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국가의 수립과 문학적 대응(해방직후)

by 방정민

국민국가의 수립과 문학적 대응(해방직후)

1. 해방 직후의 역사적 성격: ‘해방’과 ‘분단’


8.15는 일반적인 사건과 확연히 구별되는 역사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이다. 그런데 정작 현실은 그 중요성만큼 창조적인 역사의 물길을 생성하지 못했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점령한 군정시대가 곧바로 찾아듦으로써 해방과 피점령이 함께하는 모순된 상황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또다시 비극적인 시대로 물꼬를 트고 말았으니 이른바 ‘분단시대’가 그것이다.

우리의 근대사가 식민지시대에 이어 곧바로 분단시대로 빠져들게 된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와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사회 전체가 당시 민족해방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투철하지 못했고,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 국제정치적 이해도 높지 못했다. 무엇보다 식민지시대에 어렵게 지탱해온 민족해방운동의 통일전선이 8.15이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채 분열로 치달아 결국 한밤중에 도적같이 찾아온 해방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단순히 대상이 되거나 들러리에 머물고 만 데 역사적 한계와 비극이 있다.

이 시대를 지칭하는 용어의 문제만 놓고 보아도 그 혼란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해방직후’, ‘해방공간’, ‘해방정국’, ‘해방기’, ‘미소군정기’, ‘8.15직후 해방 3년’, ‘해방 8년’ 등 다양하게 불린다. 거기에 ‘해방’이란 용어와 ‘미소군정’이란 용어가 대척점을 이루고, 그 사이에 8.15란 숫자 용어가 자리잡는다. 일제 식민지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의 출현에 중점을 두는 관점에서 해방과 함께 곧바로 수립된 미군정을 실질적인 권력체로 설정하는 관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선인 혼재한다. 그런데 이 용어들 속에서 가장 문학적인 개념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이 ‘해방공간’이다. 이는 통상 일본통치의 공식적인 종결(1945)과 분단국가 성립(1948) 사이의 3년간을 지칭하는데, 미군과 소련군이 각기 남북을 점령하여 냉전세계질서로 편입시키는 본격적인 분단체제의 형성 이전에 주어져 있던 해방의 가능성과 아울러 급속히 양극화되는 냉전질서의 강제 속에서 겪게 되는 역사적 국면의 혼돈을 환기시켜주는 은유적 용어이다.

이 시기는 오랫동안 문학사의 실종시대라 불릴 만큼 남한 중심의 분단국가적 틀과 반공주의적 시각에 의해 강제적으로 배제되거나 왜곡되었다. 그런데도 정작 한국의 현대문학, 특히 소설이 이루어낸 최대의 성과 상당수가 바로 해방 직후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분단문학’ 혹은 ‘분단극복문학’이다. 행방불명된 현대사의 ‘아비’와도 같은 존대가 바로 해방 직후이다.

2. 정치의 시대와 문학의 정치화: ‘조직’과 ‘운동’


해방 직후는 뭐라 해도 ‘정치의 시대’였으며, 이 시기 한국 문학의 가장 큰 특징 역시 ‘문학의 정치화’였다. 어떤 체제와 이념을 선택할 것이냐가 곧 문학적 실천과 동일시될 정도였으니 이러한 특징은 자연스럽게 조직 및 단체 활동으로 표출되었다. 문인들 대부부이 이런저런 문학단체들에 가입하고, 또 직접 자신의 문학적 이념을 정치와 관련시켜 주장하거나 또 특정한 상대를 그런 맥락에서 비판한 것도 이 시기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 및 문인들의 분위기와 떼어놓고 해석하기 어렵다.

물론 해방 직후 문학사를 무조건 좌우대립의 양단의 측면에서만 조망하는 시각은 문제가 많다. 좌익에선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조선문학가동맹의 대립이 있었고, 우익에선 ‘중앙문화협의회’, 전조선문필가협회, 조선청년문학가협회 등 신구대결이 있었으며 당시 문단을 단순히 좌우대립의 도식만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문학이론이나 문단적 대립이 자체 내의 갈등을 거쳐 화합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정치적 변화에 편승하여 쉽게 무마되거나 아예 배제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양자 모두가 ‘민족문학의 건설’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정치적으로 서로 대립되는 방향으로 결국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좌우를 논할 때 내세운 정치성이 각기 무엇이며 또 문학작품으로서 혹은 조직운동으로서 어떻게 정치성, 이념성을 소화하고 실천했느냐를 구체적으로 문제삼아야 한다. 좌익 측의 전조선문학자대회에 자극받아 우익은 전문협 결성대회를 갖고 곧이어 청문협이 결성되어 좌익 측과의 투쟁에 앞장선다. 우익 측의 문단이 표면상 내세운 명분은 순수였지만, 그것은 대좌익투쟁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호명하는 상징적 기호였다.

해방 직후 가장 논란의 중심이 되는 조직은 ‘문건’과 ‘문학가동맹’이다. 특히 ‘문건’이 내건 방침이 주목된다. “1) 일제 잔재 소탕 2) 문화에 있어서 철저한 인민적 기초를 완성키 위해 봉건적 문화 잔재, 특권계급적 문화 요소와 잔재, 반민주주의적 지방주의 문화 요소와 잔재를 청산 3) 세계문화의 일환인 민족문화 건설 4) 문화전선에 있어서의 인민적 협동의 완성을 기하여 강력한 문화의 통일전선을 조직” 이다. 이 단체에 도전하는 세력이 곧 등장하는데, 하나는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의 출현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문학 진영의 등장이다.

문학의 정치주의화는 경계되어야 하지만, 바람직한 문학의 정치성까지 좌우 이분법에 직결시켜서 보면 여러 문학적 실천의 가능성을 민족현실의 올바른 이해와 제대로 결부시키는 일에서 멀어지고 만다. 그런 점에서 이태준이나 안회남, 김기림, 오장환 같은 작가들이 이전 시기와 달리 해방직후 새로운 문학적 변신을 시도하면 작품과 비평적 실천을 수행한 일은 이 시기의 매우 중요한 문학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좌우 양단적 시각을 견지한 입장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부정적인 면모가 도드라진다. ‘민족문학’이니 ‘순수문학’이란 말도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되어 이론 내부의 창조적 논리화를 위한 개념으로 심화되기보다는 단순한 정치적 용어로 수사화되는 경향이 많았다. 문학적 논의로 심화되지 못하고 정치적 공방 수준으로 논쟁이 이어지면서 자연 민족현실과 거리가 먼 추상적 논의로 빠지고 말았다.


