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통해 인생을 배우고 삶의 여유를 가져보자!
◆ 그림 그리는 일의 의미 - 회사후소(繪事後素)
- 제 삼 팔일(第 三 八佾) 8장 -
子夏問曰(자하문왈):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교소천혜 미목변혜 소이위현혜. 하위야.)」
子曰: 「繪事後素.(회사후소.)」
曰: 「禮後乎.(예후호.)」
子曰(자왈):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已矣.
(기여자 상야. 시가여언시이의.)」
자하가 묻기를 “‘예쁜 웃음에 보조개가 예쁘며 아름다운 눈에 눈동자가 선명함이여! 흰 비단으로 채색을 한다,’ 하였으니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길,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하는 것보다 뒤에 하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자하가 다시 묻기를, “예가 뒤이겠군요. 하자
공자가 말하길, “나를 일으키는 자 상(자하)이로구나! 비로소 시를 말할 만하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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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꽤 읽었다고 하는 사람 중에도 이 ‘회사후소’라는 말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그림 그리는 일(繪)은 흰 비단(素)을 마련한 뒤에 하는 것’이라는 말인데, 당연해도 너무 당연한 말이지요. 흰 종이(바탕)를 먼저 마련해야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요. 이것을 동양철학 쪽에서는 흔히 ‘先德後禮(선덕후례)’라고 하여 공자가 강조한 仁(인)에서 비롯된 忠(충)이나 信(신) 같은 덕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예를 갖추어 왕을 규제하고 사회를 다스렸다는 겁니다.
이 말을 예술적으로 풀어보겠습니다. 그림 그리는 일이 <흰 바탕>위에 성립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공자의 말은 그림 그리는 일과 마찬가지로 예의 행위도 <흰 바탕>으로 비유되고 있는 어떤 근원 위에서야 비로소 성립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흰 바탕>은 仁(인)의 다른 이름 中(중), 性(성), 太極(태극)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충신으로 예를 바탕으로 삼는다면 예가 이루어지는 그 근원은 결국 다름 아닌 道(도)임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위의 대화에서 공자는 먼저 그림 그리는 일과 예의 행위를 나란히 비교하면서 도를 <흰 바탕>으로 표상하여 양자를 일치시킨 다음에 비로소 시를 논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림 그리는 일인 예술과 예의 행위, 즉 삶이 다 같이 <흰 바탕>인 태극 또는 도라고 하는 근원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삶과 예술이 모두 도를 근원으로 하고 그러한 전제 위에서 비로소 시를 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면, 공자의 이 말은 결국 도가 바로 예술 정신이요, 나아가서 시정신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도는 참다운 삶이 비롯되는 <흰 바탕>이요, 또한 그 <흰 바탕>은 모든 예술과 시의 창조적 근원인 예술 정신이요 시정신인 것입니다. 도라고 하는 <흰 바탕>이 바로 시정신이라면 어떠한 시문도 이와 같은 시정신을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이 곧 예술이요, 하늘의 이치를 받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도라고 공자는 생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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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옛날에는 시를 쓰는 일(또는 그림 그리는 일)이 그만큼 중요했나 봅니다. 시정신이 곧 예술정신이고 바로 도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흔히 동양화는 여백의 미학이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여백도 일종의 그림이요, 고도의 작가정신인 셈이죠. 인생도 이처럼 여백을 어떻게 그리느냐, 어떻게 여백을 채색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40대이니 이제 인생의 여백에 대해, 여백의 미학에 대해 더 신중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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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진
십년 동안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 십년을 나는 잃어버렸고
잃어버린 세월은
흰 바탕이 되었다
한참을 생각하다
카메라 셔트를 눌렀다
그리고 지웠다, 찍힌 흰 바탕을
아무 생각없이
무엇을 그릴 것인가
어떻게 칠할 것인가
아무것도 찍을 수 없었고
어떤 색도 편집되지 않았다
흰 바탕은 나를 안아주지 않았고
나는 흰 바탕에 갇힌 나를 감히 들여놓지 못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소리 없이 울려 퍼지고
경전 속에서 불타 오른
지난날의 십년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흰 바탕이 있어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채색이 없어 흰 바탕을 놓아두는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이 흰 바탕을 볼 수만 있다면
흰 바탕이 나에게 한 점만이라도 허락한다면
점들을 이어 삶을 채울 것이며
잃어버린 십년을 외로이 둘 것이다
아무 것도 찍지 못한 십년의 세월 위에
하얗게 하얗게 번져가는
내 삶의 사진들,
이젠 사진되기 싫어
흰 바탕에 점을 어질러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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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 제 삼 팔일(第 三 八佾) 13장 -
王孫賈問曰(왕손가문왈): 「與其媚於奧, 寧媚於竈, 何謂也.
(여기미어오 영미어조 하위야.)」
子曰(자왈): 「不然, 獲罪於天, 無所禱也.
(불연, 획죄어천, 무소도야.)」
공손가가 물어 말하길, “아랫목 신에게 잘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부엌 신에게 잘 보이라하니 무슨 말입니까” 하였다.
