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민족문학사 강좌 02 - 민족문학사연구소 엮음, 창작과비평, 2009
민족문학의 근대적 전환
-근대문학기점론을 중심으로-
1. 왜 기점론인가
우리 역사에서 근대의 기점은 어디에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자주적으로 근대를 달성하지 못한 이유가 큰 때문이지만, 역사적 근대가 문제적인 상황에서 문학적 근대의 문제는 더 복잡하다. 근대문학의 기점은 중세문학의 탯줄을 끊고 새로이 태어난 획기적인 작가들 또는 작품들로써 뚜렷이 증거 되어야 한다.
언어의 문제 또한 중대하다. 중세 보편주의의 언어적 담지자인 한문이 아니라 국문으로 드높은 근대의식이 표현되어야 비로소 근대문학일진대, 근대 한글문학의 온전한 발전은 3.운동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토론을 통해 근대문학의 기점은 외발적 계기만을 중시하는 비교문학적 시각, 이에 반발하여 나타난 내재적 발전론의 시각, 그리고 남과 북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반국적 시각이 아니라, 남북을 통틀어 일국적 시각 아래 고찰해야 한다는 자각이 공유되었다. 또한 탈근대 또는 탈민족주의로 탈주하지 않는 균형을 견지하는 복안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
2. 갑오경장설
안확의 『조선문학사』(한일서점 1922)에서 비롯하여 김태준의 『증보 조선소설사』(학예사 1939), 임화의 「신문학사」(1939~41)에서 갑오경장설은 설정되고 발전되었다. 그런데 왜 임화는 ‘신문학’이란 용어를 사용했을까? 자주적 근대화 조건의 결여로 조선 근대사회가 중세사회의 태내에서 자생적으로 성숙, 발전하지 못하고 외래 자본주의의 강제에 의해 출현했다는 조선 근대사의 기본 특성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사회를 미숙하고 불충분하나마 근대적 생산양식의 맹아를 장(藏)하고 있었다고 지적한 점, 실학을 높이 평가한 점, 갑오개혁을 ‘조선 근대화의 기초요 타방으로 외래 자본주의가 자기의 활동을 자유롭게 할 통로의 개방’이었다고 주장하며 그 역사적 복합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갑오 이후 신문학 초기를 ‘과도기의 문학’으로 명명하였다. 과도기란 용어는 신시대나 구시대 양자의 승패가 모두 확정적이 아닌 때 쓰는 것이라며, 일본의 ‘개화기의 문학’이란 용어는 지나치게 의타적이고 중국의 ‘문학혁명의 시대’란 용어는 지나치게 주관적이어서 신구의 투쟁이 목하 진행 중인 이 시기의 조선문학을 “평민화화는 귀족과 신흥하는 평민이 일종의 개량주의적이고 절충적인 지점에서 합작한” ‘과도기의 문학’으로 명명했던 것이다.
백철의 『조선신문학사조사: 근대편』(수선사 1948)과 『조선신문학사조사: 현대편』(백양당 1949)은 한국 현대문학사를 하나의 통사체계로 완결한 최초의 업적으로 본격적인 현대문학 연구의 개척자인 임화가 월북하여 그의 업적도 함께 망각되면서 남한에서 오랫동안 독보적 지위를 누렸다. 백철의 문학사는 사조사이다. 맑스주의적 입장에 가까우며 임화와 달리 내재적 계기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백철의 문학사는 이식문학론에 가까운데 서구 또는 일본의 사조와 직접 관계되지 않는 뛰어난 문인들은 과소평가하는데, 1920년대를 기술하면서 만해와 소월은 「주조 밖에선 제 경향의 문학」이란 별도의 장에서 작게 취급하는 우스쾅스러움을 면치 못했다.
근대 또는 근대문학의 기점 문제에 대해서 임화의 갑오경장설을 계승하지만, 임화와 달리 갑오농민전쟁에 주목한다. 갑오경장과 갑오농민전쟁을 유기적인 연쇄 속에서 파악하는 그의 관점은 기존의 갑오경장설을 넘어서는 독창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그가 우리 문학사에서 근대와 현대를 의식적으로 구분, 적용했다는 점이다. 신경향파의 등장 이후를 근대문학과 구분해서 현대문학으로 파악함으로써, ‘근대-부르주아문학/현대-프로문학’이란 진보적 관점을 견지했다.
조연현의 『한국현대문학사』(현대문학 1955.6~1958.5)는 백철의 속류 이식문학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의 문학사는 일종의 문단사이다. 조연현이 이념형으로 삼았던 문단이란, 특히 자유민권운동의 퇴조 이후 사회와의 건강한 관련을 상실하고 특수한 비밀결사적 분위기 속에서 그 내부의 수직적 질서가 공고한 일종의 중세적 길드와 유사한 조직으로 격절된 근대 일본문학의 그것이 아니었을까? 조연현의 『한국현대문학사』는 한국 근대문단의 형성사이다. 신소설을 논하는 대목에서 이미 ‘신소설문단’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소설문단을 뒤이은 본격적인 한국 근대문단의 초창기를 ‘최남선, 이광수 2인문단 시절’로 과정한 점이다. 그는 또한 계급문학운동 역시 프로문단의 형성으로 규정함으로서, 그것을 결과적으로 문단 안의 헤게모니 투쟁으로 격하해버렸던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 1930년대에 본격적인 문단이 확립되었다고 평가한다. 그의 문학사=문단사는 결국 이념적 성격이 강한 한국 근대문학사를 순수문학 중심으로 전복적으로 재편하려는 은밀한 프로젝트였다.
또 하나 유의해야 할 대목은 임화 이래 사용해온 ‘신문학’대신에 그가 ‘현대문학’이란 용어를 의식적으로 내세운다는 점이다. 이는 신경향파 등장 전후를 한국 근대문학과 현대문학의 분수령으로 삼았던 백철에 대한 반론 성격을 띠는데, 이는 조연현의 독창점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기화로 1930년 순수문학 또는 모더니즘만을 우리 문학이 따라야 할 전범으로 설정하는데 이용하고 마니 더 이상 생산적인 논의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3. 18세기설
18세기설을 문학사에 구체적으로 도입함으로서 이른바 기점 논쟁을 촉발시킨 것은 김윤식, 김현의 『한국문학사』(민음사 1973)이다. 중립적인 ‘한국문학’이란 용어선택에서 짐작되듯 중간파적 성격을 지향하였다. 18세기설의 이론적 골격은 주로 김현이 세웠다. 그는 ‘한국문학의 식민지성’을 솔직히 인정하자고 제의한다. 여기서 그는 임화의 이식문화론을 전통단절론으로 규정하면서 그 극복을 주장한다. 김현이 “한국문학은 서구문학의 단순한 모방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문학은 서구문학과 함께 세계문학을 이루는 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잘 드러나듯이, 임화의 이식문화론과 김현의 탈이식문화론은 겉으로는 대립적이지만 기실 당대 한국문학의 이식성, 낙후성, 주변성을 극복하려는 선한 의도를 공유하고 있다. 김현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려 했던 영정조시대를 근대문학의 시작으로 잡는데, 그리하여 유교적 가족제도의 모순을 묘파한 『한중록』에서 한국 근대문학사를 시작한다. 결국 김현의 『한국문학사』가 근대문학으로 내세우는 『열하일기』, 『구운몽』, 『춘향전』, 그리고 사설시조, 판소리, 탈춤 등에서 근대성은 분명 감지되지만, 과연 그것들을 근대문학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까? 조선후기의 문학은 그 내부에서 중세적인 것과 반중세적인 것이 갈등하고 투쟁하는 단계이지, 후자가 전자를 압도하여 마침내 중세의 탯줄로부터 해방된 단계의 문학, 즉 근대문학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4. 북의 1866년설
『북한의 우리문학사 인식』(창비 1991)에 의하면 북도 초기에는 1900년 이후를 근대문학으로 삼다가 『조선문학사』 1~5(1977~81)에 이르러 1866년을 근대문학의 기점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북의 학계는 왜 1866년을 근대 또는 근대문학의 기점으로 삼고 있는가? 이 시기 때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 등으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조선의 투쟁을 높이 평가하려는 의도이지만, 이는 척사위정적 성격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동의하기 어렵다.
