둘은 무슨 사이기에 이 곳에서 이 짓을 하고 있냐?”
“미지와 나는 섹스 하는 남녀사이다. 그런 점에서 사귄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
“뭐?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 버러지 같은 놈!”
준과 상기가 말다툼을 하면서 서로의 멱살을 잡자 미지가 말리듯 말을 한다.
“그만 해. 상기와 나 사귀는 사이 아냐. 오늘 일은 술과 분위기 탓에 뜻밖에 일어난 사건일 뿐이야. 나는 누구와도 사귀지 않아. 세준이가 떠난 이후로는.”
“뭐?”
이번에는 준과 상기가 동시에 말을 꺼냈다. 쌩하고 냉하고 허했다. 둘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 평범한 남자의 한계를 느꼈다. 그리고 그 길로 준과 미지, 상기는 숙소를 나와 강원도를 떠났다. 강원도는 복잡하고 오묘하며 알 수 없는 미로 같은 남녀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남기며 그들의 모임을 허무하게 끝장내버렸다.
4.
“너에 대한 소식은 듣고 있었어. 강의하면서 글 쓰고 있다며. 근데 왜 아직 솔로야?”
“글쎄. 안 간 건지 못 간 건지 이제는 느낌도 없어. 나 혼자 사는 게 요즘 유행이잖아.”
그녀와 나 사이 잠시 침묵이 오갔다. 그리고 내가 물었다.
“우리 나이에 이제 와서 이런 질문 의미 없는 줄 아는데, 너와 상기는 대체 어떤 사이였니? 섹스파트너라고 말하지 마. 당시엔 그런 개념이 있지도 않았고.”
“순진한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 왜 그런 개념이 없었겠어. 설사 없었다 하더라도 개념이 없었을 뿐 관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너, 그런 여자 아니야.”
“내가 어떤 여잔데? 그리고 섹스파트너가 어때서?”
다시 그녀와 나 사이 침묵이 흘렀다. 서로 눈을 쳐다보았다.
“나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녀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무래도 더 속 깊은 대화는 술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
그녀가 술 마시러 가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근처 술집에 들어갔다. 소주 한 병과 맥주 두 병을 시켜 소맥을 만들었다. 그리고 쭉 들이켰다. 내 몸에 암 덩어리가 이 술 때문에 퍼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죽든 살든 내 인생에 암덩어리처럼 남아 있던 이 문제를 꼭 풀고 싶었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데? 내 자랑 같지만 당시 많은 남자들이 나를 꾀려고 한 거는 알고 있지? … 사랑했니? 안 했니?”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역시 술이 들어가니 대화가 화끈하게 잘 이어졌다. 대답 대신 내가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사랑 같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소모적인 감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 낭비하고 아파하는데. 난 처음부터 그런 감정놀이가 싫었어. 아무튼 이왕 말이 나왔으니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봐. 내 물음에 답은 안 하고 빙빙 꼬아서 나한테 다시 질문하는 거 봐.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겁해.”
“감정 놀이에 대한 말싸움 할 때가 아냐. 그럴 시간이 내게 없어. 내 질문은 상기와 너는 어떤 사이였냐는 것이고, 서로 사랑했냐고 묻고 있는 거야. 서로 사랑했으면, 아니 니 말대로 풋사랑이라 절절하게 사랑 안 했다고 치자. 그래도 사귀는 사이였으면 왜 사귀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냐는 거야? 니 거짓말 때문에 상기가 나를 오해하고 미워하고, 결국 우리 모임이 박살난 거잖아.”
“그때 상기는 너를 미워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그건 그 녀석의 거짓말이지. 날 미워하지 않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날 니가 상기와 사귀지 않겠다고 말한 이후 상기가 날 미워한 거 아냐. 너와 나 사이를 오해하면서.”