공자가 말하길, “그렇지 않다.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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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전부터 <논어> 공부할 때 이 말, ‘하늘에 죄를 지(얻)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는 말이 참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당연히 하늘은 백성, 국민이겠죠. 그런데 요즘에는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에게 죄를 짓고도 뻔뻔하게 잘 사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그런 것 같아요. 온갖 특혜를 다 누리고, 불법 다 저지르고, 그러고도 잘 사는 것 보면요. 전직 대통령을 봐도 그렇고 스타 연예인을 봐도 그렇고요…
우리 하늘이 너무 무른 것 아닐까요? 하늘을 우습게 아는 자들을 우리 용서하지 말자고요. 용서를 너무 쉽게 해주니까 하늘에 죄를 짓고도 하늘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하늘보다 더 잘 사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너무 심한 말을 하는 건가요? 하늘 무서워할 줄 아는 공인이 나오길 빕니다. 우리 모두 하늘 무서워하며 살아야하지 않을까요… 내 자신에게 가장 진실한 마음을 가지는 것, 그것이 하늘에 죄를 짓지 않는 것이겠지요.
◆ 공자의 도 - 충서(忠恕)
- 제 사 이인(第 四 里仁) 15장 -
子曰(자왈): 「參乎! 吾道 一以貫之.
(삼호! 오도 일이관지.)」
曾子曰(증자왈): 「唯.(유.)」
子出.(자출.) 門人問曰(문인문왈): 「何謂也(하위야)」
曾子曰(증자왈):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부자지도, 충서이이의.)」
공자가 말하길,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고 하니 증자가 말하길, “네!” 하였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이 묻기를, “무슨 말입니까?” 하자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뿐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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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읽었다하면 이 정도의 말은 알아야겠죠. 공자의 사상을 한 마디로 하자면 바로 인(仁)입니다. 사랑이죠. 사랑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자면, 예수의 사랑, 부처의 자비, 공자의 인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이라면, 부처의 자비는 사람은 물론 미물, 심지어 무생물까지 포함하는 제일 넓은 의미의 사랑이라 할 수 있죠. 그러나 공자의 사랑은 위 두 사랑보다는 좁은 의미인 차별적인 사랑입니다. 공자의 사랑을 다른 말로는 극기복례(克己復禮), 애인(愛人)이라고도 합니다. 세 분의 사랑이 다 훌륭합니다.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겠죠.
공자의 사랑, 인을 다른 말로 하면 위에 나오는 충서라 할 수 있습니다. 충(忠)은 자기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서(恕)는 자기 마음을 미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충서는 자기를 미루어 상대방에 미치게 하는 마음, 즉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자기 마음을 진심으로 다하면 진실로 남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자기에게 충실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공자의 사상은 한 마디로 자기에게 진실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 바로 충(忠)아닙니까. 흐트러짐 없는 진실한 마음! 이것이 충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것!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합시다!
◆ 외롭지 않은 덕이란
- 제 사 이인(第 四 里仁) 25장 -
子曰(자왈): 「德不孤, 必有隣.(덕유고, 필유린.)」
공자가 말하길,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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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덕은 결코 멸하지 않아 언젠간 햇빛을 볼 날이 있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덕은 외롭지 않아 이웃이 반드시 있다고 했는데, 외롭지 않은 덕은 과연 무엇일까요? 정의와 덕을 강조하는 시대란 역설적으로 그만큼 사회에 정의와 덕이 없다는 반증이겠죠. 공자의 시대에도 2천 5백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사회에는 정의와 덕이 없나봅니다.
저는 이 말을 ‘뭐든지 독불장군처럼 혼자 가지(가려하지) 말고 이웃에게 손을 내밀자. 그러면 이웃은 반드시 그 손을 잡고 함께 가야한다.’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진정한 덕은, 정의는 젠체하며 혼자 고집스럽게 있지 말고 사람들과 함께 가야 조금은 이 사회의 더러움이 씻겨나갈 것이라고 말입니다. 혼자서는 절대 사회의 악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덕의 이웃화, 공동화!’ 저는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물론 공자의 의도는 진정한 덕을 가지면 동지가 있기 마련이고 사람이 모이게 되니, 그러한 덕을 길러야 한다는 말이겠지만 말입니다.
◆ 불가지론자가 되자
-제 오 공야(第 五 公冶) 12장 -
子貢曰(자공왈):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부자지문장, 가득이문야, 부자지언성여천도, 불가득이문야.)」
자공이 말하길, “선생님의 문화에 관한 견해(문장)는 들을 수 있었지만 선생님의 성품과 천도에 대한 말씀은 들을 수가 없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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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보면 이와 비슷한 말이 몇 문장 나오는데, 공자(맹자 포함)는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이고 다분히 종교적인 것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편에서는 제자가 저 세상이 있느냐고, 귀신이 있느냐고 공자에게 묻자, 공자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 도리를 다하지도 못하고 죽는데, 사람도리나 잘 할 궁리나 해야지 쓸데없이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죽음과 귀신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습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불가지론’이라고 합니다.