근대문학의 기점이 되기 위해서는 작가, 작품과의 상관관계가 일정하게 성립되어야 할 터인데, 1866년설은 우리 역사 또는 문학사의 실상에 즉해서 설정되었다기보다는, 주체사상의 획기성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요구에 응해서 근대의 기점을 소급, 결정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데 된다.
5. 다시 1894년으로
연구가 진행되면서 1910년 국치를 고비로 이전과 이후 시기가 날카로운 단층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최원식)는 개화기 문학에서 일단 1910년대를 구분할 것을 제한하였다(「장한몽과 위안으로서의 문학」, 『민족문학의 논리』, 창비 1982). 여기서‘애국계몽기 문학’을 독자적이고 대안적인 단위로 설정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애국계몽기 문학을 근대문학의 기점으로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애국계몽기 신소설을 대표하는 이해조와 이인직이 비록 창작력의 감퇴 속에서 변질된 형태로라도 1910년대에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던 점,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애국계몽문학이 1910년대 초에 김교제를 통해, 물론 약화된 수준이지만 계승되고 있는 점에 유의하면, 두 시기를 비연속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일본 신파소설 번안시대(1913년 『장한몽』 연재부터 1917년 『무정』연재 이전)에도 마찬가지이다. 신파소설의 유행은 1910년대 초까지 계승되던 신소설시대를 실질적으로 종결함으로써, 1910년대 문학의 애국계몽기 문학에 대한 비연속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파번안소설도 계몽주의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소설의 잔재, 신파번안의 유행, 그리고 이광수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1910년대 문학 전체가 비연속 속에서도 애국계몽기와 연속되고 있는 것이다.
애국계몽기와 1910년대를 계몽주의시대로 통합적으로 파악하되, 1910년을 고비로 우리 계몽문학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우리 문학사에서 계몽주의문학 시대가 종결된 것은 3.1운동이다. 3.1운동 직전에 싹튼 새로운 양식적 실험(황석우, 김억의 신시와 현상윤, 양건식의 단편 등)이 이 운동 이후 20년대 신문학운동의 전개 속에서, 시에서의 낭만주의, 소설에서의 자연주의로 본격개화하면서 한국문학의 근대성이 새로운 수준에서 성취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애국계몽기와 1910년대의 친일문학도 계몽주의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친일의 방패 안에서나마 근대성의 성취를 기대했던 친일파들의 환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친일 개화론은 한국 계몽주의의 불구적 형태의 하나로 조정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1894~1905년의 시기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이다.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과 서재필의 『독립신문』(1896~99)을 한국 계몽사상의 두 근원으로 적극 평가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였다. 전자가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국한문혼용체 계몽주의라면 후자는 공화제를 모델로 삼는 한글전용제 계몽주의로 상정할 수 있을 터인데, 특히 유길준의 산문과 서재필의 독립신문에 실린 노래들은 계몽주의문학의 남상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 시기를 한국 계몽주의문학의 맹아로 설정해도 무방한데 맹아기와 애국계몽기 이후를 가르는 지표는 계몽문학에서 계몽문학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한국 근대문학을 연 계몽주의문학을 1기(1894~1905), 2기(1905~10), 3기(1910~19)의 세 단계로 나누고 3.1운동을 그 대단원으로 삼고자 한다.
계몽기 번역론과 근대적 소설 문체의 발견
1. 번역 또는 ‘문명세계’와 만나는 방법
계몽기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번역과 출판 사업을 문명화의 핵심과제로 꼽았다. 『황성신문』 1902년 4월 30일자 논설에서는 부국문명의 과업을 이루려면 학술을 갖추어야 하고 학술을 널리 퍼트리는 방법은 다양한 서적의 출판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에서 구해온 것이 대부분이며, 간혹 발견되는 것이라도 도가나 불가의 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계몽기 지식인들은 문명을 만나고 문명세계로 나아가는 게 번역이 필수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2. 번역의 세계, ‘국문’의 정립과 문법의 통일
번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선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국문이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고 문법을 통일하는 것이다. 『독립신문』, 『매일신문』, 『제국신문』 등 국문을 전용한 신문들은 물론이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 국한문을 혼용한 신문들에서도 ‘국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국어’의 발견은 근대국가의 성립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 문화적 조형물로서의 근대적 국민을 견인할 수 있는 문화적 코드가 ‘국어’였던 것이다. 『독립신문』은 근대국가는 몇 사람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전국인민을 위한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국문을 상용하여 인민의 학문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번역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뿐 아니라 문명세계의 각종 서적을 국문으로 번역하는 데 가장 우선해야 할 작업이 옥편, 즉 사전을 편찬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전 편찬은 근대국민국가의 국어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중대한 과제였다. 인위적으로 표준어를 만드는 일은 근대국민국가가 요구하는 균질적인 국민을 생산하기 위한 필수항목이었던 것이다. 사전 편찬작업을 통해 어휘를 수집하고 여기에 문법적 속박을 가해야 비로소 한 국가의 영토 안에 있는 사람들이 통일된 언어를 기반으로 하여 국민이 될 수 있다.
‘백성/인민’을 ‘국민’으로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다양한 서책의 번역 작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보급하기 위해서는 표기법과 국문체의 확립, 사전의 편찬,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는 문법의 제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띄어쓰기를 한 국문체는 『독립신문』이 여러 차례 강조하고 스스로 실천함으로써 한글전용 신문과 신소설 등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한문현토체’와 ‘국한문혼용체’가 대결하고 있었는데, 국문체와 국한문체의 대결로 좁혀져 종교신문을 비롯한 국문전용 신문과 학생용 독본 그리고 신소설 등은 국문체가 담당하고 기타 국한문본 신문과 학회지, 역사와 전기 등은 주로 국한문체를 사용한다. 결국 1905년 통감부 설치 이후 일본의 시스템에 따른 교육과정이 이입되면서 국한문체가 국문체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는데, 그 후에 벌어지는 국문전용과 국한문혼용을 둘러싼 숱한 논쟁도 여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3. 『소년』의 번역과 근대적 소설 문체의 발견
번역은 문명세계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통로였으며, 원활한 번역을 위해서는 국민국가의 요구를 반영한 국문의 확립이 요청되었다. ‘문학’이라는 말 자체도 번역인데, 서양에서도 ‘Literatur',나 'literature'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황성신문』의 몇몇 논설에서도 볼 수 있듯, 계몽기에 이르러서도 문학이라는 말은 여전히 인문학적 글쓰기를 통칭하는 전통적인 용법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광수의 노력에 의해 조선이라는 환경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번역어 문학은 종래의 문학과는 판이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구성방법과 내용, 사상에서뿐만 아니라 글쓰기 방법, 즉 에크리뛰르(ӗcriture) 측면에서도 혁신을 요청받고 있었다.
