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독일의 철학자. 19세기를 ‘유럽학문의 위기’라고 규정하면서 철학적 대안으로 현상학을 주창했다. 데카르트를 극복한다는 애초의 의도를 충분히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근대철학과 현대/탈현대 철학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판단중지: 진리를 구하는 괄호
철학에 있어서 실증주의란 한 마디로 보이는 것만 믿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면 믿을 수 없으므로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실증주의자에게 신비한 것이란 없다. 후설은 여기에 반론을 제기한 철학자로 ‘눈으로 본다는 것’, 즉 의식이라는 것은 전혀 당연하지도, 확실하지도 않은 것이라 주장한다. 플라톤이 의식의 경험을 ‘하나의 경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후설은 의식이야말로 우주에서 가장 커다란 수수께끼라고 말한다.
실증주의에 맞서서
실증주의에서 의식을 당연시하는 이유는 의식의 주체와 의식의 대상을 완전히 분리하기 때문이다. 나는 주체이고 사물은 대상일 뿐이다. 물론 관찰과 의식에 대한 분리는 객관적 과정이며, 그 대상에는 사물뿐 아니라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포함하기도 한다. 즉, ‘나’를 의식의 주체로 고정시키고 그 밖의 모든 것을 나 이외의 것으로 대상화시킨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연과학에서는 일반적이다. 이로 인해 실용주의적 태도는 19세기 과학의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런데 에드문트 후설은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는 실증주의적 논리를 전복한다. 원래 수학자였던 후설은, 실증주의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의식’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해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현상이라 보고 있다. 인간이 어떤 방법으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실증주의에서는 경험의 주체와 대상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당연시하고, 형이상학에서는 ‘선험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종교에서는 신이 인간 경험의 실제 주체라고 본다. 그렇다면 실증주의도, 형이상학도, 종교도 아닌 ‘진정한 철학’에서는 무엇이 경험을 주재하고 있는가?
의식에는 방향이 있다.
의식의 외부에 대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증주의의 전제를 부정하는 후설은 원래 수학자였다. 그래서 수학적인 도형을 예로 들어 의식을 설명한다. 원뿔을 볼 때,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밑에서 보면 원이고 옆에서 보면 삼각형이다. 즉, 누구나 시점이 고정되어 있으므로 한쪽 면에서 볼 수밖에 없다. 형태가 명확한 도형이 이러한데 하물며 복잡한 사물, 나아가 사회적 현상이 의식의 대상이라면 객관적인 태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후설의 주장이다. (객관적인 답을 찾지 못해 자주 바뀌는 교육제도 등이 그 예가 된다.)외부의 대상은 본질의 일부만을 의식에게 보여줄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본질 자체를 알 수 있는 ‘절대적인 지식’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 후설은 그것을 의식 바깥이 아니라 의식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원뿔을 원뿔로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관찰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뿔에 대한 여러 가지 시점의 관찰이 의식 안에서 종합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증주의에서는 의식을 외부 대상과 마찬가지로 고정된 실체처럼 취급했지만, 후설은 의식의 존재방식이 외부 방식과 전혀 다르다고 본다. 의식이란 ‘무엇에 대한 의식’이며 대상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한다. 의식이 이렇게 대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해 후설은 ‘지향성’이라고 명명한다. 의식과 대상은 지향성으로 한데 묶여 그 자체로 ‘경험’이라는 사건을 이룬다. 후설은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지향성의 한쪽에 있는 의식을 노에시스(‘사유‘라는 뜻의 그리스어)라 하고 다른 쪽의 대상을 노에마(’사유된 것‘)라 부른다. 즉 노에시스와 노에마는 지향성으로 묶여있는 관계다.
괄호 속에 관해서는 노코멘트
데카르트는 철두철미하고 전반적인 회의를 통하여 얻어진 선험적 자아(모든 것을 회의하고 난 뒤 최후로 남은 자아이므로 ‘경험 이전의 자아’라고도 함)를 정신적, 심리적 실체로 고정화한다. 그리고 칸트는 감각이라는 일차적 경험에 이미 ‘순수직관’이라 부르는 일종의 판단작용이 결부되어 있음을 밝혔으면서도 이를 질료와 형식으로 분리시켜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을 정립한다. 그에 비해 후설은 지향성을 중심으로 주체와 대상을 한데 묶었다. 이 방법이 지니는 장점은 그렇게 한데 묶인 경험 자체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밖의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시켜 고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후설의 유명한 방법론인 ‘판단중지’이론이다. 즉 의식의 주체는 외부 대상의 일부만을 보는데 그것도 주체의 관점에 상응하는 측면만 보게 된다. 이렇게 주체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하나로 묶인 주체와 대상에 대해서는 판단하기를 포기하고 ‘의식에 주어진 현상’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이를 철학적인 용어로는 ‘현상학적 환원’이라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대상을 의식 안의 현상으로 인식하는 방법을 말한다. 따로 떼어 인식하던 주체와 대상을 하나로 보고 그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는 이러한 방법은 완벽한 논리라기보다는 외부 대상의 본질 추구에 대한 한계점을 설정했다는 의미가 강하고 이것이 후설의 커다란 업적이 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후설의 현상학적 인식론이 마치 각본이라도 짠 것처럼 철학 이외의 분야에서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입체주의 유파의 피카소(인물의 앞모습만으로는 총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으므로 옆모습과 뒷모습까지 한 화폭에 그려 넣는다)가 그 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