상식 위에 과학이 있고 과학 위에 철학이 있고 철학 위에 종교가 있죠. 위에 있다는 표현은 우월하다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상식이 제일 중요한데 그것으로 해결 안 되는 것이 있으니까 과학으로 해결한다는 의미죠. 그래서 과학으로 해결 안 되는 것은 철학으로, 철학으로 해결 안 되는 것은 바로 종교로 해결한다는 말입니다.
철학은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학문입니다. 그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논리적으로 자기주장을 펼치는 것이죠. 그러나 종교는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물론 서양 중세 때 신학자들이 곧 철학자이긴 했습니다만 이것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굉장히 복잡한 문제니까요). 한 마디로 종교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믿는 것이죠. ‘왜 하나님이어야 하는가? 왜 예수님이어야만 하는가?’ ‘왜 이런 깨달음이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인가?’ 이런 근원적 질문에 대해서는 종교가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왜냐고요? 종교는 그냥 믿는 거니까요. 다만 불교는 이런 근원적 물음에서 수많은 종파가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여러 사람과 여러 종교와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게 생각해야죠. 요즘은 내 자식만 귀하다고 생각하니까 각종 문제가 생기는 것이잖아요. 종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내 종교가 귀하면 남의 종교도 귀하게 생각해야죠. 종교에 관한한 ‘왜’라는 근원적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주관적으로 각자가 가지고 있을 뿐 정답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불가지론자가 된 것입니다.
공자 뿐 아니라 위대한 철학자들 대부분이 불가지론자입니다.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을 언급하지 말자는, 그래서 남의 생각을 제발 인정하자는 것이지요. 교회에서만, 법당에서만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말하고 거기를 나오면 우리 모두 불가지론자가 됩시다. 종교뿐만 아니라 귀신이나 심령술, 각종 사주팔자 등 우리 실생활에 별로 도움 안 되는 것에 너무 힘쓰지 말자고요. 공자처럼 인간 사회나 인간관계에 집중하여 예의 문제, 또는 도덕이나 정의 문제에 더 신경 쓰는 게 낫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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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펭귄
적도에 펭귄이 산다는 사실을 아는가 남극에 있어야 할 펭귄이 적도에 있다는 것은 허구이거나 코미디다 평생을 펭귄이 남극의 신사라고 배웠거늘 이제 와서 적도의 벌거숭이가 될 수는 없다 펭귄이 적도에 산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터 이제 와서 우리 지식의 성을 무너뜨리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종대왕이 당뇨 뚱보였다는 사실
뉴턴이 논문조작의 대가였다는 사실
이퇴계가 밤일을 꽤나 잘 하였다는 사실
에디슨이 피도 눈물도 없는 구두쇠 욕심쟁이였다는 사실
달이 태양보다 오래된 행성이라는 사실
달에 아무 생명체가 없다는 사실
그럼에도 음력 대보름날 달을 보며 기도한다는 사실
젠틀한 내가 섹시한 여자를 강간하고 싶다는 사실
정숙한 여자가 몸짱 남자에게 강간당하고 싶다는 사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가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는 과학이 실은 꾸며진 날조라는 것을 아는가 산다는 것이 가식이요 거짓이라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자의 마음에서 생기는 또 다른 진실 허구와 사실이 뒤엉켜 적절한 혼돈 속에서 질서를 지켜나가고 있는 세상 이 질서를 깨어서는 안 된다 내가 보지 못하였고 네가 보지 않았고 우리 모두가 보지 말아야 하므로 펭귄은 적도에 살지 않는다 모두가 혼란스럽고 피곤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펭귄아 너는 계속 남극에서만 살아다오
적도 펭귄만 외롭게 꿈속을 헤매고 있다
◆ 학문을 좋아하는 자세 -노여움을 타인에게 옮기지 않고 과실을 두 번 하 지 않는 것(不遷怒, 不二過)
- 제 육 옹야(第 六 雍也) 2장 -
哀公問(애공문): 「弟子孰爲好學?(제자숙위호학)」
孔子對曰(공자대왈):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유안회자호학, 불천노, 불이과. 불행단명사의! 금야즉무,
미문호학자야.)」
애공이 묻기를, “제자중에 누가 학문을 좋아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길, “안회라는 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없으니 아직 학문을 좋아한다는 자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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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제자 중에 안회라는 자를 공자가 제일 아끼고 좋아했는데 불행히 안회는 일찍 죽습니다. 안회가 죽을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린다’고까지 하면서 통탄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안회라는 사람은 정말 사람 됨됨이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애공이라는 자가 학문을 좋아하는 것(호학)에 대해 물었는데, 조금은 생뚱맞게(?) 공자는 화를 남에게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반복하지 않는 것을 호학이라고 하여, 인격수양이 호학임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구를 보면서 제 스스로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 ‘나는 화를 남에게 옮기지 않았는지,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는지…’말이죠. 절대 아닙니다. 화를 남에게 옮긴 적도 많고요 잘못을 반복한 적도 수없이 많습니다. 공자의 말대로라면 저는 진정한 학자가 아닌 셈이죠. 무릇 학자란 공부만 잘하고 많이 안다고 좋은 학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 범위를 넓히면 인간이란 누구나 학문을 좋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학위가 있는 학자가 아니라 학문을 좋아해야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죠. 바로 학문을 좋아함은 인격수양을 뜻하니까요. 진정한 인격수양이 된 인간이란, ‘화를 남에게 옮기지 말고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함!’ …이 문장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이와 비슷한 말이 ‘위령공’편에도 나옵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
◆ 어진이의 자세 -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음료(일단사 일표음)
- 제 육 옹야(第 六 雍也) 9장 -
子曰(자왈):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현재, 회야. 일단사, 일표음, 재루항. 인불감기우, 회야불개기락. 현재, 회야!)」
공자가 말하였다. “어질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시골에 있다 보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변치)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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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이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겁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땐 한문시험에도 자주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어릴 땐 몰랐는데 저도 나이가 드니, 아니 현실이 그러하니 그 뜻이 몸에 알알이 박히네요.(하하!)
