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

by 방정민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 프랑스의 언어학자. 구조주의 창시자가 됨.


기표와 기의- 언어의 진짜 주인


성서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오만이 하늘을 찌르려 했던 탓으로 신이 벌을 내려 이렇게 민족마다 다른 언어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아 홍수 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하늘에까지 이르는’ 높은 탑을 세우려 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이다. 결국 바벨탑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준공식을 보지 못하는데, 탑의 완공을 막기 위해 하나님이 썼다는 수단이 재미있다. 언어를 뒤섞어 놓았다는 것이다. 건설 현장에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일꾼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바벨탑은 마침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한 사람에게도 발음할 때마다 조금씩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발음 행위가 있을 때마다 말은 달라진다. 다르다는 것, 차이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공통점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은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걸까? 이 당연한 사실을 물고 늘어지면서 차이의 중요성을 역설한 사람이 바로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다.


파롤의 아래에는 랑그가 있다


같은 내용의 발언이 사람마다 달라지는 것을 소쉬르는 파롤(parole)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다양한 파롤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을 랑그(langue)라고 부른다. 굳이 번역하자면 파롤은 발언이고 랑그는 언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파롤은 말하는 사람의 일회적인 발언이다. 따라서 말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랑그는 변하지 않는다. 랑그란 발언을 할 때 말하는 사람이 따라야 할, 혹은 적용해야 할 규칙을 가리킨다. 누구든지 같은 언어로 같은 발언을 하는 사람은 모두 같은 랑그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랑그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문법 체계다. 하지만 랑그는 문법 체계와 똑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일부분으로 포함하고 있다. 랑그는 문법을 비롯해서 사람들이 언어 사용에 관해 무의식적으로 함의하고 약속한 규칙들의 체계 전체를 가리킨다.

장기를 둘 때 이따금 말들을 일부 잃어버려 부족한 경우가 있다. 이때 흔히 바둑돌이나 주사위 등으로 그 말들을 대체해서 둘 수도 있는데, 이처럼 대체 가능한 것이 파롤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체되었다고 해서 장기판의 규칙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니다. 랑그란 바로 그런 장기판의 규칙과 같은 것이다. 랑그는 갖가지 특수한 양태의 파롤을 가능하게 해 주는 불변의 공통요소, 바로 파롤의 수면 밑에 있는 ‘구조’다.

랑그가 본질이라면 파롤은 현상이다. 본질이 없는 현상이 있을 수 없듯이 랑그가 없다면 파롤은 없다. 반면에 본질은 반드시 현상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랑그는 그 자체로는 드러나지 않고 반드시 파롤의 옷을 입고서만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이 랑그와 파롤의 기묘한 의존 관계다. 사실 여기에는 단순히 영어의 문법체계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그런 말을 사용하는 맥락, 즉 콘텍스트(context)의 차이도 포함된다. 즉 ‘my mother'의 올바른 번역은 뭘까?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다. 영어 단어 ’my‘는 분명 ’나의‘라는 뜻이지만 우리말에서 그 표현이 사용되는 맥락을 고려한다면 ’my mother‘는 ’우리 어머니‘라고 해야 옳다. 여기서 역시 랑그란 단순히 문법 체계로만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기표는 기의의 옷이 아니다


랑그/파롤이 전제되어야만 언어학이 기능한다. 랑그/파롤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언어학은 곧 어학과 같은 것이 되고 만다. 랑그/파롤의 구분은 소쉬르 언어학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언어학 자체의 기반이 되는 셈이다. 소쉬르는 언어학자였으므로 랑그를 기초로 해서 언어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에 나선다. “언어는 관연 지시 대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일까?” 언어와 언어의 의미가 관련이 있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 그러나 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예를 들어, ‘개’라는 말은 실제로 살아 있는 생물인 개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의성어나 의태어 또는 한자와 같은 상형문자라면 말과 지시 대상의 관계를 어렵지 않게 추리해 낼 수 있다. 개를 ‘멍멍이’라고 부르는 아이의 말이나, 개의 모습에서 나온 한자어인 ‘犬’같은 말은 개라는 생물의 특성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말의 개와 실제의 개는 전혀 관계가 없다. 사물과 직접 관련된 말이 아닌 경우에는 그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파란색, 깨끗함 등등의 추상적인 말들은 실제 지시 대상과는 무관한 언어 기호일 뿐이다. 언어 기호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을 별개로 본 것은 혁명과도 같은 발상이었다. 우선 그것은 전통적인 견해에서 고정불변의 것으로 보았던 ‘정의’의 개념을 해체한다.

언어 기호의 본질적 의미, 정체성이란 없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그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체성을 파악해야 한다. 예전에는 언어 기호 자체에 정의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 기호는 다른 요소들과 맺는 관계와 차이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소쉬르는 언어 기호를 기표와 기의로 나눈다. 기표(signifiant)란 ‘표시하는 것’이며 기의(signifie)란 ‘표시되는 것’이다. 즉 기표가 언어 기호라면 기의는 언어의 의미라고 보면 된다. 기표는 당연히 기의와 일치한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믿음이었다. 기의의 몸에 꼭 맞는 양복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소쉬르는 그 당연시되었던 기표와 기의의 일치를 거부한다. 기표는 기의의 옷이 아니다. 언어 기호는 사실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개’라는 말이 실제 생물인 ‘개’를 가리키게 된 것은 순전한 우연이며, 양자는 서로 자의적인 관계에 있다. 오히려 개는 말이나 소가 아니기 때문에 개가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어휘에는 나름대로의 기원을 두고 발전해 온 것들도 많겠지만, 소쉬르는 어떻게 해서 언어가 발생하고 발달해 왔는가는 문제시하지 않는다. 그의 용어에 따르면 그것은 언어의 역사, 즉 통시성인데, 언어학에서 중요한 것은 통시성이 아니라 언어의 규칙과 체계, 즉 공시성이이기 때문이다.


차이를 중시하라


소쉬르의 언어학이 혁명적인 이유는 바로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 즉 언어기호와 지시 대상이 서로 무관함을 밝혔다는 데 있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언어 기호 자체 속에 지시 대상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았지만, 소쉬르는 양자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소쉬르의 언어학적 성과를 반영하면,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동일성보다는 차이가, 실체보다는 관계가 훨씬 중요해진다.

언어 기호의 가치(의미)는 각각의 언어 기호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에 의해 정해진다. 또한 각각의 언어 기호들은 그 속에 고정된 의미를 튼튼히 끌어안고 있는 실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차이라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 뿐이다. 예컨대 플러스와 마이너스라는 말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실체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대립되는 전기적 속성을 나타내는 ‘관계’의 개념일 뿐이다.

언어라는 랑그도 역시 독립적인 실체처럼 존재하는 게 아니라 기의와 무관한 기표들로 이루어진 그물일 따름이다. 파롤은 발언자 개인이 주체가 되지만 랑그는 그렇지 않다. 랑그는 사회적으로, 집합적으로 약속된 언어의 규칙 체계이므로 랑그를 이용하기 위해 각 개인은 그 규칙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군다나 기표가 기의와 무관하므로 각 개인은 실제 사물을 통해서 랑그를 하나하나 배워날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랑그와의 관계에서 수동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인간과 언어의 전통적인 관계는 역전된다. 인간 개인은 다만 랑그를 이용하여 파롤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인데, 그 랑그는 인간의 소유가 아니고 마치 독자적인 생명을 지닌 존재처럼 행동한다. 인간이 언어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인간의 주인이다. 모든 판단이나 사고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구조 속에 내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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