“오해? 글쎄. 내 생각에는 상기가 널 미워했다기보다 날 자기 여자로 완전히 갖지 못해 나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 컸던 것 같아. 보통 남자의 여자에 대한 정복욕이랄까. 그 감정이 워낙 커서 너를 불친절하게 대했던 게 아닌가 싶어.”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모든 게 나에게서 빚어진 것인가, 라는 성찰적 질문이 내 속에서 문득 생겼다.
“그건 그렇고 넌 왜 상기와 사귀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어?”
“거짓말이 아냐. 남녀가 데이트하고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섹스하면 다 사귀는 거야? 외로워서 힘들어서 상기랑 가끔 섹스했을 뿐 나는 상기와 사귀고 있다고 생각한 적 없어, 단 한 순간도. 당시 상기한테 분명히 말했어. 상기도 동의했고.”
다시 정적이 흘렀다. 말문이 트인 그녀가 더욱 직설적으로 말했다.
“물론 감정이 있는 사람이니까 남녀가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섹스하면 이상하고 야릇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생기기는 하지. 단순한 섹스파트너 이상으로. 그러나 그게 나는 사귀는 것이라고 생각 안 해. 정말 솔직하게 말해볼까. 나는 너희들의 욕망을 욕망했을 뿐이야. 너희들이 그 욕망의 대상이었지. 아니, 우리 모두 상대 욕망의 대상이지. 됐니? 내 대답?”
“그럼, 누구랑 사귀고 싶었는데? 누구를 사랑했는데? 혹시 세…”
“니가 누군데? 니가 창조한 완벽한 정세준이니? 현실의 흠 있는 김준이니? 넌 고등학교 때부터 이상했어. 자신감 있는 듯 하다가 또 어떨 땐 한없이 소심하고 나약하고. 또 그러다 리더십 있게 모임을 잘 리드해가고. 종잡을 수 없는 니 행보에 내가 지치고 포기했어. 알아, 니가 완벽을 꿈꾸었다는 걸. 그러나 사람은 미완성의 존재고 흠 있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잖아. 미약함과 흠을 조금씩 매워가면서, 그렇게 성장해가면서 살아가는 거지. 처음부터 완벽함을 완성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딨어? 근데 넌 니 생활에도 나에 대해서도 항상 주저하고 망설이며 불만이었지. 그게 너를 피곤하게 만들고 나를 힘들게 했어. 니가 그때, 그니까 92년 여관방에서의 일 이후 용기를 내어 나를 잡아줬다면 지금 우리 사이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겠어?”
“과연 그럴까? 나한테 잘못이, 흠결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때 내가 널 잡았어도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을까? 너도 완벽한 세준을 사랑한 거잖아?”
“사람은 다 만나고 헤어지고 그렇게 사는 거야. 완벽한 사람이 없듯 완벽한 사랑이 어딨니? 그냥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면 되는 거지. 모든 관계는 결여야. 결여를 안고 욕망에 충실하면 되는 거야. 내가 사랑한 건 완벽한 세준을 설정해놓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너였어. 내가 시원하게 말해줬으니 내 질문에 니가 이제 솔직하게 대답할 차례야. 너는 나를 사랑했었니?”
‘아, 아!’
다시 듣는 그녀의 거친 숨소리. 헐떡이는 거친 이 숨소리, 얼마나 듣고 싶었던가! 내가 왜 그녀를 올곧이 받아들이지 못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그녀의 말이 다 맞다. 불안했고 자신이 없었다. 모든 순간 완벽을 꿈꾸었던 나는 너무나 미천하고 볼품없는 내 자신에 불만이었고 그래서 모든 관계를 회피하고 싶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한 나는 오십이 넘고서도 여전히 추상적인 개념만 떠들어댈 뿐 그 무엇에도 확신이 없고 믿음이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이 날만큼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내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죽음이 다가와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아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아니면 내가 이렇게 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결여를 안고 있는 모순적인 관계의 끝이 파멸이라도 오늘만큼은 욕망이 이끄는 대로 내 몸을 맡기기로 했다.