최초의 근대적 잡지, 『소년』은 지속적으로 서양문학을 번역하여 실었다. 물론 일본어의 중역이었다. 『소년』은 신소설이나 정치소설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자 했으며, 그런 문학과는 구별되는 순문학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수용했다. 최남선이 톨스토이를 각별히 다룬 까닭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사상적 취향에 따른 것이겠지만, 동시에 톨스토이 작품들을 근대문학의 모범으로 설정하려는 의도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계몽기에 혁신된 문체, 근대 한국어 산문 문체의 방향을 제시한 『소년』의 소설 문체는 톨스토이의 단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근대적 단편소설 문체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톨스토이 작품 번역은 서술형 종결어미 ‘-소’, ‘-오’가 조금 낯설 뿐 근대 단편소설의 문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특히 대사와 지문의 정확한 분리와 행갈이, 직접인용부호(『 』)와 간접인용부호(「 」), 마침표(.), 쉼표(,), 말줄임표(......) 등의 사용, 현재시제를 활용한 상황묘사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년』의 이런 문체 혁신은 문학 텍스트의 물질성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다. 텍스트의 물질성이 낳은 효과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그 진폭이 크다. 지문과 대사의 분리, 여백의 활용, 일상어의 대거 유입을 감당하기 위한 국문체의 사용 등은 그렇지 않을 때와는 전혀 다른 미적 효과와 의미상의 효과를 낳는다.
4. 「헌신자」와 근대적 소설 문체의 형성
이광수는 새로운 문학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文) 또는 문장의 구사가 필수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어 통사구조에 맞는 국한문체의 사용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이광수는 주장에서 그친 게 아니라 자신의 번역과 소설을 통하여 이런 문체를 직접 실험했다. 그것이 바로 『소년』에 실린 「어린 희생」과 「헌신자」이다. 여기서 지문과 대사의 분리, 근대적 구두법의 사용, 한국어 통사구조에 입각한 국한문체의 사용 등 『소년』이 번역을 통해 수용한 글쓰기를 전면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이광수의 실험은 1910년대 단편을 비롯하여 향후 한국 근대소설, 특히 단편소설의 문체를 선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만치 않은 의의를 지닌다.
번역이 한국 근대소설 문체의 형성에 결정적 기여는 분명한 것이다. 단형서사에서 신소설에 이르는 계몽기의 다양한 서사문학의 문체 실험, 일본 근대소설 또는 산문 문체가 형성되는 과정과 번역의 상관성, 이른바 ‘『청춘』그룹’의 독서체험과 문학관 등을 다양한 각도에서 구명해야만 그 전모가 드러날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학’은 일본을 거쳐 번역된 용어이다. 번역된 문학은 기존 문학에서와는 다른 글쓰기를 요구했다. 계몽기 인쇄매체 중에서도 이채로운 잡지 『소년』에 이르러 소설 문체는 근대적 성격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근대적이라고 해서 다른 문체보다 낫다거나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년』은 임화가 말한 순문학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근대적 소설 문체 또는 번역된 문학에 어울리는 문체를 발견했고, 그것이 향후 한국 근대소설 문체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근대문학제도의 성립
1. 문제제기
한국문학사란 무엇인가? 이는 아마도 한국문학의 역사이고, 시와 소설을 포함한 한국문학 작품들의 역사이자 그것을 창조한 작가와 동시대인들이 함께 활동하고 숨쉬었던 시대(사회)의 역사와 교직하면서 이루어진 것일 터이다. 이런 한국문학사에 굳이 제도의 개념을 설정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한국문학사를 서술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회적, 물질적, 문화적 조건들이 전제되어야 한다. ‘제도’란 이런 많은 조건과 쟁점들이 수렴되기도 하고 출발되기도 하는 개념이다. 현대문학은 두 가지 제도 개념, 즉 ① 사회, 역사, 문학사회학적 관점에서의 실증적 근대문화제도-매체, 출판, 등단제도, 사회운동, 종교운동과의 관계-의 일부 ② 문학만의 독자성을 가정하는 근대문학 이데올로기로서의 문학 자율성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문학제도라는, 두 제도 개념이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얽혀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문학사에서 이 두 가지 개념의 제도-실증적인 문화제도라는 차원과 그 안에서 문학의 자율적 가치를 정립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문학제도-는 1920년대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제도로서의 문학의 다양한 측면들
신문, 잡지 등의 언론매체와 지식체계의 근대적 성립
지금까지의 문학사에서 신문과 잡지 등의 매체는 주로 중립적인 작품 게재공간이라는 분명한 실체로 조명되거나 작가가 매체와 맺고 있는 관계(동인지, 주관지 등)에 따라 배경적 요소로 분류되었다. 잡지와 신문으로 대표되는 근대매체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근대매체의 성격에서 핵심은 지식체계의 근대적 전환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공동체 내의 소수가 지식을 독점했다면 근대사회에서 지식은 익명의 대중 전체에게 개방된 것이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 구성원 중 소수만이 공부할 수 있고, 과거를 통해 지식을 권력화할 수 있으며, 지식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위계와 권위가 부여되어 신분이 차별화되는 것이 전근대 지식사회의 특징이다. 이에 반해 근대는 국민 모두가 알 수 있고, 알아야 하고, 아는 것이 바로 힘인 시대이다. 그 지식을 만들고, 분배하고, 실어나르는 것이 말 그대로 근대의 대중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 국민국가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은 신분에 의 해 구별되지 않는 평등한 존재이며, 하나의 언어(말과 글)를 쓰는 언어공동체의 성원이라고할 수 있다. 자국어공동체로서의 민족(국민/국가), 그 자국어로 제조, 공급, 중개되는 지식에 대한 접근과 소유와 평등성, 신문, 잡지 등 언론매체로 유지되는 지식사회의 공론의 장, 그 기저에 있는 국민을 산출하는 근대적 교육 등이 근대의 지식체계를 형성하는 범주들이다. 그러므로 근대적 지식체계는 의무교육이라는 대중교육제도, 공적, 사적 출판기구, 신문과 잡지, 지식을 실어나르는 유통체계(전신, 전화, 철도), 그리고 언문일치를 내건 평등하고 중립적이며 도구적인 언어 사용 등을 그 성립조건으로 한다. 근대문학은 이런 근대의 지식체계를 기반으로 산출되고 향유된 문학인 것이다.