3. 민족문학론의 의의와 한계: ‘민족’과 ‘문학’


해방 직후 모든 문인, 모든 문학단체가 ‘민족문학의 건설’이라는 간판을 내걸었고 이 시기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민족문학’이었다. 누구나 ‘민족’을 관형어로 앞세워 문학을 말했다. 민족문학은 단순한 당대의 정치적 전술 개념이 아니라 식민지시대의 경험을 이어받으면서 새롭게 형성되는 개념으로, 나아가 70년대 이후 민족문학운동과도 큰 맥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그물망으로 범주화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말하자면, 20년대의 프로문학과 민족주의 문학, 30년대의 경향문학과 모더니즘문학과의 대결과 논쟁 속에서 틔워낸 소중한 역사의 싹이 해방직후의 민족문학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1946년에 남에서 ‘문학가동맹’ 등이 만들어지자 북에서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 만들어지는 등 문단 또한 남북으로 쪼개졌다. 이기영, 한설야 등이 초기부터 평양을 중심으로만 활동한 것이나 비교적 일찍 월북한 한효 등의 경우처럼 좌파 계열 내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났다. ‘문학가동맹’은 민족보다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중시하는 ‘북예총’과 달리, 친일파와 매판적 부르주아를 제외한 노동자, 농민, 소부르주아의 광범한 연대를 기반으로 한 인민전선과 당대현실에서 출발하여 이데올로기보다 문학적 과제를 우선시하는 현실주의적 원칙을 강조하였다. 남의 ‘문학가동맹’이나 북의 ‘북예총’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부합되지 않는 문인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결국 남북 양쪽의 정치체제에 부합되는 작가들만 살아남는 획일적 상황이 만들어져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적이거나 혹은 양쪽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경향은 발붙일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의 역사적 흐름은 분단으로 자연스럽게 수렴된 것이 아니라, 남북 양 진영이 철저한 통합과 배제 정책을 펼침으로써 역량이 대거 손실되고, 양쪽 모두 자파 권력에 밀착된 세력만이 할거하는 최악의 분단으로 귀결된 것이다. 다른 시기에 비해 남한의 50년대 문학이 보여주는 상대적 빈약함이나, 북의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숙청과 함께 곧바로 주체문학으로의 일방적 변질이 시작되는 것 등이 이를 잘 말해준다.

4. 해방 직후의 창작성과와 성격: ‘시’와 ‘단편소설’


이 시기에 모국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작고한 문인들(이육사, 윤동주 등)의 유고시집이 간행되었다. 『청록집』의 발간과 함께 이병기, 김상옥, 정인보, 조운 등이 대거 시조집을 내었다. 창작의 견지에서 8.15직후의 가장 큰 성과를 든다면 민족문학론 수립을 둘러싸고 활기찬 논쟁이 벌어졌던 비평 분야, 다음으로 시 분야를 꼽을 수 있다. 현실에 민감하게 대응하여 자기 입장과 감정을 즉각적으로 표출하기 쉬운 비평과 시 장르가 소설장르보다 해방의 감격과 흥분,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도정을 표현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는 격동기에 나타나는 우리 문학사의 특징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해방을 맞이한 격정을 찬가풍의 어조로 표현한 ‘서술적 선동시’ 혹은 ‘행사(기념)시’가 가장 대표적 양식이었다. 임화, 박세영, 권환 등이 주도했고, 전위파라 불리는 유진오, 박산운, 김광현, 이병철, 김상훈 등의 신진시인들이 활약했다. 해방 직후 시들은 대체로 외적 현실과 매개된 이념을 강렬하게 표출하였다. 물론 추상적 구호, 관념적 상투어와 나열, 시 형태의 미성숙이란 약점을 지니나 유진오의 「순이」와 이병철의 단시 같은 정제된 서정시, 김상훈이 보여준 가족관계의 인륜 속에서 갈등하는 내면적 심리묘사는 나름대로의 이 시기 시적 성취라 할 만하다.

상대적으로 불리했던 소설분야에서의 성취로는 염상섭과 채만식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중도적 시각에서 이 시기 현실을 형상화한 염상섭의 「양과자갑」이나 채만식의 「미스터방」 「논이야기」 같은 작품은 이 시기 대표작이다. 또한 이태준의 「해방전후」, 이선희의 「창」, 지하련의 「도정」, 김학철의 「균열」 등과 황순원의 「목넘이마을의 개」, 김동리의 「역마」 「혈거부족」, 최인욱의 「개나리」 등은 각기 좌우 진영을 대표하는 나름의 성취작들이다. 그런데 이 시기 소설에 당해 현실에 대한 반영이 두르러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당시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형상화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어느 정도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거리를 확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올바른 소설적 형상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 시대 역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당대 현실을 단편적으로밖에 담아낼 수 없었던 것은 한편으로 이 시대의 한 특징이다. 당대 발표된 소설 작품의 주요 경향은 귀환동포(300여 만 명) 등 유랑하는 민중의 삶에 대한 형상화, 그리고 토지개혁을 둘러싼 농민문제의 소설화, 그리고 작가들 자신과 직접 결부된 지식인의 자기비판과 고백 등을 들 수 있다.

농민문학은 우리 문학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다. 외형상 소재의 범위로만 한정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사회적 성격이 담겨있다. 근대문학이 시작된 이후 농민소설은 일련의 소설유형 가운데 항상 최다의 소재이자 또 최고의 작품을 산출하는 테마로 전통화되었다. 그런데 해방 직후의 토지개혁 문제는 남과 북을 막론하고 새로이 구성될 사회, 국가의 체제와 연결되면서 민족의 생활양식 자체를 새롭게 재편하는 데 가장 본질적인 사안이었다.

아울러 해방 직후 우리 민족에게 부과되었던 시급한 과제는 민족반역자 및 친일분자들을 색출, 처벌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정황은 해방 직후부터 문인들의 작가적 양심의 복원 문제가 문단의 중요과제로 부각되었다. 자기비판의 문제를 소설화한 대표적 작품으로는 이태준의 「해방전후」와 지하련의 「도정」을 들 수 있다. 「해방전후」가 소시민작가가 좌익 문학진영에 동조하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자전적 전향소설이라면, 「도정」은 사상의 갈등과 양심의 문제로 고민하던 한 지식인이 당에 투신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그런데 이 시기 염상섭이 보여주는 변모양상은 사실상 해방 직후의 역사적 성격 변화와 연관하여 특별히 주목된다. 「삼대」나 「양과자갑」 「재회」 등 식민지시대와 해방직후의 이념지향 혹은 중립적 태도는 「두 파산」 『취우』에 이르러 방관자적 입장으로 변모된다. 비판적 시각으로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던 염상섭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작품에서는 대부분 세태묘사로 시종하고 만다. 해방이라는 희망이 분단이라는 절망으로 바뀌어 현실에 기대를 갖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북한에서는 1946년과 48년, 49년에 발표된 이기영의 두 작품은 북한에서 ‘고상한 리얼리즘론’이 대두되기 이전과 이후를 대표하는 소설로 간주되는데, 특히 「개벽」은 입체적인 구성과 장면의 인상적인 묘사, 그리고 기본 갈등의 첨예화와 함께 토지개혁 당시의 다양한 인물들의 심리를 사실적으로 형상화하여 개성을 잘 살려낸 문제작이다. 무엇보다 가족과 지주 황주사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작농원 첨지의 형상은 이후 땅을 비롯한 북한문학에서 찾아보기 힘들만큼 그 성격묘사가 사실적이고 진실하다. 이런 문학적 사실이야말로 식민지시대 문학에 대한 반성과 극복 위에서 활기차게 나아가던 해방직후의 문학이 분단과 냉전체제의 고착화로 어떻게 움츠러들었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구체적인 사례이다. 이것이 냉전시대로 접어들면서 나타난 가장 실질적인 문학상의 폐해인 것이다.