오십이 넘은 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탄력적이었고 들어가고 나온 곳이 확실해 늘씬하고 탐스러웠다. 이런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향기로운 여성의 냄새, 몸 구석구석 핥고 어루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혀를 내 입속으로 깊이 빨아들일 정도로 딥키스를 하고 바로 그녀의 귀와 목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애무했다. 그녀의 교성은 더 커졌다. 그 소리에 자극이 된 나는 그녀의 작고 약간 처진 유방을 부드럽게 입술과 혀로 핥았다. 흥분을 참지 못한 나는 커질 대로 커진 내 페니스를 그녀의 깊은 질 속으로 삽입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가로 막았다. ‘잠시만.’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 입속에 넣어 빨게 하더니 자세를 바꿔 내 위로 올라왔다. 그러면서 내 온 몸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적극적이고 자극적인 여자의 애무를 받아본 적 있었던가. 남자의 가슴이 여성의 유방 이상으로 흥분되는 성감대였는지 처음 알았다. 그녀는 나의 가슴과 배꼽, 고환과 사타구니를 오가며 정성껏, 그리고 화려하게 입술과 혀, 이빨로 자극적이면서 부드럽게 애무해주었다. 삽입 전 오르가즘이 여성의 전유물만이 아님을 오십이 넘어 깨달았다. 그러곤 마침내 그녀는 나의 음경을 완전 정복했다. 정복은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나는 완전 그녀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절정에 오른 행복한 정복! 잠자던 내 몸의 모든 세포가 깨어나는 듯했다. 나도 그녀처럼 탄성을 질렀다. ‘어, 아!’ 그리고 이 행복을 넘어선 완전한 행복이 곧바로 이어졌다. 여성 상위로 시작된 그녀와의 섹스는 정상위, 후배위로 이어졌고 두 번 다시없을 절정과 인생의 행복을 맛보게 해주었다.
5.
출판사 사장한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정세준 작가님! 힘드시겠지만 소설 마무리는 되어가고 있습니까? 죄송한데 언제 원고 탈고되세요? 저희도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거든요. 날짜를 알아야…”
“죄송합니다. 책 내주시는 것만으로도 저한텐 감사한 일이죠. 원고료나 인쇄료는 안 주셔도 됩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압니다. 전혀 오해 안 합니다. 그리고 거의 다 써 갑니다.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그러면 제목만 좀 가르쳐 주세요. 아, 등장인물과 소설 시놉 간단히 써서 메일로 보내주세요. 우리도 그걸로 편집회의해서 책 디자인도 정해 인쇄소에 넘겨야 하고 잡지사나 신문사에 보낼 홍보문구도 만들어야 하거든요.”
“네. 제목은 <네온사인 눈>입니다. 등장인물은 준, 미지, 상기, 정미, 장호, 그리고 세준입니다.”
세준은 마지막 문장을 완성했다.
‘화려한 네온사인 사이로 내리는 눈은 빨간색이었다가 분홍색이었다가 이내 곧 파란색으로 변하였다. 그러더니 다시 회색으로 바뀌어 내 볼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흰 눈은 욕망 가득한 이 화려한 도시 밤거리에 없었다. 순백한 흰 눈은 우리의 마음 속 낭만으로만 있을 뿐 현실에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뒤늦게 준의 사망소식을 들은 미지는 한 추모공원의 차가운 봉안당 한쪽 구석에 가루가 되어 봉안되어 있는 그를 텅 빈 눈으로 보고 있다. 작은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준의 모습, 그러나 그녀에게는 왠지 그런 준의 모습이 어두워 보였다. 그 옆으로 강렬한 햇빛 한 조각이 그녀를 비추고 있다. 햇빛 눈부신 어느 오후였다.
‘모든 것이 무(無)인데, 내가 니 소설 속의 주인공이면 어떻고 니가 준이건 세준이건 또 무슨 의미가 있겠니. 잘 가, 내 영원한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