요즘 같은 시대엔 정말 박물관에나 갈 말이겠지요. 강남 소재 수 백 평이 되는 아파트에 살며 고급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삶을 누구나 꿈꾸는 게 현실인데 말이죠. 그런데 규모만 다르지 옛날에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시골에 사는 삶을 그 때 사람들도 견디지 못했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안회만이 그 불편한 삶을 즐겼다고 하는데 현재의 사람들은 비웃겠지요. 무능력자라고. 아니면 이상하리만큼 특출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말입니다, ‘일단사 일표음 재누항’이라는 이 표현이 각박한 우리 현실에서 왜 이리 따뜻하게 들릴까요? 제가 못나서 그렇다고요? 그렇다면 할 말 없습니다만. 이 표현이 단지 가난한 삶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친자연적이고 생태적이고, 무엇보다 돌아가야 할 고향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요? 마음의 고향! 그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마도 사람의 공통적인 마음일 겁니다. 약육강식의 치열한 삶, 호화로운 겉치레의 삶에서 벗어나 포근하고 따뜻한 자연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이 표현이 담고 있는 것 같아 저는 정말 좋습니다.
◆ 조화로운 삶이란!
- 제 육 옹야(第 六 雍也) 16장 -
子曰(자왈):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 문질빈빈, 연후군자.)」
공자가 말하였다. “본바탕(質-질)이 문체(文-아름다운 외관)보다 두드러지면 속되고, 문체가 바탕보다 두드러지면 아는 것만 많고 성실성이 없는 사관(겉치레) 같다. 문체와 바탕이 잘 어울린 뒤에야 군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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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겉모습이 화려하기만 하면 사람의 정신이 황폐해져 하늘이 부여한 천도를 온전히 보존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文(문)은 문화적인 것, 또는 외형적인 것으로 예술이라 할 수 있고 質(질)은 타고난 그대로의 본질로서 정신적인 것, 또는 내적인 것으로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공자는 인간의 정신적인 면과 형식적인 면이 잘 어울림으로써 보다 인격이 완성되고 문화인으로서의 풍모가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술과 삶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이상적이라는 말입니다.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공자도 군자는 문(文), 즉 외식보다 질(質), 즉 성실을 높이 쳤습니다. 하지만 문과 질이 잘 조화되어야만 비로소 훌륭하고 교양 있는 이상적인 사람이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조화롭게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정신적인 내실을 다지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어쨌든 <논어>에서 공자는 정신적인 면과 형식적인 면의 조화, 다른 말로 삶과 예술의 일치를 통한 근원적 이상향을 추구하여 궁극적으로 하늘의 도를 실천하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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質(질)은 질박함인데, 저도 나이가 드니 화려한 외형보다는 질박함에서 빚어지는 어떤 예술적 감흥에 더 마음이 가더라고요. 물론 때론 화려한 색채나 외형에 더 감탄할 때도 있지만, 투박함이나 질박함에서 오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에 조금씩 눈이 가고 마음이 가는 건 단지 나이를 먹어서라기보다 이제 예술을 조금이나마 느낄 준비가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아름다움과 질박함의 조화, 즉 문화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의 조화가 제일 좋은 것이겠죠. 그런데 요즘은 화려한 문화적인 것에만 너무 신경 쓰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시나 국가는 업적의 욕심에 눈이 멀어 화려한 조형에만 신경 쓰며 국민 혈세를 낭비할 것이 아니라 내실에, 기본적인 것에, 정신적인 것에 더 신경 써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 인간관계의 진리 - 존경하되 너무 가까이 하지 않음
- 제 육 옹야(第 六 雍也) 21장 -
樊遲問知 子曰(번지문지 자왈):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무민지의, 경귀신이원지, 가위지의.)」
問仁(문인) 曰(왈): 「仁者先難而後獲, 可謂仁矣.