식민지, 전쟁 그리고 혁명의 도상에 선 문학

1. 사회․문화적 환경과 1950년대 문학의 형성

1950년대의 문학의 경계는, 1948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를 아우른다. 한국전쟁과 4․19혁명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기이므로 1950년대의 전후 몇 년간은 1950년대적 문학의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시기 문학의 배경이 되는 요소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민족 대이동과 더불어 문단인구도 대규모 이동이 진행되었다.(월북문인, 월남문인, 재북문인, 재남문인 등으로 구분되는 이러한 문단인구의 이동은 남북한 문학의 성격이 달라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 월북문인은 수적으로 월남문인보다 많은데, 이기영, 한설야, 임화, 김남천, 박태원, 이태준, 정지용, 오장환, 엄홍섭, 박노갑, 김동석, 송영, 안회남, 한효 등 구카프계열과 민족주의 계열, 모더니즘 계열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중견문인들이 북으로 올라갔다. 월남문인으로는, 황순원, 박남수, 감아석, 최태응, 안수길, 정비석, 임옥인 등의 해방 전부터 활동하던 작가군과 선우휘, 오상원, 이범선, 장용학, 곽학송, 이호철, 박연희, 전광용, 최인훈, 전본건 등의 전후에 새롭게 등장한 작가들이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 남북한 문학의 싱호교섭이 불가능해지자 남한의 문학은 <조선청년문학가 협회(이하 청문협)>를 주도한 김동리, 조연현, 서정주, 곽종원 등과 이에 대응하는 백철, 김광균, 홍효민, 염상섭 등의 이른바 중간파 작가들의 대립구도가 된다. 그러나 이 대립구도마저 전쟁 후 분단체제가 고착화되면서 청문협을 중심으로 재편성되는데 현실에서 벗어나 추상적 휴머니즘과 부르주아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띠게 된다.

둘째, 한국전쟁과 분단체험으로 인해 남한 사회에서는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자유로운 토론이나 의사소통은 제한되고 지식인들에게는 엄격한 자기 검열이 요구되는 불구적 상황이 빚어진다. 이는 자유로운 창작을 방해하는 억압요소로 자리잡게 되고 반북정서와 반공논리의 강화로 인해 근대문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냉전체제가 낳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왜곡과 편향은 역사적 구체성을 작품화하기 보다는 세계적 보편성과 추상적 현실인식의 부작용을 낳게 되는데 이 시기를 모더니즘이나 실존주의가 풍미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1950년대 문학 전반기(1950-1955)에는 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창작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및 물적 토대를 갖출 수가 없었다. 남성문인의 대부분이 군에 편입되어 있었고 발표매체나 출판 활동을 전시에는 기대할 수 없었다. 더구나 해방 전부터 활동하던 문인들이 대거 월북한 후여서 남한의 문단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신진 문인들이 문단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했던 것도 이러한 인력의 공백 때문이었다.

셋째, 한국 전쟁의 경험은 그 해석과 예술적 재현의 어려움으로 인해 창작활동이 부진했지만 후기로 가면서 다시 활성화된다. 체험의 직접성에서 창작에 필요한 객관적 거리를 확보하기 어려움으로 인해 창작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것인데 이는 1950년대 후반으로 들면서 상당히 호전된다. 신세대 문인들의 대거 등장한 것이다. 소설에서는 손창섭, 장용학, 김성한, 박연희 등을 포함해 선우휘, 오상원, 이범선, 이호철, 송병수, 박경리, 김광식, 곽학송, 한무숙, 한말숙, 전광용, 최인훈 등이, 시에서는 박재삼, 박희진, 김남조, 이형기, 박성룡, 이성교, 박용래, 유경환, 박봉우, 신동문, 정공채, 정경영, 민재식, 구자운, 김관식 등이, 그리고 비평가로는 최일수, 김우종, 김양수, 김종후, 유종호, 이영일, 정차범, 홍사중, 고석규, 이철범, 윤병로, 이어령, 김상일, 이환, 안동민, 이석재, 김성욱, 정하은, 천상병, 신선규 등이 등단했다. 근대 문학의 역사를 100년 정도로 잡을 때, 일정한 시기에 이렇게 여러 명의 문인들이 한꺼번에 등단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이유는 전후에 다양한 매체가 새롭게 나타나 갑자기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문단뿐만 아니라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에 대한 저항이 좀 더 조직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냉전체제를 탈피하려는 국제 연대가 모색되는 등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 많은 움직임으로 포착되었다.

2. 반공 이데올로기와 보편적 휴머니즘, 그리고 새로운 문학의 지평

1950년대의 전반기 문학은 대체로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을 강하게 표출하는 선전선동류 또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문학이 주를 이루었다. 전시문학의 이러한 특징들은 구체적인 상황의 억압이나 고통을 그려내기 보다는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왜곡하거나 과장함으로써 인식의 한계를 보였다. 그리고 전쟁의 비극을 지나치게 추상적 휴머니즘의 시각으로 포착해 한국전쟁의 특수한 성격이나 민족사적 배경보다는 전쟁 일반이 초래하는 폭력성이나 비인간성에 집중하는 성향도 많았다. 이는 신세대 문인에게서 주로 나타났는데 실존주의가 기성보다는 젊은 문인에게 더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동존상잔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이를 둘러싼 열강들의 세력 다툼 같은 객관적 현실보다는 전쟁 하의 인간 실존과 본질의 질항, 삶과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 배은과 보덕의 윤리적 딜레마 등이 전면에 등장한 것인데 이러한 성향은 존재에 대한 허무주의로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소설에서 더욱 두드러짐-손창섭과 장용학 등)

1950년대 시단의 압도적인 경향은 모더니즘이었다. 전통 서정시의 흐름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후반기>의 동인을 중심으로 이른바 ‘후기모더니즘’이 이 시기를 휩쓸고 있었다. 이들 역시 한국전쟁의 구체적인 양상을 형상화하기 보다는 현대사회에 해해 회의했다. 이들은 서구의 개념과 방법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뿐 우리 언어에 천착하지 않았을 뿐더러 시 형태의 민족적 특성을 고려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실존주의 문학론은 ‘행동’과 ‘참여’라는 개념을 매개로 문학이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모색하거나, 엘리엇류의 ‘언어혁명으로서의 모더니즘’이 아니라 현실에 개입하는 정치적 모더니즘을 시도하는 이론적 작업을 하기도 한다. 1955년을 분기점으로 구체적인 현실과 부딪쳐 활로를 모색하려는 실천적 움직임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시의 새로운 실험, 리얼리즘 소설의 회복, 비평에서의 ‘민족문학론’의 전개로 이어진다. 비평계를 지배하고 있던 반공과 냉전의식을 뚫고, 인위적으로 단절된 1930년대의 문학사를 계승하면서 역사와 현실에 참여하는 문학을 유도한 것이다.