최초의 시발점이 어딘가와 상관없이 이런 근대적 문학제도의 성립시기는 1920년대이다. 이 시기에는 이전의 무단통치기보다 확장된 문화공간에서, 신문, 잡지 등 언론매체를 통해 자국어로 된 문학, 지식담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일간지와 『개벽』으로 대표되는 대형 종합지를 통해, 식민지근대지역의 정치, 사상, 사회운동과 일상적 사건, 서구세계와 다른 해외 지역의 매일 매일의 소식 등이 전해지면서 지식과 정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귀국 유학생들과 기존 계몽 지식인들이 이런 지식과 정보, 문학담론의 생산자로 자리잡았다.
동인지문단과 미적 자율성: 순수문학의 제도화
문학영역에서의 제도화도 이 시기에 구조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단이란 작가와 시인 그리고 비평가 등을 포함하는 전문 문인들의 직능집단이다. 이것이 성립하려면 인쇄매체와 출판현황을 비롯한 지식의 유통 시스템은 물론이고, 문학 영역을 여타 영역과 분리해 거기에 차별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특유의 이념, 즉 문학 자율성 이데올로기가 필수적이다. ‘문단’은 문학을 정치나 계몽성, 경제적 이익 등과 차별화된 특별한 가치로 이념화하는, 문학 자체의 차별화와 인정투쟁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동시에 문학 내부에서 상징자본, 문화자본을 놓고 벌이는 인정투쟁의 장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만의 고유한 영역과 가치를 설정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가치화하는 독특한 이데올로기와 자의식, 이것을 집단적이고 대사회적인 운동으로 조직해가는 활동, 그리고 여기에 근대적 매체로서의 잡지가 결합한 최초의 사례를 우리 문학사에서 찾는다면, 1920년대 초반의 동인지문단을 들 수 있다. 1919~20년대 초반은 『창조』(1919.2~21.5)와 『폐허』(1920.7~21.1)그리고 『백조』(1922.1~23.9)등의 문학 동인지가 창간된 시기이다. 문단이라는 장이 성립된 1920년대는 문단, 문학의 장 내에서 전문 문인을 중심으로 예술로서의 문학을 전면화하는 미 이데올로기가 집단적으로 개진되었다. 그리고 이후 문학사의 전범이 되는 근대적인 단편소설과 서정시, 자유시를 비롯한 문학양식과 비평논쟁 등 문학 영역 내부를 구성하는 장르와 문학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구체적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문학과 문학 외부를 차별화함으로써 성립된 문학의 장, 그리고 그 안에서 문화자본, 상징자본을 놓고 벌이는 인정투쟁의 장으로서의 문단이 동시에, 아니 동전의 양면으로서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등단제도
등단제도는 두 가지 제도적 차원, 즉 사회적, 물질적 문화제도 차원과 순수문학 혹은 문학만의 특별한 영역이라는 문학 자율성이 하나로 결합된 것이다. 즉 ‘작가됨’이란 내면적이고 순수한, 이념적 차원의 가치이면서 사회적 인증 형식을 필수적으로 거침으로써 자리매김된다. 이는 근대에서 문학의 사회성과 자율성의 이중적 측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는 우리 역사상 존재했던 거의 모든 형태의 등단제도가 실시되었다. 1910년대말 『청춘』의 현상문예와 1920년 중반 『조선문단』과 『개벽』에서 실시된 현상문예, 『창조』 등에서 실시된 동인지 창간을 통한 공인 방식, 1925년 『동아일보』에서 시작된 신춘문예, 그리고 1927년 이무영의 『의지 없는 황혼』과 『폐허의 울음』출간 등이 그 예들이다. 『청춘』의 현상문예는 잡지가 대중들에게 공모하고 매체 담당자들이 선별해서 작가로 데뷔시켜주는 시스템이고, 『창조』는 동인들만의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독립매체에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사회적 공인제도를 거부하는 방식이다. 동인지는 근대문학의 자율성이라는 이념을 매체뿐 아니라 사회적 존재형식의 차원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독자와 문학의 소비
문학의 사회적 소통의 장은 작가뿐만 아니라 비평가, 출판업자, 교육자 등과 수용자들이 함께 사회적 제도로 정립하고 유지하는 세계이다.
소설문학에 한정할 경우, 19세기 후반과 1900년대 조선에서 인쇄자본의 성장과 방각본의 득세, 근대적 활판인쇄 기술의 도입 등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1900년대 들어 애국계몽과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소설 독자에게 중요한 이념적 요소로 작용했지만, 식민지근대인 1920년대에 들어서는 이것들이 결정적 요인이 되지는 못했다. 식민지시대 전반기에는 실용적인 글쓰기 서적에 속하는 서간문류, 토론, 연설문집류, 새롭게 등장한 청년 독자들을 겨냥한 문장독본, 문학독본류의 책들이 많이 팔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소설에 국한할 경우, 시기적으로 세분화된 수용(소비)양상을 보이는데, 예컨대 당대 작가들의 작품보다 고전소설, 신소설 등이 꾸준히 소비되었고, 이는 식민지시대 후반기 대중소설과 영화의 소비자, 그러니까 도시대중문화의 소비자층으로 연결된다. 소설이 소비-수용의 차원에서는 이념이나 순수문학적 차원이외에 대중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정전화의 문제
한 사회공동체가 읽어야 할 책으로 모범화하는 작품으로서의 정전이 형성되는 과정은 첫째 독자, 잡지, 신문, 출판사 등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광고나 투표 이벤트, 둘째 시민사회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전문가들의 문학사적 평가나 작품 비평, 셋째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학교교육과 시험을 들 수 있다. 식민지시대의 경우 검열의 방식으로 항존한 억압적 국가기구는 아이러니하게 정전의 형성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해방과 함께 건국 이후의 정전 형성에서는 국어교과서 같은 공교육 수단을 통해 국가기구의 지배력이 뚜렷하게 관철되었음에 비해, 식민지시대 조선어 글쓰기로 탄생한 문학작품의 정전화 과정은 국가기구가 아닌 평단, 출판사 광고, 독자 투표, 판매량 등 시민사회 영역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문학작품의 소비와 변용: 식민지시대의 문화 콘텐츠
근대의 신생 장르인 영화와 문학(소설)은 초기부터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경성방송국의 라디오이야기물 같은 분야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 이광수의 『무정』, 심훈의 『상록수』 등이 영화화되었다. 이처럼 근대의 후발주자로 들어선 식민지시대에는 서구의 문학과 다양한 문화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향유되면서 일종의 압축성장을 이루었고, 이 과정에서 영화와 문학은 다양한 교류와 공존의 형식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로 제작되는 춘향전류의 작품들, 라디오의 공연물이 된 판소리, 새 활판기술로 제작된 유교경전 등이 이런 예들이다.
근대계몽기의 서사문학
1. 서사적 논설의 등장과 지식인의 한글 사용
한국문학사에서 근대계몽기란 1890년부터 1910년에 이르는 시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는 다른 말로 개화기, 계몽기, 애국계몽기, 근대전환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근대계몽기 문학 연구의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는, 이 시기 문학을 조선후기 문학의 연속으로 볼 것인가 혹은 단절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연속으로 보는 것을 전통론이라 한다면 단절로 보는 것은 이식론이라고 한다.