(인자선난이후획, 가위인의.)」
번지가 지혜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사람이 지켜야 할 의를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 하면 지혜롭다 할 수 있느니라.”하였다. 인을 물으니, “인이란 어려운 것을 먼저 하고 그에 대한 보답을 얻는 것은 뒤로 미루는 것이니, 그래야 인이라 할 수 있느니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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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말에서 눈여겨 볼만한 말은 ‘仁(인)’보다는 ‘敬(경)’자와 ‘遠(원)’자가 아닌가 합니다. 경은 공경한다, 존경한다는 말이고 원은 멀리한다는 뜻인데, 존경하면서 멀리하라는 말이니 이 얼마나 사람관계에 대한 통찰이 뛰어납니까. 잠깐, 위에서 귀신을 공경하고 멀리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귀신은 우리가 말하는 귀신이 아니라 형이상적인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알 수 없는 것에 마음 뺏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조금 확대하여 사람관계가 다 위에서처럼 귀신을 대하듯 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너무 가까이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는 그 적당한 거리유지를 잘 해야 관계가 오래가지요. 말이 쉽지 적당한 거리유지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힘들어도 해야 합니다. 다 겪어보셨겠지만 어떤 관계든(그것이 설령 부모자식관계라 해도, 연인사이라도) 가깝다고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요구하면 마음이 상하고 다투게 되죠. 그렇다고 바로 관계를 끊기도 그렇잖아요. 모든 인간관계가 이처럼 적당한 거리유지를 못해서 문제가 발생(비리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하고 다툼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적당한 거리유지만이 살길입니다. 존경하되 너무 가까이 하지 말자고요.
◆ 진정한 스승이란 - 博文約禮(박문약례)
- 제 구 자한(第 九 子罕) 10장 -
顔淵喟然歎曰(안연위연탄왈):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앙지미고, 찬지미견, 첨지재전, 홀언재후.)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부자순순연선유인, 박아이문, 약아이례. 욕파불능, 기갈오재, 여유소립탁이.
雖欲從之, 末由也已.
수욕종지, 말유야이.)」
안연이 탄식하며 말했다. “선생님 덕은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게 보이고, 뚫을수록 더욱 굳으며, 바라보면 앞에 있는 것 같다가도 어느덧 뒤에 있다.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계발시켜 주시어 나를 학문으로 넓히시고 예절로 단속하신다. 학문을 그만 배우려 해도 그만둘 수 없게 하시고, 내 재능을 다하여 좇아 배우나 우뚝 서 있는 듯하며, 아무리 따라가려고 하나 따라갈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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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위에 나오는 공자의 모습을 우리가 어찌 본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논어>에 博文約禮(박문약례)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와서 언급합니다. 이전에는 이 글자를 따서 출판사이름으로 쓰기도 했고(이 출판사가 아직 있는지 모르겠네요), 글자 좀 쓴다고 하는 사람의 집 거실에 가면 큰 액자에 걸려 있는 단골 사자성어이기도 했습니다.
박아이문(博我以文)은 학문이나 문화로서 나를 열어 넓히는 것이고, 約我以禮(약아이례)는 예절로서 나의 행동을(나를 붙잡아) 규모 있게 단속하는 것(요약하는 것)입니다. 이런 스승이 있으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마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것을 정자라는 사람(송나라 사람)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차근차근 잘 이끄시어 먼저 나를 文(문)으로써 박학하게 하시어, 나로 하여금 고금의 일을 알고 일의 변화를 통달하게 해주셨다. 그런 뒤에 나의 행동을 예로서 요약하게 하시어, 나로 하여금 배운 것을 존중하게 하고 아는 것을 행하게 하시니, 이는 마치 길을 가는 자가 집에 다다르고, 밥 먹는 자가 배부름을 구하는 것과 같았다.
우리의 교육환경이 바뀌어 학문이나 문화를 가르쳐 학생들의 지식을 넓혀주고, 예절로서 학생들의 행동을 바로 잡아 줄 수 있는 날, 그런 날이 반드시 왔으면 좋겠습니다.
◆ 세상 모든 것은 변화한다 - 天上嘆(천상탄)
- 제 구 자한(第 九 子罕) 16장 -
子 在川曰(자 재천왈):「逝者, 如斯夫, 不舍晝夜.(서자, 여사부, 불사주야.)」
공자가 냇가에서 말하였다. “지나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없이 그치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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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세상의 흐름과 변화에 대한 통찰을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언급하였습니다. 위 공자의 말은 유가의 시간에 대한 경구와도 같은 말인데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단순한 말이지만 세상 만물은 고정되지 않고 변한다는 의미로, 흐름과 변화가 시간개념의 핵심이라는 시간에 대한 공자의 인식입니다. 천체의 변화에서 시간의 흐름을 발견하였죠. 곧 하늘의 운행은 쉼이 없어서 해가 지면 달이 뜨고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며, 물은 흘러 끊임이 없어 밤낮으로 운행하여 일찍이 그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본질, 시간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죠.
공자가 냇가에서 탄식하며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세상 만물은 그침 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것이 그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운행하며 생성 변화하는데, 쉼 없이 흐르는 시간이 바로 근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쉼 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것이 근본이라면 나도 변할 것이며 나의 상황도 변할 것입니다. 단 조건이 있죠. 쉼 없이 흘러야 한다는 겁니다. 즉 끊임없이 노력하면 결국 모든 것은 변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니까요. 나의 처지, 나의 상황도 내가 노력만하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여러분도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쉼 없이 흘러 보내는 건 어떨지요.