요약하면,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뉘는 1950년대 문학은, 반공과 냉전 그리고 서구의 보편주의와 추상성에 함몰되어가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으나 그 속에서도 현실과 역사의 구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역동의 시기였다.

3. 1950년대 문학의 더 깊은 이해를 위한 몇 가지 논점들.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이 시기 문학을 해석하면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전쟁이라는 폭력적 상황과 개인을 대비시키면서 실존주의와 접속하고 있다. 실존적 존재인 개인이 폭력 즉, 전쟁에 놓이면서 본질과 실존을 고뇌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둘째, 민족 수난의 서사로서의 전후문학이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반공이데올로기와 연결되면서 대체로 추상적 휴머니즘적인 역사 허무주의로 나아가는데, 민족의 공존을 가로막는 외세에 대한 저항과도 이어진다.

셋째, 한국전쟁을 국민국가의 형성과정과 연결 짓는 관점이다. 참전의 경험은 막연한 수난이 아니라 ‘동원된 국민의 경험’으로 의미화 된다. 나아가 전쟁뿐 아니라 1950년대의 문학주체들의 역사적 경험들을 식민지 체험과의 연속선상에 두고 그들이 견지했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기제들을 역사적으로 맥락화하는 것이다.

1950년대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기를 고립적으로 구획할 것이 아니라 선행하는 역사적 시공간과 연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후세대의 대부분이 이른바 ‘이중언어 사용자들’이라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먼저 일본어를 익히고 해방 후 한글을 새롭게 배웠으며 더 먼저는 한문을 습득한 상황이므로 이들의 언어정체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문학이 한국전쟁과 실존주의, 반공이데올로기 라는 세 측면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고 이들의 이중언어적 현실을 다루지 않는 것은, 현실로 존재했던 식민지 과거와 깨끗이 결별하고 새로운 시간의 창조에만 몰두하려는 포스트식민성 특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근대전환기나 식민지 시기의 이중언어적 상황은 그것이 초래한 시대적 현실과 함께 다루어지는 데 반해 전후세대의 문학은 유독 언어의 정체성이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 현대 희곡사 개관

1. 전후 희곡의 지형도 : 반공주의와 실존주의의 풍경


1950년대는 전후에 수입된 실존주의 사상의 영향이 컸던 시대다. 프랑스 실존주의는 여과되지 않은 채로 수용되어 불안의식, 공포, 절대고독, 소외, 우수, 절망, 무한 저항 같은 분위기를 띠면서 남한 지식인들에게 체화되었다. 해방공간과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은 식민지 세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감성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었는데, 식민지 세대가 민족의 정체성 문제에 천착하고 있었다면 전후세대는 삶의 부조리에 대한 극한의 저항을 통한 실존적 생존방식을 모색하고 있었다.

희곡에서는 이러한 부류의 대표로 오학영을 들 수 있다. 그의 실험3부작(「닭의 어미」,「생명은 합창처럼」,「꽃과 십자가」은 우리나라 근대극의 주류였던 사실주의극에 대해 본격적으로 반발한다. 부조리한 삶과 모순된 사회상황에 처한 실존적 자아의 사적 반응에 초점을 맞추고 극도의 추상성과 관념성이 남발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사실적 희곡들은 분단 사회의 총체적 모순이나 냉전의 세계체계론적 모순으로부터는 도피하고 있어 ‘전위극’의 정치적 진보성을 확보하는 단계로는 나아가지 못한다. 1950년대 희곡계에는 그 외에도 「가족」을 통해 ‘수정사실주의’경향을 보인 이용찬이나 「불모지」의 차범석, 하유상, 김상민 등의 신세대 작가들이 등장했다.

1950년대 소위 전후파 작가들의 작품들은 유치진, 김영수 등 식민지 세대 작가의 작품과는 차별성을 보인다. 기성작가들이 반공극과 민족주의 성향의 역사극에 몰두했다면 전후파 작가들은 현대인의 실존의식, 전후 사회의 풍경, 신․구세대 간의 갈등에 주목했다. 그러나 이들은 구세대들의 식민지 체험을 걷어내려고 노력했지만 미국이나 유럽의 연극에 경도됨으로써 한국적 연극 문법의 모색에는 한계를 드러낸다.

2. 1960년대, 혁명과 일상의 근대성


5․16군사쿠테타로 남한 사회는 급속히 군사독재체재로 재편된다. 군사정권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키고 의존적 경제정책을 폈으며 가부장적 폭력성을 드러냈다. 이러한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조명해볼 수 있는 희곡작가는 이근삼, 오태석, 신명순, 윤대성, 박조열 등이다.

이근삼의 「원고지」는 시계라는 소도구를 통해 자본주의적 규율시스템과 물신주의를 풍자했다. 「국물 있사옵니다」,「위대한 실종」,「인생 개정안 부결」등의 작품 경향도 마찬가지다. 오태석 역시 「웨딩드레스」를 통해 전통과 천박한 자본주의를 대비시키면서 「육교 위의 유모차,」「환절기」등의 작품으로 근대성의 부박함을 역설했다. 신명순은 「전하」에서 현대인의 정체성을 각성하고 윤대성은 「망나니」를 통해 양식실험과 민중의식의 정립을 시도하면서 민중사관에 입각하여 사회모순에 저항하는 민중상을 제시했다. 그리고 박조열은, 고도의 상징성과 알레고리적 기법을 추구했다.