우리 문학사에서 이 시기에 새로운 문학양식들이 등장하고 상업적이고 전문적인 작가가 탄생했으며 한글 사용이 보편화되는 등 여러 변화가 일어났다. 이 시기 한국문학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문학이 계몽의 도구 역할을 적극적, 효율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이다. 한국 근대 서사문학의 계보는 서사적 논설에서 출발한다. 서사적 논설이란 근대계몽기 신문의 논설란에 발표된 단형의 이야기문학 자료들을 가리킨다. 이는 한국 근대문학의 출발을 알리는 과도기 양식이면서 근대소설의 초석이 되는 서사양식이다. 서사적 논설은 1890년대부터 1900년대에 걸쳐 『매일신문』,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 주로 실렸다. 대부분은 우화적, 비현실적 내용으로 한글로 발표되었다. 서사적 논설은 서술체와 토론체, 문답체 등 여러 형태를 취했으며 액자 구성 등 다양한 서사기법을 활용했다.
서사적 논설은 조선후기 사회상의 변화를 담아내던 야담이나, 서사를 통해 교훈을 전달하던 한문단편의 정신과 표현법을 취하고 있는 서사양식이다. 특히 서사와 교훈의 동시전달이라는 측면에서 조선후기 야담 및 한문단편과 서로 통한다. 서사적 논설은 야담에 비해 시사성이 매우 강하다. 야담이 한문으로 기록된 것과 달리 서사적 논설은 국한문혼용 혹은 순한글로 기록되었다는 사실 역시 이 둘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서사적 논설에서 시사성이 강화된 까닭은 첫째, 그것이 신문이라는 근대적 매체를 통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시기가 역사적으로 매우 불안한 격동기였다는 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는 곧 서사적 논술의 교훈성, 계몽성 강화와 직결된다. 근대계몽기 지식인들이 한글을 사용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한글 사용을 적극 추진했다는 점이다. 1894년 이후 나타난 공문서 한글표기 법제화와 1907년의 국문연구소 설립 등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신문이라는 새 매체의 출현 또한 이 시기 한들의 사용과 문체의 변화를 가져온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한성순보』, 『한성주보』, 『서유견문』, 『독립신문』 등에서 국한문 또한 한글 사용은 선각자적 지식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2. 비실명 단형소설과 계몽의식의 강화
서사적 논설에는 글쓴이의 주장이 직설적으로 드러나지만 단형소설에서는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 전달된다. 서사적 논설이 주로 논설란에 발표되던 것과 달리, 근대계몽기 단형소설들은 주로 소설란이나 잡보란에 발표되는 것도 커다란 차이이다. 여기에 속하는 작품의 예로는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소경과 안즘방이 문답」(1905년 11월 17일자~12월 13일자)을 들 수 있다.
「소경과 안즘방이 문답」은 소경 한 사람이 망건가게 앞을 지나다가 앉은뱅이를 만나 세상의 여러 불합리한 일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들은 매관매직을 비판하고 아직 온전히 성취되지 못한 개화의 실상을 비판한다. 그리고 우리 백성들에게는 횡포를 부리면서 외국인에게는 아첨하고 매국행위를 일삼는 관리들을 비판하고 있다. 「소경과 안즘방이 문답」을 비롯한 당시의 비실명 단형소설은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려운 시대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고 애국계몽과 부국강병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3.역사ㆍ전기소설과 신채호의 소설들
근대계몽기에 간행된 서사문학 자료 가운데 계몽성과 민족의식이 가장 강한 작품들은 역사ㆍ전기소설이다. 역사ㆍ전기소설은 국내외 역사적ㆍ전기적 사실을 토대로 작성된 작품들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창작 역사ㆍ전기소설이 등장한 것 역시 1900년대 중반 이후부터이다. 우리나라에 역사ㆍ전기류 문학 번역물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 중반부터이다. 근대계몽기 역사ㆍ전기소설의 탄생에는 이 시기 신문과 잡지에 실린 단형의 인물기사들 역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인물기사란 『독립신문』 『그리스도신문』 등 근대계몽기의 여러 신문에 실렸던 인물의 일대기 혹은 중요행적을 정리한 기사를 말한다. 근대계몽기의 신문과 잡지가 이렇게 인물에 대한 일화 혹은 일대기를 기획 연재한 것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창작 역사ㆍ전기소설의 출현을 계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야담이나 설화 등 바탕이 되는 이야기가 군담소설 그리고 전 등의 작품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근대계몽기 번역문학의 영향을 받고 인문기사 등을 거쳐 역사ㆍ전기소설로 작품화된 것이다. 신채호의 「이순신전」, 박은식의 「이순신」, 패서생의 한글소설 「리슌신젼」, 신채호의 「을지문덕」,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등 그 수가 많다. 그러나 역사전기소설은 번역ㆍ번안소설이건 창작소설이건 1910년 한일합병과 함께 모두 사라진다. 신문이나 잡지에 새롭게 연재, 발표도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출간된 단행본들조차 판매금지 조치 처분을 받아 회수당한 것이다. 역사전기소설의 창작자들은 작품을 통해 국권을 지켜내려는 의도를 보여주었으나 국권 지키기에 실패함으로써 그 양식 자체가 소멸되고 마는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전기소설의 작가였던 신채호는 「꿈하늘」 같은 새로운 작품을 통해 계몽적이고 민족적인 창작의도를 이어간다. 「꿈하늘」은 과거 역사전기소설과는 달리 환상성을 많이 내포한 작품이다. 모두 여섯 단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통해 드러난 주제는 첫째, 인간의 역사는 싸움의 역사이니 싸움에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다. 둘째, 싸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싸움은 나라를 위한 싸움이다. 셋째, 이제 나라의 변고를 위한 싸움에 모두 나서야 하며 그 변고는 곧 극복될 것이다. 이러한 주제들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작가 신채호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다.
4. 신소설의 대두와 서사성의 강화
‘신소설’은 근대계몽기 이후에 발표된 특정한 문학양식을 지칭하는, 고유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근대계몽기 당시에는 이 용어가 그리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단지 ‘새로운 소설’이라는 평범한 의미를 지녔을 뿐이다. ‘신소설’을 고유명사화한 사람은 1930년대 이후 김태준이나 임화 같은 문학이론가들이다.