◆ 사람의 진정한 모습은 언제 나타나는가 - 세한연후(歲寒然後)
- 제 구 자한(第 九 子罕) 27장 -
子曰(자왈):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디 시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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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유명한 말이죠. 추사의 세한도도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충신이 나오는 법이고, 집이 가난할 때 효자가 나오는 법이요, 사람이 어려울 때 그 사람의 진정한 친구가 가려지는 법이지요. 개인적으로도 힘든 일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본성, 진짜 사람 됨됨이가 나타나는 법이라고 합니다.
너무 사람을 급하게 판단하지 말자고요. 나에게 잘 대해준다고 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나에게 안 좋은 사람이라고 그 사람을 나쁘게 판단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없더라고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을 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지긋이 기다리며 그 본성(본질)을 파악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리라 봅니다. 단 자신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죠.
◆ 유학은 친자연적 인간중심주의다
- 제 십일 선진(第 十一 先進) 25장 -
~ (점)曰: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모춘자, 춘복기성. 관자오육인, 동자육칠인, 욕호기, 풍호무우, 영이귀.)」
夫子(부자)- 喟然歎曰(위연탄왈); 「吾與點也!(오여점야.)」
증석(점)이 말하길, “늦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을 쓴 어른 5~6명과 동자 6~7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하자
공자가 아! 하고 감탄하면서 “나는 점과 함께 하노라(동의하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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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와 증석(이름이 점)과 염유와 공서화를 앉히고 공자가 ‘세상이 너희들을 알아준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 묻습니다. 자로는 용맹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백성들을 단련시키겠다고 했고, 염유는 예악으로 백성을 풍족하게 다스리겠다고 했고, 공서화는 예복과 예관을 쓰고 보좌역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증석만이 다소 엉뚱한(?) 말을 합니다. 늦봄에 봄옷으로 갈아입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라는 언덕에서 바람 쐬고 글이나 읊으면서 돌아오는 것이 자기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공자가 유일하게 증석의 말에 동의합니다.
유학이 노장사상이나 불교에 비하면 인간중심적이긴 하나 서양의 인간중심사상과는 완전 다릅니다. 여기에서 보듯 유학에서는 서양처럼 인간의 우월성을 기본으로 자연을 파괴한다든지 이용가치로 절대 보지 않습니다. 정말 친자연적이고 생태적인 사상이 바로 유학이죠. 위에서 제가 언급한 대목만 봐도 유학의 자연관을 단적으로 알 수 있죠.
‘浴乎沂(욕호기), 風乎舞雩(풍호무우), 詠而歸(영이귀)’라는 글귀 하나 알아두면 굉장히 멋스러운 사람으로 인정(?) 받을 겁니다. 굉장히 낭만적이고 유유자적하지 않나요? 인생의 멋이 이런 것이 아닐 런지요… 자신과 뜻이 맞는 친구 몇 명과 함께 자연에서 노닐며 자연과 더불어 즐기며 그 친구들과 돌아오는 일이야말로 인생을 아는 사람의 진정한 멋이 아닐까요.
◆ 총명함이란
- 제 십이 안연(第 十二 顔淵) 6장 -
子張問明(자장문명). 子曰(자왈): 「浸潤之譖,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침윤지참, 부수지소, 불행언. 가위명야이의.
浸潤之譖膚受之愬不行焉, 可謂遠也已矣.
침윤지참부수지소불행언, 가위원야이의.)」
자장이 총명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말하였다. “물이 스며드는 것 같은 참언과 살갗에 느껴질 듯한 하소연을 물리친다면 가히 총명하다고 할 수 있느니라. 이 물이 서서히 젖어드는 참언과 살갗에 닿는 하소연을 물리친다면 가히 총명이 멀리까지 내다본다고도 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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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윤지참(浸潤之譖)은 남을 헐뜯는 말을 물이 스며드는 것같이 참언을 하면 듣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점점 그 말을 믿게 되는 것이고, 膚受之愬(부수지소)는 자기의 원통함을 호소하는데 피부에 스며드는 것 같이 이해관계가 몸에 절박함을 말하면 듣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동정심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수단으로 사람을 속이려 하는 것을 잘 간파하여 행하지 못하게 하면 총명하다고 할 수 있으며, 한 걸음 나아가 총명이 먼 경지까지 이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관계에서, 또는 사회생활에서 이 말만 잘 지켜도 온전히 자기 자리를, 자기 양심을 잘 지킬 수 있으리라 봅니다. 특히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총명함을 생명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총명함을 잃어 자리도 잃고 그 동안 쌓은 명성도 잃고 감옥까지 가는 정치인이나 고위직이 얼마나 많습니까. 꼭 높은 자리의 사람이 아니라하더라도 이것을 지키지 못하고 사사로운 인정에 휩쓸리면 그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자신도 패가망신하는 경우 참 많지 않습니까.
◆ 충효가 아니라 효제충(孝悌忠)!