3. 1970년대, 직설법과 암유(暗喩)의 사이


1970년대의 해외 번역극 공연은 동시대의 실험적인 연극을 소개하고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새로운 감각의 주제의식과 형식실험을 성공시켰다. 이강백은 「알」,「파수꾼」등의 작품을 통해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시공간을 다루지 않고 익명적이고 관념적인 캐릭터로 극도의 알레고리적 메시지를 만들어냈다. 이는 당시 문화공보부의 사전검열과 공연금지 조치 등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이현화는 「누구세요?」,「카덴자」로 폭력과 공포를 통해 시대상을 드러낸다. ‘잔혹극’으로 분류되는 이러한 작품은 육체에 대한 가학적 폭력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현대인의 불안한 내면을 묘사하는 동시에 억압적인 정치체제에 의한 피해의식을 간접적으로 극화했다. 한편 윤대성은 196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서사극과 마당극을 접맥했다. 「노비문서」,「너도 먹고 물러나라」,「출세기」등의 작품에서 사실주의극 양식에 마당극을 적용해 비판적 사회의식을 표출한다. 전통극 양식인 개방극은 극중 현실에 대한 관객의 동일시를 방해하는데 무대와 현실 사이에 비평적 거리감을 개입시켜 비판의식을 고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와 역사에 대한 모호성으로 인해 구체적인 역사성을 획득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리고 오영진은 「아빠빠를 입었어요」,「모자이크 게임」,「나의 당신」등을 발표해 정력적인 활동을 보이는데 반일, 반공 사상에 투철한 민족주의자로서 일본에 대해 극도의 거부를 보인다.

1970년대는 소극장 연극이 활성화되었다. 소극장 중심 연극 환경은 연극계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데 우선, 대극장의 스팩터클한 대형 연극이 아닌 개성적인 실험극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과 프로시니엄 무대로 일관하던 대극장 무대양식 대신 다양한 무대형식이 가능해졌다는 점, 그리고 대관일정에 속박되지 않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1970년대는 제도권 연극에서는 서구극의 왕성한 공연, 다양한 작가들의 등장, 소극장 중심의 연극실험 등의 특징이 나타나고, 비제도권 영역에서 마당극이 본격화되기도 한다. 김지하의 「진오귀굿」을 시작으로 제도권에 대한 부정과 극복의식을 담아내면서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고 관객과 무대의 경계를 해체함으로써 연극의 정치적 발언과 사회참여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4. 1980년대, 통제와 해금의 분열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들어선 전두환의 신군부는 1970년대의 억압정책을 그대로 고수했다. 많은 작품들이 대본검열에서 반려되거나 극장폐쇄조치가 내려지는 등 연극인들의 자기검열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극 활성화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연극제’, ‘전국 지방연극제’ 등은 1980년대 제도권 연극이 정착되는 계기가 된다. 그 결과 국가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제도권 연극들은 사실주의극 위주로 보수주의적 경향을 확산시켰다. 대표적으로 차범석, 이재현, 윤조병, 노경식 등이 있다. 그러나 비사실적 희곡도 전혀 창작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오태석과 이강백이현화 등은 이전의 시도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복근은 여성주의 시각에서 한국사회의 계급문제를 천착하기도 한다.

1980년대는 연극에 대한 국가의 감시와 통제가 심화된 시기이면서 국가 주도로 연극을 지원한 모순의 시대였다. 그러나 시대적 질곡 속에서도 창작극 발표가 활성화된 시기이고, 재야 연극 운동이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1960년대 문학

1. 개관


4․19혁명은 이승만정권의 종말과 동시에 한미일 간의 새로운 관계정립의 계기가 되기도 하면서 근대적 민주화운동의 기원이 된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의 가능성은 곧이어 일어난 5․16군사쿠테타로 좌절되고 군사정권하에서 진행된 경제성장과 산업화는 1960년대를 불안하면서도 역동적인 시대로 만들어갔다. 한미일 3국은 반공민주주의를 공유함으로써 과거 문제는 덮어두고 정치 및 경제적 유대를 맺게 되고, 공업화 중심의 도시 비대 현상으로 인해 한국 사회의 일상의 모습은 크게 변화하게 된다. 또한, 자본주의 시장의 성장으로 교육과 문화의 수요가 증가했으며 도시화에 비례해 대중문화의 저변도 확장되었다. 한국영하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고 교양잡지와 대중매체들도 양산되면서 시민의식이 성장했다. 그러나 기획으로 무장한 국가주의의 억압성이 노골화되면서 시민 사회적 분위기는 비판의식을 자극했으며 민족과 민중에 대한 인식과 탈식민지적 저항을 심화 확대시켰다.

1960년대 문학은 이러한 중층적 상황을 반영하면서 근저에는 여전히 한국전쟁의 경험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의 문학에 비하면 전쟁으로부터 객관적인 거리가 확보됨으로써 감상주의에서 벗어나 간접화되거나 내면화된 방식으로 문학에 반영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1960년대의 문학은 4․19의 경험의 절대화 및 신화가 일반적인 경향이었다.(김윤식은 4․19를 개인의 자유가 원칙적으로 인정된 사회의 진원지로 규정한다.)

하지만 4․19는 문제의 해결이기 보다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1960년대의 시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은 김수영과 신동엽이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시는 이념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심미적 자연이나 서구문학에 대한 동경의 형태로 표출되었지만 전쟁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고 이 시기를 거치면서 사회와 역사에 대한 자각으로 방향을 잡게 되는데 위의 두 시인의 시가 이정표가 된 것이다.

1960년대 소설은 한국전쟁과 4․19를 배경으로 하면서 근대화 과정에서 파생하는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성찰하는 데 집중했다. 즉, 개인의 문제를 강조하면 서사성이 약화되는 대신 내면화되고 제도와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귀결되는 반면, 사회문제에 천착하는 소설들은 경제적, 정치적 불평등을 문제화했다. 그리고 이러한 두 경향은 미학적 방식에서도 각각 모더니즘(개인)과 리얼리즘(사회)으로 대별되고 있다.

2. 1960녀대의 시 : 새로운 언어질서의 추구

1960년대의 시작원리


1950년대 후반의 문학에서도 점차 사회적 관심이 커져갔지만 1960년대에 와서 새로운 문학세대의 출현에 의해 구체화된다. 김춘수, 전봉건, 김종삼 등에 의해 새로운 현실을 표현하는 언어의식이 자각된 것이다. 문학과 현실의 자각을 통해 개인을 표현하는 과정이 이 시기이며 김수영과 신동엽이 이러한 개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1960년대 시문학에서는 이전세대와는 달리 언어의식을 기반으로 한 의미 전달에 상당히 주력하고 있었다. 전통지향의 서정시와 현대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시, 그리고 사회 현실에 참여하는 시들이 새로운 언어질서 추구를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 『창작과 비평』,『시인』등의 잡지가 출현하면서 시적 지형이 형성되기까지 1960년대는 시작부터 새 것에 대한 갈망이 강했던 시기였다.


모더니티의 눈으로 :하 ......그림자가 없다.


김수영은 「묘정의 노래」로 등단해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앤솔러지를 펴내기도 했는데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러나 좌우익의 격심한 대립 속에서 시대의 요구 즉, 민족의 독립과 진정한 해방이라는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 수는 없었다. 해방 이전에는 연극을 하면서 일본과 만주를 유랑하고 한국 전쟁에서는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간 이력이 있다.