근대계몽기 신소설의 주요한 형식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동시대 서사문학 작품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장형의 소설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작가의 이름이 실명으로 표기되었다는 점 또한 바로 앞 시기 단형소설과는 구별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신소설은 단형소설에 비해 논설적 요소가 약화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계몽성이 남아 있다. 근대계몽기 신소설은 일반서사체 소설과 토론체 소설로 나뉘는데, 전자를 서사 중심 계열의 소설이라 한다면 후자를 논설 중심 계열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일반서사체 신소설은 이인직의 『혈의 누』(만세보에 1906년 7월 22일부터 1906년 10월 10일까지 연재)에서 시작된다. 고전소설에서 신소설로 옮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는 우선 구성의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전소설에서는 시간 순서에 따라 사건이 전개되는 것과 달리 신소설은 이를 무시하고 사건을 전개한다. 비록 반청친일적이지만 『혈의 누』에서 사용한 구어체 국문문장은 이후 근대계몽기 언문일치문장의 선구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어 1908년 발간된 『은세계』는 원각사에서 공연된 연극 대본으로 쓰인 작품이다. 『은세계』에는 개화와 친일의 주제가 함께 섞여 있으며, 탐관오리의 학정과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평범한 인물의 일화가 담겨 있다. 그러나 탐관오리 비판은 이 작품의 핵심이 아니며 사실 작가 이인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탐관오리로 인한 망국론이다. 즉 조선은 일제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탐관오리 때문에 망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조선의 국권상실과 일제의 식민통치의 정당화를 위해 씌어진 것이다.
토론체 소설 가운데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이나 김필수의 『경세종』, 그리고 이해조의 『자유종』 등이 주목할 만한다. 『금수회의록』에 나타난 인간관은 다음이다. 첫째, 우주는 변함이 없고 한결같으나 사람의 일은 변화가 무쌍하다. 둘째, 지금 인간세상은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충신과 역적이 뒤바뀌어 있는바, 이런 세상에서 인간의 삶은 더럽고 어두우며 어리석고 악하다. 셋째, 현재 인간의 사는 모습은 금수만도 못하다. 따라서 인간은 금수에게 비난받아 마땅한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의 부도덕성과 반윤리성, 이기심이 직접적인 공격의 대상이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정부의 무능함도 우회적 공격의 대상이 된다. 1908년 10월에 발간된 『경세종』에서도 금수와 곤충들이 모여 친목회를 열러 인간의 세태를 비판한다.
이해조의 『자유종』은 한일병합 직전인 1910년 7월 발간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권리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힘써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토론체 교훈소설이다. 여권신장과 반상차별철폐, 지역차별 철폐, 여자 교육의 필요성, 자녀 교육의 방법론, 한글과 한문 사용에 대한 의견, 서얼차별 폐지 등 여러 주장들이 들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주제는 교육과 학문의 보급이다. 이는 여성의 권리 강조로 이어진다. 또한 『자유종』의 마무리 부분에서 등장인물의 꿈을 통해 자주독립과 개명 그리고 영원한 발전을 이야기한다. 이는 직설적으로 담아내기 어려운 주장이나 사실들을 허구적 서사를 통해 논설과 서사를 결합시키는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금수회의록』이나 『자유종』같은 토론체 소설은 그 명맥이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인 데에 있다. 이러한 소설들은 곧 치안을 어지럽히는 소설로 분류되고 금서처분을 받게 된다. 『금수회의록』은 1909년에, 그리고 『자유종』은 1913년에 금서처분을 받는다.
한일병합 이후 신소설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사문학작품이 자향하던 바는 대중성과 오락성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1910년대를 대표하는 대중매체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인데, 여기에 발표되는 이해조의 신소설들 역시 오락성 강화의 길을 가게 된다. 이해조 이후 『매일신보』 소설란에는 『장한몽』등 일본 번안소설이 등장하는데, 이는 점차 문단이 통속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1운동 전후의 현실과 문학적 대응
1. 신소설의 종언과 『무정』의 출현 : 식민지 계몽주의의 성과와 한계
앞 선 시기에 문명개화를 목적으로 씌어지던 신소설은 3․1운동을 기점으로 봉건적 논리로 후퇴하거나 친일화 또는 통속화로 전향하면서 퇴조를 보인다. 이는 신소설이 지향했던 부르주아적 사회정치 개혁이라는 역사적 전망이 상실되자 사회역사인식이 전환된 것에서 기인한다. 신소설의 몰락은 결국 1910년대의 우리문학이 새로운 문제의식을 지닌 후속세대에 의해 재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들었는데 이 새로운 대열의 선두에 이광수가 있다. 이광수의 『무정』은 1917년부터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된 소설로서 새로운 세대가 구축한 세계인식과 현실감각의 모습을 확연히 보여준다.
『무정』의 진정한 새로움은 그 문제의 설정방식에 있다. 즉, 종래의 소설들은 남녀 간의 애정과 결합이 관념적인 적대자나 중세적인 신분제도에 맞서 천상적 원리를 구현하거나 재자가인의 결연, 혹은 윤리적 당위의 실현이라는 명제를 현실화하고 간난신고의 결말이 정형화되어 있은 데 비해, 『무정』은 그 틀을 깬다. 주인공들의 고민은 외적 억압이나 장애물이 아닌 자신의 가치관 자체의 분열과 충돌로 인한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말을 빌리자면 이 작품에서 비로소 ‘자유연애’사상이 전면적으로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요컨대 『무정』은 신의 예정조화에 따르거나 공동체와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인간이 아닌 근대적 자아로서의 인간을 구현하되, 우리 소설사가 사랑의 문제를 들어 근대인식을 노정하게 되는 출발이 된다는 것이다.
『무정』이 지향하는 바는 계몽주의다. 같은 계몽의 지향점을 지니지만, 신소설이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민족적〮〮․국가적 위기 속에서 부르주아적 사회개혁을 위해 씌어졌다면 『무정』은 조선 후기 이래 꾸준히 탐색되어온 주제 ‘인간 자신의 자연적 본성’의 천착으로 되돌아간 계기가 된다. 그러나 당시에 가장 첨예한 시대적 쟁점이 아무리 자유연애라 하더라도 그 외의 사회적 쟁점이나 근대적 인물형의 구현은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게다가 사랑의 갈등도 충분히 개진하지는 못한 편이다. 즉, 갈등으로만 주어질 뿐 새로운 층위로는 발전이나 새로운 논리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그리고 『무정』에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근대적 자아(형식)에게 작가는 민족적 사명을 부여한다는 점이고 근대적 인물이 추구하는 욕망의 정점에는 일본과 미국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교육으로 미국과 일본 흉내내기’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낙관론으로서「대구에서」,「오도답파기」와 같은 논설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 논설들은 독립운동가들을 강도로 격하하고 교육과 산업의 진흥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일제 총독부의 주장에 편을 들고 있다. 따라서 『무정』의 인물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추상성과 더불어 식민지 계몸주의의 현실적 한계를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이 한계는 근대적 개인을 형상화함이 불철저하다는 것과도 같은 선상에 있다. 결국 『무정』은 근대를 지향한 우리 문학사의 노정에서 그 사상적 관문이 되는 계몽주의를 지향했지만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불철저함과 추상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2. 식민지 계몽주의의 또 다른 모습 : 우울한 배회와 암담한 현실
1910년대 우리 문학은 추상적 계몽주의적 경향이 강했다. 그러한 경향들 중 이광수와는 달리 당대의 현실을 직시하는 일군의 지식인 작가들도 있었다. 현상윤(「한의 일생」,「핍박」), 양건식(「슬픈 모순」), 양건식(「냉면 한 그릇」) 걱정없을이(본명:백대진-「절교의 서한」)등이 그들인데 이광수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봉건적 잔재와 식민지 제도가 만든 당대의 현실 안에서 그들의 계몽주의를 펼친다는 것이다. 즉, 당대의 민중과의 괴리 및 식민체제의 야합가능성에 대해 직시함으로써 소설의 인물로 하여금 무렴감에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 역시 주체의 의식이 각성이나 초극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막연한 계몽이 아닌 절절한 궁핍과 같은 현실의 문제를 소설로 끌고 들어왔다는 데 우선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운명을 탓하거나 체념으로 마무리되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대의 가장 현실적인 문제제기는 하고 있으나 원인에 대한 파악이 없고 이를 개인적인 차원의 사유로 전락시키고 나는 것이다. 따라서 시기를 같이 하는 『무정』과는 또 다른 한계를 보여주는 계몽주의라고 평가할 수 있다.