- 제 십삼 자로(第 十三 子路) 18장 -
葉公語孔子曰(솝공어공자왈):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오당유직궁자, 기부양양, 이자증지)」
孔子曰(공자왈):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오당지직자이어시. 부자위은, 자위부은, 직재기중의.)」
섭공이 공자께 말하였다. “우리들 중에 정직한 사람이 있으니, 그 아버지가 남의 염소를 훔친 것을 아들이 증언했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우리 무리의 정직한 자는 이와 다르다. 아버지가 자식을 위하여 숨겨주고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숨겨주니, 정직함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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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도 우리 형제들을 모아놓고 위와 비슷한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요, 아버지께서 <논어>를 읽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가 유교의 영향아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당연한 현상이 아니었나 싶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고등학교를 나올 때까지 학교에서는 충효라고 항상 배웠거든요. 등교할 때 학교 정문에 충효라고 쓴 글이 팻말로 걸려있었는데 그 글자를 보면서 우리는 항상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먼저라고 배웠습니다. 김유신 일화며 이순신 일화를 들으며 언제 어디서나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배웠단 말입니다. 그것이 진리라고 착각하며.
그런데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논어>를 직접 읽으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죠. 실은 고 1때 참교육을 하셨던 전교조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살짝 들었습니다만, 어쨌든 대학에서 제가 직접 <논어>를 읽으면서 공자와 맹자가 충효가 아니라 효충을 강조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충효나 효충이나 그것이 그거 아니냐, 하면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정확히 알아야죠. 제 기억으로 김대중 정부 때 없어진 것으로 아는데, ‘불고지죄’라는 것이 얼마 전까지 있었습니다(친족조항만 삭제되었고 이 법은 지금도 존재함). 대학생 아들이나 딸이 데모하여 정부로부터 쫓겨 다니면 가족이, 특히 부모가 그 자식을 고발하도록 하였죠. 고발 안 하면 바로 ‘불고지죄’로 그 부모를 처벌하였습니다. 참, 반유교적인 작태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쁜 짓을 하면 부모라고, 자식이라도 고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위 <논어>에서 공자의 말처럼 숨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공자는 가족은 어떤 경우에도 숨겨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정직이라는 것이죠. <맹자>에서 맹자도 마찬가지로 말합니다. 천자인 순은 천자의 자리를 버리고라도 불법을 한 아버지를 업고 도망해야한다고 했죠. 이것이 유가의 정직인데, 그 근간은 바로 효입니다.
효(孝)가 형제(사회)로 퍼져서 제(悌)가 되는 것이고요 그것이 나라로 확대되어 충(忠)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유가의 정의는 충효가 아니라 효(제)충입니다. 박정희 정권이 부정직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유가의 말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뒤바꿔 놓은 겁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충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충(忠)은 한자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흐트러짐 없이 바로 잡는 것, 정중앙에 놓는 것으로 정직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실, 나라에 본분 다하기(흔히 말해 충성)라는 의미로 확대되어 공자 당시도 사용되긴 했습니다만.
아무튼 유가에서 말하는 정직의 의미를 한 번 더 되새겨 봐야 하겠습니다.
◆ 의리(義理)의 진짜 의미
- 제 십사 헌문(第 十四 憲問) 13장 -
子曰(자왈): 「今之成人者何必然, 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금지성인자하필연, 견리사의, 견위수명, 구요불망평생지언,
亦可以爲成人矣.
역가이위성인의.)」
공자가 말하였다. “오늘날의 성인이 어찌 반드시 그러하겠느냐. 이득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고, 위태함을 보면 생명을 바칠 줄 알며, 오래 전의 약속에 대해 평생 자기 말을 잊지 않고 실행하면 또한 성인이 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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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언급해서 더욱 유명해진 말이 바로 見利思義(견리사의)죠. 利(이)를 보면 義(의)를 생각한다는 말인데요, 요즘에는 통하지 않는 말이라고요? 이익을 보면 바로 취해야한다고 말하고 싶으십니까? (하하~) 그럴 수도 있겠죠. 현실은 현실이니까요. 그러나 무턱대고 눈에 보이는 이익을 덜컥 취했다간 큰 코 다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엔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요. 정당한 땀의 대가가 아니면 일단 취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고요, 만약에 취하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취하는 것이 후사를 위해서도 좋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추징문제로 시끄러운데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욕하면서도 전 씨의 주위 사람들은 의리가 있다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의리가 뭐죠? 옳은 이치입니다. 전두환 씨나 그 주위 사람들의 행태가 옳은 이치입니까? 그것이 옳은 이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단언컨대 악인일 겁니다. 전두환 씨를 보호해주려고 하는 사람(가령, 장세동 같은 사람들)들의 행태는 결코 옳은 이치가 아니지 않습니까? 따라서 의리가 아닙니다.
오래 전의 약속에 대해 평생 자기 말을 잊지 않고 실행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공자의 말도 굉장히 되새겨 봐야할 명언이라고 생각합니다.
◆ 자기를 위한 학문을 해야
- 제 십사 헌문(第 十四 憲問) 25장 -
子曰(자왈):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고지학자위기, 금지학자위인)」
공자가 말하였다.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하여(자기수양을 위하여) 학문을 하였으나, 지금의 학자는 남을 위하여(남에게 알리기 위하여) 학문을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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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도 자기 PR시대인 현재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요? 저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당시 공자도 위정자에게 자신의 이론을 알리기 위해 천하를 떠돌아다녔죠. 유가의 현실적 목적은 바로 입신양명이니까요. 아무튼 유가가 자기를 알리는 것을 나쁘게 본 것은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은 자기를 알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학문의 근본을 말한 겁니다. 학문은 지식 취득과 자기 수양을 근본으로 한다는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문화적 소양을 갖추는 것이죠. 이것이 잘 되면 유명세는 자연히 따라온다는 겁니다. 만약 문화적 소양을 잘 갖추었는데도 유명해지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거구요. 그 원인을 일단 자기한테 따져봐야겠죠.