초라한 시인의 일상에서 ‘설움’과 ‘양심’을 토로하고 일상처럼 민주주의는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어 하늘 아래 사람은 하늘의 그림자를 볼 수 없듯이 민주주의 속에서 시민은 민주주의를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치를 ‘그림자가 없다’로 묘사한다. (「하......그림자가 없다」, 『달나라 장난』, 춘조사, 1959.)

김수영은 4․19 정신을 표현하는 시를 많이 발표했는데 「기도-4․19순국학도 위령제에 부치는 노래」,「육법전서와 혁명」,「푸른 하늘을」,「만시지탄은 있지만」,「가다오 나가다오」,「중용에 대하여」,「그 방을 생각하며」등의 다수가 있다.


시정신을 뿜어내는 분수처럼


신동엽은, 1950년대 후반의 전후 모더니즘의 해독에서 벗어나 건전한 역사의식이 투영된 시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남성적인 목소리와 역사의식, 그리고 서사적 상상력은 등단작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에서부터 시작된다.

4․19는 독재정권에 대한 항거하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회복한다는 측면과 이를 바탕으로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한다는 두 개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집권한 민주당정권은 새로운 역사의 요구에 부응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따라서 통일에 대한 모색은 차단되고 있었다. 그러나 신동엽은 「아사녀」,「주린 땅의 지도원리」,「껍데기는 가라」등에서 중립화통일론을 내세운다. 한편 대지를 경작하는 쟁기꾼이라는 의미에서 ‘전경인(全耕人)’의 가치관을 강조하면서 물질문명이 빚어낸 오염과 파괴가 오늘날 어떠한 가치관을 통해 극복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선각이 도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장편서사시「금강」에서는 동학의 이념과 역사적 현실의 결합을 시도하는데 신동엽의 문학 전체와 맞먹는 무게를 지니는 시라 할 만하다. 물론 역사의식의 전면 노출과 서사시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거리가 되고는 있지만 4․19의 의미와 그 문학적 표현에 있어서 가장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신경림의 「남한강」연작 등에도 영향을 미침으로써 더욱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후의 영향에 대하여


김수영과 신동엽 외에 김지하도 1960년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다. 시인과 민중의 만남이라는 문제를 ‘풍자와 민요정신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데 민요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골계를 비판적으로 극복하여 현대적인 새로움으로 시에 접목하려한 것이다. 이는 1980년대 중반에 제기된 김지하의 ‘민족미학론’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1960년대의 시인으로 김준태, 양성우, 이성부, 조태일, 최하림, 양성우 등을 거론할 수 있다.

한편 1960년대의 시문학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뛰어난 언어의식을 갖고 있는 새로운 시인들의 대거 등장이라는 점이다. 강우식, 강은교, 김광협, 김윤희, 김종철, 이종해, 마종하, 박의상, 박리도, 박제천, 오유원, 오세영, 윤상규, 이가림, 이건청, 이근배, 이수익, 이승훈, 이탄, 정현종, 허영자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서정주 등 해방 이전에 등장해 주류를 형성한 시인들의 영행을 받는 한편 1950년대 이후 변화된 시대의 감수성을 적극 표현한다. 이로써 시인은 자의식을 성찰하게 되고 언어에 대한 자의식과 언어 표현의 세련, 그리고 방법적 구축을 통한 시세계의 제시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전 시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이로 인해 추상적인 표현과 한자어를 탈피했으며,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를 시에 담았다.


3. 1960년대의 소설 : 근대적 개인의 성찰과 비판적 현실 인식

개인과 내면의 발견, 비판적 자의식의 문학


4․19로 촉발된 자유에 대한 열망은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개인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근대사회의 주체로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의 소설은 이러한 근대적 주체로서의 인식 문제가 주제화된다. 대표적으로 최인훈과 김승옥을 들 수 있다.

최인훈의 『광장』은 서로 다른 두 정치체제의 대비를 통해서 남북한의 실상을 고발한 작품으로 ‘밀실’과 ‘광장’의 상징은 각각 ‘자유’와 ‘평등’의 의미를 지닌다. ‘밀실’은 보장되지만 비속한 남한에 환멸을 느끼고 월북을 하지만 열린 광장 대신 철저한 통제를 경험한 주인공 이명준은 제3국행을 감행하지만 자살로 마감된다는 서사를 지닌다. 국토와 민족의 분단,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바탕으로 재편된 해방 후의 한국사회를 밀도 있게 다룬 작품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회색인』,『서유기』에서도 반복되면서 신체의 자율성은 물론이고 상상력과 의식의 자율성마저도 규율하는 억압을 여실히 보여준다. 연작소설『크리스마스캐럴』역시 신식민주의적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개인을 억압하는 정치제도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쳐 근대적 개인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한 것이다.

김승옥은 개인의 문학성이 시대의 문학성으로 승격된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생명연습」,「무진기행」,「서울, 1964년 겨울」,「환상수첩」등을 통해 비정하고 탈출구가 막힌 현실에 둘러싸인 주체의 불안을 형상화했다. 김승옥의 소설은 허무감 속에서 전망을 상실한 1960년대 지식인의 내면 풍경을 감각적으로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승옥의 소설은 전후 한국사회가 추진한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부정성과 그 병적 징후를 감각적으로 포착해낸 점에서 4․19와 관련짓기보다는 1960년대적인 특징을 더 많이 보여준다. 1960년대의 근대화는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고 그 사물화와 소외의 정도도 심화되었다. 김승옥의 소설은 바로 이 점을 비판적 감각으로 포착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그에 비해 지적 성찰의 방식으로 접근하는 이청준의 소설은 근대화 과정에서 소멸되어가는 인간적 가치를 재현한다. 육체와 정신의 결핍을 의미하는 「병신과 머저리」는 결국 과거와 현재의 한국 사회가 만든 희생물을 의미하고 사라져가는 예인 혹은 장인을 소재로 하는 「매잡이」,「과녁」,「줄」등은 존재 의미를 상실한 전근대적 풍속의 세계를 강조한다.

구성과 문체의 심미성으로 주목받아온 서정인도 「강」,「나주댁」등에서 산업화로 인해 소외된 계층의 일상을 서정적이면서도 허무주의적으로 묘사한다.

이들 소설은 근대적 주체의 위기 즉, 부도덕한 독재권력의 가증스러운 행태를 인식하는 개인의 혼란과 절망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외와 저항, 산업사회의 문학적 응전


물량 위주의 성장을 추진한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정책은 전쟁으로 인한 절대 빈곤을 해소한 점에서는 분명 성공이었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의 원리가 원천적으로 억압된 채 진행된 경제발전은 빈부의 차이를 극단화시키고 사회적 소외와 계층 간의 갈등을 촉발했다. 이러한 현실을 1960년대 리얼리즘 소설은 적나라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호철의 「탈향」,「판문점」,「소시민」을 비롯해 김정한의 「사하촌」,「모래톱 이야기」,「수라도」, 그리고 박태순의 「무너진 극장」,「정든 당 언덕 위」,하근찬의 「수난 이대」,「왕릉과 주둔군」,「삼각의 집」,남정현의 「분지」,「너는 뭐냐」등에서 이러한 정서와 더불어 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드러난다.