3. 3․1운동과 1920년대 작가들의 등장 : 현실-정신의 괴리와 『만세전』의 이상하고도 놀라운 성취
3․1운동은 민족사에 있어서 중대한 결절점이 되었다. 문학의 입장에서는 이전 시기의 한 좌표가 되었던 『무정』이 그 문제점을 드러냄으로써 역사로부터 얼마나 이탈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근대적 지식체계의 무비판적 수용, 방법으로서의 교육에 대한 맹신, 엘리트주의적 사회관, 역사에의 추상적 낙관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 결여 등 역사의식이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는 1910년의 국권 상실과 더불어 부르주아적 정치개혁을 꿈꾸던 신소설의 종말과 함께 민족계몽주의에 대한 회의를 가져왔다. 따라서 3․1운동 이후 새로운 세대에 의한 새로운 문학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김동인, 나도향, 염상섭, 현진건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각각 내면의 창출이나 사랑과 예술에 대한 주관적 동경, 추상적 갈등과 고뇌, 신변의 현상적 포착으로 요약할 수 있다. 봉건적 규율과 식민지 초기 자본제의 야만적 습속이 지배하던 당대에서 이들의 문학은 정신과 현실의 괴리, 그 정신적․문학적 반영을 특징으로 한다. 유학을 통해 선진적 근대사회인 일본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개성’과 ‘자아’를 문학적 사유의 출발로 보고 있었던 만큼 당시의 상황은 이들에게, 현실은 극히 축소되거나 부재하고 서사구조는 약화되는 결과를 낳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 속에서도 당대 현실의 모순을 정면에서 묘파한 이례적인 작품이 있는데 그것이 염상섭의 『만세전』이다.
원래 ‘묘지’라는 제목으로 『신생활』에 연재되었던 『만세전』은 잡지의 폐간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시대일보』에 처음부터 다시 연재된 소설이다. 내용은, 도쿄 유학생인 이인화가 만세가 일어나기 전 해 겨울, 해산 후유증으로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는 연말 시험을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해서 장례를 치르고 다시 서울을 떠나려 하는 상황이 전부이다. 주인공 이인화를 통해 근대 자본주의 세계의 인간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당대의 현실을 잘 포착하고 있다는 것이 이 작품에 대한 평가이다. 주인공이 일본과 조선의 여러 곳을 다니는 경로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4. 현실과의 조우와 소설의 변화, 그리고 새로운 경향의 출현과 근대문학의 분화
개성과 자아를 사유의 근간으로 했던 일군의 작가들은 현실을 탐색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갔다.
나도향은 1923년 이후, 경제적 궁핍과 봉건적 인습에 의한 인간성의 파괴를 추적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요절로 인해 그 후의 작품 세계는 가늠이 불가능했다.
현진건은 시선을 ‘가정’밖으로 돌려 사회와 풍속의 이면, 그리고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를 포착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적도』 이후 민족의 갈 길에 대해 우회로를 제시하는 일련의 역사소설을 발표한다.
염상섭은 1924년 이후 일상성의 포착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는 변화를 보인다. 도회 중산층을 소재로 일상적인 단명을 일상적인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성은 ‘돈’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과 ‘대규모한 갈등은 구경에는 민족의 문제로 접근해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명제를 밀고 나간다. 『삼대』,『무화과』가 이에 속하는 작품이다.(그러다 『모란꽃 필 때』이후에는 통속화의 길을 걷게 된다)
김동인의 소설 세계는 1923년 이후에도 ‘현실’을 소설 속에 들여오지도 않았고 기본적으로 크게 변하지도 않았다. 『감자』를 비롯한 몇 개의 단편,『젊은 그들』을 필두로 하는 장편 역사소설,『아기네』를 위시한 야담 등의 작품을 남긴다.
작가들의 이러한 변화와 시기를 같이해 인류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인 소비에트 연방이 수립되었다. 이에 조선에서도 3․1운동의 종료 이후 광범위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사회개조론이 전개․분화되면서 사회주의 사상이 대두되었다. 1922년부터 사회주의적 문학론이 제출되기 시작하고 최서해를 통해 실천되기에 이른다. 『토혈』,『고국』을 시작으로 사회주의 경향의 새로운 문학(신경향파 문학)이 출발되는데 『탈출기』,『박돌의 죽음』,『기아와 살육』,『큰물진 뒤』,『홍염』등이 발표되자 이기영, 조명희, 이익상, 주요섭, 송영 등이 가세한다. 이들은 가난한 민중을 주인공으로 하고 빈부의 대립을 중심에 놓으면서 민중의 생활과 체험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살인이나 방화 등의 개인적 차원으로 비화시키는 결말을 갖는 한계를 지니는데 이러한 이념의 부재를 비판하면서 김기진, 박영희, 등이 『붉은 쥐』,『사냥개』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이념을 해설하는 수준을 넘지 못함으로써 생활과 이념의 조화로운 결합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소설에 앞서 시에서는 김형원이나 김기진, 이상화, 김창술, 유완희 등의 활동이 있었고 희곡에서는 김영팔이 이러한 경향의 단초를 보인다. 이렇게 세력화된 사회주의적 경향의 문학은 ‘염군사’, ‘파스큘라’를 거쳐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의 결성을 보게 되고 이로써 1920년대 중반 우리 문학은 좌․우의 이념적 분화를 맞게 된다.
1920년대 소설의 등장과 전개
1. 1920년대 소설의 형성 기반
1920년대에 들어서면 『창조』,『폐허』,『백조』,『폐허이후』, 『영대』등의 문예동인지와『동아일보』,『조선일보』등의 신문이나 『개벽』,『서광』,『서울』등의 종합지가 등장한다. 이를 기반으로 한 1920년대 문학은 이전 시기의 문학을 부정함으로서 정체성을 획득하려했다. 흔히 반(反)춘원주의, 반(反)계몽주의로 집약되는 이들의 주장은 문학에서 정치나 과학, 도덕과 분리되는 독자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매체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정치로 일컬어지는 일제의 통치방침의 변화에 의한다. 즉, 물리력을 통한 차별적 지배 대신 문화정치를 실시하는 것인데 이로 인해 총독부 관제가 개편되고 헌병경찰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조선인 관리의 임용과 대우가 개선되었다. 그리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표방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민심과 여론을 감지하려는 촉수로서의 역할을 부여함과 동시에 식민정책이 추구하는 근대적 변화를 선전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그리고 동인지를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가지 문단, 독자 등 제대로 된 문학의 장(場)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는 동인지가 단명했던 이유인 동시에 그 담당자들에게는 쉽게 문학의 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동인지 문학이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세웠던 기존문학 경향에 대한 부정이나 초월, 고립 등의 덕목들 역시 승인권의 독점을 통해 상징적 이익을 추구한 것이라는 혐의가 짙다.