분명한 것은 ‘유명하고 안 하고’가 학문의 근본이 아니라는 겁니다. 요즘 보면 어떡하든 유명세만 좇는 학자가 있는데요, 얼마나 보기 흉합니까. 학자가 유명세만 쫓다가는 머리 텅텅 비는 거 한 순간이고요, 금방 그 신기루 같은 인기 사라질 겁니다. 그러면 다 놓치게 되죠. 명성도, 학자적 양심도, 학문도. 돈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열심히 경제 활동을 하다 보면 돈이 따라오는 것이지, 즉 돈이 자신을 따라오도록 해야지 돈독에 올라 돈만 좇다간 사람 황폐해지기 십상일겁니다. 돈도 못 벌고요. 벌어도 금방 사라질 겁니다.
◆ 지혜로운 사람의 인관관계
- 제 십오 위령공(第 十五 衛靈公) 7장 -
子曰(자왈): 「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知者不失人,
(가여언이불여지언, 실인, 불가여언이여지언, 실언. 지자불실인,
亦不失言.
역불실언.)」
공자가 말하였다. “가히 더불어 말할 만한데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가히 더불어 말할 만하지 못한데 말을 하면 말을 잃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을 잃지 않고, 또한 말도 잃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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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면서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바로 인간관계였는데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자는 말하길, ‘저 사람은 근본이 나쁘다’, 또는 ‘이 사람은 근본 본성이 좋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 안에 무수히 많은 면이 있어서 어떤 사람과 어떠한 상황에 놓였을 때 자신의 어떤 면이 드러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즉 그럴 때 그 사람과 내가 잘 맞는지 아닌지가 결정되는 것이지 어떤 사람이 근본적으로 좋다, 나쁘다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사람이 그러할 진데, 말은 더욱 중요하겠죠. 할 말, 안 할 말 가리는 것이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어떤 사람과 만나서 어떤 상황에서는 이런 말을 해야 하지만, 또는 하지 말아야 하는 때가 있죠. 상황을 잘 판단하셔서 대처해야 할 겁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나를 살리는 경우도 있고 나를 죽이는 경우도 있으니까요(영화 ‘올드보이’도 그런 경우로 볼 수 있습니다). 공자의 말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 법입니다.
◆ 유가의 인식론
- 제 십오 위령공(第 十五 衛靈公) 28장 -
子曰(자왈): 「人能弘道, 非道弘人.(인능홍도, 비도홍인)」
공자가 말하였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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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유가와 불교의 근본적 차이를 알 수 있는데요, 유가는 사람중심입니다. 특히 공맹의 시절에는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면은 별로 없고 대부분 수양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아무튼 사람 중심이다 보니 사람이 주체가 되는 겁니다. 결코 도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사람중심이 아니죠. 불교의 인식론은 심히 방대해 여기서 논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가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서 ‘인류가 최초로 막대기를 휘저었을 때 막대기도 인간을 휘저었다.’고 했을 겁니다. 이 말이 바로 불교의 인식론인데 굉장히 난해하죠. 위의 말을 불교식으로 하자면 ‘도가 사람을 넓힌 것’일 수도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도 이참에 한 번 사고의 폭을 넓혀보시죠.
◆ 유가에서 말하는 공부 방법
- 제 십구 자장(第 十九 子張) 6장 -
子夏曰(자하왈):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박학이독지, 절문이근사, 인재기중의.)」
자하가 말하였다. “널리 배우되 뜻을 독실하게 하고, 간절히 묻되 가까운 것부터 생각해 나간다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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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장의 제목을 제 나름대로 공부의 방법이라고 붙여봤는데요, 저도 그렇지만 한참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결국 같은 말이겠지만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저 없이, 쉼 없이(쉬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포기하지 말라는 뜻임) 꾸준히 해나가면 언젠간 빛이 보일 것이라고요. 이 말에 만족 못하는 학생들은 아래 자하의 말을 곱씹어 보기 바랍니다.
“인(仁)에 뜻을 둔 사람(지금으로 치자면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널리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널리 배운 것은 확고하게 마음에 새겨두어야만 한다. 또한 배웠어도 깨달음이 없으면 안 된다. 마음을 고원한 곳에만 두고 좇아갈 것이 아니라, 열심히 묻고 충분히 이해해서 가까운 실제문제부터 생각한다. 이와 같이 博學(박학)ㆍ篤志(독지)ㆍ切問(절문)ㆍ近思(근사)의 네 가지에 관심을 두고 노력한다면, 이것이 곧 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인을 체득할 수 있는 요소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인(仁)이 공부라 한다면, 널리 배우고 열심히 묻고 충분히 이해하고, 가까운 문제부터 풀어나가면 언젠간 목표로 하는 것을 이루게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