1960년대의 소설의 경향을 분석하면, 4․19라는 새로운 활력과 가능성 속에서 출발해 진지한 성찰과 문제의식으로 다양한 문학적 경향을 보여주면서 정치권의 억압

민중·민족문학의 양상


-1970,80년대의 문학-

1. 개관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한국사회는 냉전적 분단체제와 그에 조응하는 억압적 군부독재체제 그리고 그 경제적 토대인 예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를 온존·강화하려는 힘이 지배했다. 그리고 민주적 세력과 민족적 세력이 독재체제에 맞섰으며 양자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띠었다. 이것은 현실에서는 군부독재를 축으로 한 지배블록과 피지배민중의 갈등과 투쟁으로 나타났으며, 문화의 영역에서는 냉전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민중적 민족문화운동의 각축과 투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한국문학은 자유주의문학과 민중·민족문학으로 대별되는데, 본질적으로 이 둘은 사실 피지배민중의 문학적 자기표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문학이 포착하고 형상화해낸 민중의 모습은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의 통제 아래 소소유자적 자기이익조차 제대로 실현해보지 못하는 농민, 저임금에 시달리며 기본권조차 요구하지 못하는 노동자, 농촌에서 쫓겨났으나 도시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룸펜의 삶을 강요당하는 산업예비군인 도시빈민들, 그리고 지배블록의 말단부에 속했지만 충분히 잉여를 분배받지 못한 화이트칼라 들이었다.

이들 1970년대 민중은 아직 자신들의 계급·계층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미정형의 존재들로서 이들에게 근대는 소외와 불안의 표정으로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관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뿌리뽑힘의 감각, 혹은 정체성의 혼란상은 당대 문학에는 오히려 풍부한 낭만적 상상력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비록 그것이 비자발적으로 신식민지적 근대화라는 소용돌이에 휩쓸린 민중들의 우울한 상상력이기는 했지만, 거기에 깔린 이 타율적 근대에 대한 본원적인 거부 혹은 낯섦의 감각은 우리 문학에 유토피아적 감수성을 부여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민중과 민중문학의 저항성과 유토피아적 감각은 1980년대 문학은 이러한 급진적 낭만주의에 단단히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1980년대 후반 6월항쟁을 통해 5공화국이 소멸하고 부르주아 민주변혁이 일정하게 수행되기 시작하자, 이러한 1980년대 민중·민족문학의 초역사적인 급진적 낭만성과 경직성은 갑자기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2. 민중 주체의 형상화와 이상주의적 열정: 1970,80년대 민중시


민중 주체의 형상화와 이상주의적 열정: 1970,80년대 민중시

1970년대는 민중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이는 이미 1960년대의 ‘참여시’에서부터 예고된 일이다. 김수영이 그의 유작 <풀>에서 지향했던 ‘역사’와 ‘시’의 결합, 신동엽이 서사시 <금강>을 통해서 지향했던 ‘역사’와 ‘시’의 만남은 이제 1970년대 시인들에게는 보편적인 지향점이 된다.

1970년대 시사를 열어젖힌 가장 큰 사건은 김지하(金芝河)의 ‘<오적>필화사건’이다. 특히 <오적>은 ‘담시’라는 장르 실험을 했다는 데 더욱 의미가 깊은데, 담시는 판소리 사설 형식을 차용해 민중의 목소리로 현실의 모순을 단죄하려는 형식적 시도였다. 이러한 실험은 전통적 형식을 현대적으로 변용하려는 시도이며, 서정적 장르인 시에 ‘이야기(譚)’, 즉 서사성을 결합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김지하 외에도 양성우, 조태일, 고정희 등 1970년대 민중시인들은 이처럼 현실에 짓눌린 주체를 형상화하는 데 주력한다.

이러한 민중시의 주제의식은 ‘죽음과 재생’의 모티프로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황토>의 주체는 ‘애비’의 죽음을 딛고 일어선다. 양성우의 ‘겨울’도 ‘봄’의 도래를 위한 제의였으며, 이러한 죽음과 그것을 통한 재생의 모티프는 당대 민중시의 가장 강력한 미학적 토대였다.

한편 해학, 혹은 신명이라는 미학적 장치를 통해 당대의 척박한 삶과 그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민중의 의지를 드러낸 신경림(申庚林)의 <농무>(1973)는 단지 내용적인 측면에서만 민중성을 구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쉬운 시어의 사용으로 형식 전체를 통해 민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 했으며, 이는 이후 1970년대 시인들에게서 민중성의 내용과 형식을 창출하려는 커다란 흐름으로 자리잡게 된다.

1970년대는 민중시의 시대이면서 시동인지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당시의 시운동은 자본의 힘으로부터 시의 순수성을 구해내려는 수공업적 시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반시』는 그 이름부터가 현실성을 탈각한 ‘언어세공’으로 이루어진 시에 대한 부정이라는 의미였다. 김창완, 김명인, 정호승, 김성영, 이동순 등이 참여하여 당대 민중들의 삶을 형상화하고 그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쉬운 시를 지향했던 이들의 활동 역시 이러한 1970년대 시의 주요 맥락 속에 있는 것이다.

전복적 주체성의 구현과 무기로서의 시: 1980년대 노동시 · 반미시

1980년대 시에 와서 점차 사회과학적 인식이 깊어지고 변혁의 방도를 고민하면서 서서히 변혁에 대한 열망이 구체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민중시가 다양한 양상으로 분화된다. 즉 사회변혁운동의 주체에 따라 ‘노동시/농민시’로, 변혁운동의 방향성에 따라 ‘노동시/반미시’로 계열화된다. 1980년대 시에서 가장 중요한 특성은 시적 주체의 변화이다. 1970년대 민중시의 시적 대상은 민중이었지만, 그들을 호명한 이는 ‘시인’이라는 지식인 계층이었다. 1970년대 시에서 민중은 시인들에게 연민의 대상이었으며, 시적 화자는 그들에게 늘 시혜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면 이러한 한계가 극복되고 민중이 스스로 시창작의 주체로 나선다.

그 대표적인 시인이 바로 박노해와 백무산이다. 이들은 <노동의 새벽>(1984), <만국의 노동자여>(1988)를 통해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겪는 삶의 고통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계급적으로 자각해가는 과정을 살아 숨쉬는 듯한 육성으로 생생하게 전달한다.

