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통 바슐라르

by 방정민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쿤의 패러다임 이론보다 앞서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으로 과학의 발전이 단절과 비약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선구적으로 주장했다. 그의 영향으로 프랑스 현대 철학은 과학철학의 관점을 대폭 수용하게 되었다.


-인식론적 단절: 단절과 불연속의 과학

흔히 예측 가능한 분야라고 생각하는 과학의 영역에서도 불연속적으로 발전하는 현상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과학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 이전까지의 과학적 성과물을 토대로 연속적으로 발전하는 게 아니다.


철학과 과학

인문계와 자연계의 대표주자는 역시 철학과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존재를 다루고 철학은 사고를 다루지만 어떤 의미에서 철학은 과학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과학은 철학적 담론을 대상으로 하지 않지만, 철학은 과학적 담론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슐라르의 작업인 과학철학이다.

과학철학의 전통적인 과제는 과학적 방법과 개념에 방향을 지어주는 것이다. 철학은 과학 위에 당당히 군림하면서 과학자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계도하는 감시자의 역할과 더불어 과학이 나아갈 길을 밝혀 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슐라르는 그렇듯 과학 위에 군림하는 철학을 거부하고 오히려 철학이 과학에 비해 뒤쳐져 왔다고 생각한다. 과학은 언제나 역동적인데, 철학은 체계를 고집하고 닫힌 공간에 안주하려 하며 운동하지 않는 이성에만 의존한다. 과학과 철학의 이런 이미지는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어 과학 앞에는 ‘첨단’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어지고, 철학이라고 하면 그리스, 로마 시대를 떠올리게 된다.

바슐라르는 철학의 임무가 과학적 인식의 기준을 찾는 데 있다는 전통 과학철학의 생각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로 생각해 각각의 과학들 내부에서 그 기준을 찾으려고 했다. 즉 각각의 과학들을 검토하는 데서 철학적 개념들이 올바르게 정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바슐라르는 수학, 물리학, 화학 등 첨단의 과학들이 발전해 온 과정을 직접 추적하면서 그 작업을 수행한다. 그 때문에 바슐라르의 저작들은 전문 과학서적을 연상시킬 정도로 내용이 과학과 연관되어 있다.


연속과 단절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중요한 과학적 발전은 언제나 고르게 일어나지 않고 특정한 시기에 비약적으로,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식으로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슐라르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만든다. 그에 따르면 과학적 발전은 그 생리상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비약적으로, 혁명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더구나 과학은 기존의 과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성과를 부정하면서 과거와의 단절과 절연을 통해 발전한다. 대표적인 예로서 바슐라르는 뉴턴의 역학 체계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체계 사이의 단절을 들고 있다. 상대론적으로 사유하면 뉴턴의 과학을 이루던 개념들은 파괴되어 버린다. 그리고 뉴턴 체계로 산출된 모든 계산 결과들은 상대성의 계산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과학은 상식이 아니라 지식이며 담론이다. 그래서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단절의 또 다른 측면으로서, 과학적 인식과 상식 사이의 단절을 주장한다. 상식은 새로운 과학적 사고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과학적 사고가 이미 나타났을 경우에는 그것을 일상적 사고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경향을 갖고 있다. 예컨대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이 별개의 것이며 우리의 이성에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상식을 뒤집음으로써 출현할 수 있었다.


철학은 미완성

근대 철학의 시조라 일컫는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의심하는 주체’라는 명백하고 단순한 것으로부터 모든 사고를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슐라르는 실재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과학사에서 단순성을 성취하려고 했던 모든 시도는 예외 없이 과도한 단순화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은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단절을 품고 있는 셈이다. 알튀세르가 이 개념을 받아들여 청년 마르크스와 후기 마르크스 사상을 단절로 바라본 것은 유명한 사례다.

바슐라르가 모든 철학에 부정의 철학, 비철학(philosophie du non)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이면에, 철학은 문제에 대한 답 자체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답을 찾는 과정을 중시하는 학문인 까닭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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