2. 유미주의의 두 가지 성격
김동인은 이광수에 이은 한국 근대소설의 개척자로 이야기 된다. 과거시제와 3인칭대명사의 사용, 철저한 구어체의 확립 등 선구적인 업적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도 없지는 않은데, 현실의 일탈을 전제한 예술적 완결성, 작가와 창작방법의 불일치 등이 이러한 비판의 두 가지 축이 된다.
김동인은 「약한 자의 슬픔」과「마음이 옅은 자여」등의 작품을 통해, 당시 조선에서 근대라는 외피를 쓴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것이 자본주의 모순을 심화시키는 한편 봉건적 유제를 존속시키고 있었음을 고발한다. 그러나 인물들의 관념적 독백, 혹은 작가의 작위적 목소리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치명적인 한계를 갖는다.
「배따라기」역시 문학적 성과 못지않게 비판의 요소가 드러나는데, 식민지 조선의 삶을 외면한 유미주의라는 것이 한계로 지적된다. 그리고 「감자」는 김동인 소설의 일반적인 경향에서 벗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작가가 말하는 것이, 가난에 의해 타락해가는 복녀의 일생을 그렸다기 보다는 오히려 복녀를 통해 도덕을 조소한 소설이라고 보아야 할 측면이 많다. 김동인이 「배따라기」,「감자」등에서 소설의 형식적 정제성을 추구함으로써 유미주의를 구현하고 있지만 이는, 미에 대한 일탈적 추구가 세계와의 조화로운 통일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외면을 통해 형식적 정제성이 얻어진 것이다.
한편, 처음으로 과거시제와 3인칭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소설이라는 양식의 통일성과 질서를 부여함과 동시에 경계의 설정을 통해 다른 담론들과 소설이 차별화되게 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은 그 자체의 질서를 통해 은밀한 방식으로 계몽이라는 근대적 논리에 종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유미주의를 추구하는 작가의 의도가 창작방법과는 불일치를 보이는 것이다.
3. 개성과 식민지현실의 낙차
1920년대 염상섭의 소설에 대해서는 『만세전』을 전후로 한 변모가 중요하게 논의된다. 초기의 「표본실의 청개구리」,「임야」,「제야」등과 『만세전』이후 발표된 「해바라기」,「고독」,「윤전기」, 「밥」등은 성격상으로 큰 결절을 보이기 때문이다.
『만세전』에 대한 평가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핍진하게 재현했다는 평과 주인공 이인화의 시선이 식민주체의 관점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평으로 나뉜다. 중심인물 이인화의 노정을 통해 당시의 조선의 모습을 낱낱이 그려냄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참상이 날카롭게 묘파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들을 낳기 위해 첩을 두는 것, 죽기도 전부터 묘지에 집착하는 것, 본인과 무관하게 결혼이 진행되는 것 등의 봉건적인 모습에 한정되고 있다. 이는 조선인에 대한 모멸로 이어지면서 그릇된 도덕적 관념에 결박된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지향성을 갖게 한다. 이러한 지향은 염상섭의 초기 작품에서 거듭 강조된 것이기도 한데 『만세전』에 그려진 조선의 모습은 이인화의 지향과 봉건적 현실의 낙차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정신적 매개를 통해 인격을 완성하려는 지향과 문명에서 뒤처진 식민 현실과의 괴리에서 염상섭이 선택한 길은 둘의 낙차를 통해 후자를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세전』이후 염상섭의 소설은 지식인이나 사회주의지를 통해 현실과 이념의 괴리를 그려내는 데 그 중심에는 ‘돈’이라는 문제를 위치시킨다. 돈이라는 무소불위의 힘 앞에 무기력하기만 한 인물군상을 제시함으로써 현실감을 갖기는 하지만 대상에 대한 철저한 부정적 인식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식민주체의 관점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평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4. 사실성의 획득과 시선의 문제
나도향 소설에 대한 논의는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다른 작가에 비해 많지 않다. 이유는 25세의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나도향은 작가적 역량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 미완의 작가로 규정된다. 대개의 논의는 초기작과 후기작의 이질성에 초점이 맞추어지는데, 초기작이 애상적이고 감상적인데 반해 후기작은 계층적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실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신청년』등에서 ‘은하’라는 필명으로 습작을 발표했던 나도향은 장편『환희』와 단편「젊은이의 시절」,「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지」등을 내놓으며 작가 생할을 시작했다. 『환희』는 연재 당시 극찬을 받은 작품인데 당대에 수용된 근대적 사랑의 개념, 곧 이성간의 숭고한 정신적 교감에 근간을 두고 이러한 사랑은 자아의 완성을 꾀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소설에서 구현되는 사랑은 구체적 형상을 얻지 못하고 추상화되면서 정욕이나 성욕으로 비껴가고 만다. 이러한 모순은 나도향이 정립한 사랑에 대한 개념이 당시 조선의 토양에서는 불가능한 것임을 입증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도향의 초기소설에 나타난 사에 대한 관념적 경도는 「벙어리 삼룡이」,「물레방아」등에 이르면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작가의 시선이 하층민으로 향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라는 갈등 구조 속에서 사랑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당대 문단의 중심으로 부상한 프로문학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초기작의 감상성은 탈각하고 소설적 육체를 획득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층민이라는 존재를 타자화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진건에 대해서는 사실성이나 사실주의 문제가 쟁점이 된다. 현진건의 소설에 나타난 모순과 부조리는 피상적이며 사실성의 성취가 약하다는 논의도 있고 기법이나 기교, 단편 양식의 문제로 현진건의 소설을 접근하는 경우도 있다.
현진건은 1921년 『개벽』에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를 발표한다. 같은 시기 염상섭이나 나도향이 무력한 고뇌나 추상적 관념에 가득 차 있다고 한다면 현진건은 작가 자신의 ‘가정’적 경험을 벗어나지는 못하더라도 사실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진건 소설 역시 1923년과 1924년을 계기로 변모한다. 변모의 결절에 놓인 소설은 「피아노」,「까막잡기」등인데 당시 지배적 가치로 부각된 자유연애, 신식결혼, 이상적 가정 등의 이면적 속성을 냉철하게 묘파하고 있다. 이후 「운수 좋은 날」,「불」등에서는 작가의 시선이 신변의 체험에서 벗어나 객관적 현실로 확대됨에 따라 사실주의적 성취를 이룬다. 하층민의 세계를 다루면서 돈의 문제나 봉건적 유제를 갈등의 중심에 놓는 것은 현진건 역시 프로문학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이 하층민을 향하고는 있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구조적인 인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운수나 원수의 방 탓으로 돌리는 차원에 머무르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