박노해와 백무산의 시에서 전해지는 노동자들의 삶의 실상은 비참함 그 자체이다. 이들의 시는 ‘비참함’ 그 자체의 리얼리티를 생명으로 여긴다. 이들은 ‘시를 통한 혁명의 완수’가 이 시대 노동시의 주목적이며, 그것은 생생한 리얼리티를 통해 대중들의 공감대를 확장시키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1980년대 민중시의 생명력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것, 즉 생생한 리얼리티에서 더욱 살아났다. 김남주(金南柱)는 <진혼가>(1984),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를 통해 직설적 언술의 진실성을 다양한 형상으로 구현했고, 김용택(金龍澤)은 <섬진강>(1985)으로 1970년대 신경림의 뒤를 이어 농민시의 전통을 이어간다. 이산하(李山河)의 <한라산>(1987)도 1980년대 민중시가 지향하는 이념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인시켜준다. 고은(高銀) 역시 1970,80년대 민중시를 논할 때 빼놓아서는 안될 시인이다. ‘만인보’에서는 ‘만인의 삶에 대한 시적 기록’이란 뜻 그대로 민중의 삶을 역사화하려 한다. 이러한 시인의 포부와 미래에 대한 이상주의적 신념은 그가 바로 1970,80년대 민중시의 적자임을 확인시켜준다. 김정환도 ‘민중’과 ‘혁명’이라는 키워드가 절절한 내면적 서정 속에 융화되는 1980년대 서정시의 한 전범을 보여주는 시인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밖에 채광석, 안도현, 이시영, 김사인, 문병란, 고정희, 정호승, 김준태 등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1980년대 민중시인들이다.

1980년대 민중 시인들은 ‘이념’이라는 창을 통해서 세상을 보았고, 또 그랬기에 미래에 대한 이상주의적 열정 또한 간직할 수 있었다.


3. 민중·민족문학적 전통의 부활과 급진적 전망 : 1970,80년대 소설

민중소설과 분단소설의 향연 - 1970년대


1970년대 계급갈등을 가장 뛰어난 방식으로 보여준 작가가 <객지>(1970), <삼포 가는 길>(1972)을 쓴 황석영(黃晳暎)이다. 박태순(朴泰洵) 역시 <정든 땅 언덕 위>(1966), <한 오백년>(1971), <무너지는 산>(1972), <독가촌 풍경>(1977) 등 이른바 ‘외촌동 연작’을 통해 변두리 빈민층의 삶의 실상과 거기에 드리워진 개발논리의 비인간성을 지속적으로 고발한 작가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윤흥길(尹興吉)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와 조세희(趙世熙)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5~78)도 도시빈민 문제와 민중층의 양극분해를 보여준 작품으로 한국 근대시민문학의 기수라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1966), 김춘복의 <쌈짓골>(1976), 송기숙의 <자랏골의 비가>(1977), 이문구의 <우리동네>(1977~80) 연작 등이 민중의 곤핍한 일상세계의 필연적인 문학적 반영이었다.

한편, ‘민중소설’과 함께 ‘분단소설’은 1970,80년대 한국소설사의 가장 뚜렷한 성취로 기억되어야 하는데, 최인훈(‘광장’), 황석영(‘한씨연대기’), 김원일(‘어둠의 혼’ ‘노을’), 이문열(‘영웅시대’ ‘변경’), 김성동(‘만다라’ ‘오막살이 집 한 채’), 윤흥길(‘장마’), 현기영(‘순이삼촌’), 전상국(‘아베의 가족’) 등의 작가가 분단의 상처와 집단적 치유에 관한 작품을 남겼다.

급진적 전망과 리얼리즘 서사의 위기 - 1980년대


1970년대는 소설의 시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뛰어난 작가들이 출현했고 그들에 의해 주목할 만한 성취가 이루어진 시대였다. 그것은 분단과 전쟁, 독재라는 억압의 역사가 20년 이상 지속되는 동안 한국 사회와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그만큼 발전했고, 그때까지 침묵하는 타자였던 민중의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대의 민중은 곧 작가 자신이거나 작가의 가족, 이웃이었고 그들 작품 속 주인공의 행로가 곧 동시대 민중의 전형적인 행로였던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의 정치상황 하에서 1970년대 소설이 굳건하게 보였던 민중적 행로는 갑자기 혼돈 속으로 빠져버리고, 그나마 ‘분단소설’만이 소설계의 명맥을 이어나갔다고 할 수 있다.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1980~81), 조정래의 <유형의 땅>(1981), 김원일의 <불의 제전>(1983) 등이 그 성과이다.

또한 이 시기에 대하역사소설 간행이 붐을 이루었는데, 박경리의 <토지>(1969~94), 조정래의 <태백산맥>(1부. 1986), 황석영의 <장길산>(1984), 김주영의 <객주>(1984) 들은 한국 소설사에 굵은 획을 그은 역작 장편 소설로서 조선시대부터 식민지시대에 이르는 민중사의 흐름을 큰 화폭 속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문학을 종한 민중성의 역사적 확인이라는 획기적 의미를 갖는다.

이런 굴곡을 거치면서 1980년대 소설은 현실로 귀환한다. ‘말할 수 없는 공포’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강박’을 왕복하던 답답함을 벗고 현실로 들어간다.

1980년대 새롭게 등장한 신인들은 대략 1950년대말~60년대 초반에 태어나 20대 초반 대학시절에 광주민중항쟁을 겪은 광주세대들로서 이른바 ‘운동권소설’이 등장한다.

김남일의 <청년일기>(1987), 정도상의 <친구는 멀리갔어도>(1988), 김인숙의 <79~80>(1987)은 당대의 급진적 학생운동과 헌신적인 학생운동가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인데, 작가들 자신이 학생운동 출신이거나 당시 노동운동과 반체제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운동가들이었다.

이 시기에 이들 학생운동소설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노동소설이었다. 정화진의 <쇳물처럼>(1987)과 방현석의 <내딛는 첫발은>(1988), <새벽출정>(1989)이 발표되었을 때, 이 작품들은 시에서의 박노해, 백무산 등과 함께 혁명적 노동문학의 전형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6월 민주항쟁의 승리에 뒤이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고양된 노동계급운동의 불퇴전의 낙관적 전망을 형상화한 새로운 단계의 민중문학의 탄생을 알리는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1980년대 후반 ‘민족·민중소설’의 갑작스러운 세대교체와 급진적 낭만성, 그리고 그것을 사뭇 선동한 급진적인 비평의 위세는 1980년대 소설과 문학 전반에 커다란 정치적 편향과 탈문학화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1970년대까지 현실과의 창조적 긴장 속에서 발전해온 한국 현대소설의 리얼리즘 전통을 위기에 빠뜨렸다. 이는 1990년대 이후 문학의 세대교체 과정에서 1970,80년대적인 것들의 합리적 핵심이 온당하게 전승되지 못하고 일거에 추방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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