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노자의 가르침을 담은 책입니다. 한 마디로 노자의 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입니다.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억지로 무엇을 하려하면 항상 탈이 생기게 마련이죠. 누군가를 억압하고 무엇을 강제하게 되니까요. 그러면 결국 자신도 불행하게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연계되어 있으니까요. 현재의 기상재해나 기상이변으로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는 것은 결국 인간이 억지로 무엇을 하려고 한 탓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노자사상은 무려 2천 5백년을 앞선 셈이죠. 아무튼 노자의 사상은 현재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재발견되는 사상입니다.
◆ 이름 할 수 없는 그 그윽함이여!
- 도덕경 1장 -
道可道非常道. 名加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고상무욕이관기묘.
常有欲以觀其微.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상유욕이관기교. 차양자, 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불변의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어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불변의 이름이 아니다. 이름 없음은 천지의 시작이요, 이름 있음은 만물의 어미이다. 고로 늘 욕심 없으면 그 오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가장자리만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양자는 근본에서 나왔으나 이름만 다르다. 이 양자를 일러 현이라 한다. 현하고 현하니! 모든 묘함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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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의 구절입니다. 도라 하면 벌써 도가 아니고,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벌써 이름이 아니라는 이 발상, 정말 감탄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라 하여 더 근원적임을 노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반전을 시도합니다. 이름 없음과 이름 있음이 실은 같은 것이라네요. 이것을 현(玄)이라고 하는데, 모든 묘한 것의 문이라고 하니 실로 그 뜻을 헤아리기 난감합니다.
전 어릴 때 천자문의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이라는 글귀에서 땅이 누렇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왜 하늘이 검다하고 했을까,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밤에 하늘을 봐서 그런 말을 한 건가? 하고 생각했죠. 그땐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문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양철학을 하면서 그 의문이 조금은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낮의 하늘이 파란 것은 산란 현상 때문이고 실은 하늘, 즉 우주는 검죠. 그런데 이 ‘검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색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옥편을 보면, 검을 ‘현(玄)’은 ‘그윽하다, 오묘하다, 심오하다, 깊다, 고요하다, 아득하다’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바로 검은 것이 천지의, 우주의 근원이라는 것이죠. 마치 태초의 우주가 카오스, 즉 검은 혼돈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인생의, 세상의 본질에 단 한 순간도 다가가지 못한 채 그 허상만을 좇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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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꽃의 향기가 떨어졌다
떨어진 자리에 작은 웅덩이가 생기고
꽃은 웅덩이 속으로 사라졌다
꽃은 어디로 갔을까?
꽃이 남기고 간 것, 그것은
향기도, 웅덩이도, 꽃 그 자신도
아닌 사라짐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 꽃이 돌아왔다
나의 상념 속으로
스스로를 갉아먹는 나의 상념은
무연히 바람을 일으키고…
꽃이 흔들린다, 제 빛깔과 향기 없이.
어디가 시작인가,
그토록 꽃이 되고 싶어 불렀던 이름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실체였다.
부를수록 사라지는 존재의 꽃,
꽃을 보며 커지는 내 마음의 허공,
허공의 깊이에서 꽃은 바로 無(무)였다.
꽃이 아님이
꽃을 만들고, 향기를 만들고, 생각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와서 눈꽃이 되었다
웅덩이에 호흡이 생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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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축구 같은 놈!
- 도덕경 5장 -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槖籥乎. 虛而不屈,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허이불급,
動而流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동이유출. 다언삭궁, 불여수중.)
천지가 불인하므로 만물로 추구(짚으로 만든 강아지)를 삼았다. 성인도 불인하므로 백성으로 추구를 삼았다. 천지의 사이는 풀무와 같은가 보다. 비었으나 다하지 않고, 움직이면 더욱 더 나온다. 그래서 인간도 비어 있지 않고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진다. 그래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가운데의 비어 있음(中)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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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순진하고 멍청한 사람을 ‘바보축구’라고 부르는데요, 사실 저도 그런 사람이 되지는 못하지만 노자는 이 말처럼 바보축구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축구는 개 같은 가축을 뜻하는데, 노자가 위에서 말한 ‘풀로 만든 강아지’와 의미가 비슷하지 않을까요? 말을 많이 하면 궁해지는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조금은 비워두고 바보처럼, 풀로 만든 강아지처럼 살아보면 어떨까요… 이런 삶을 살 수 없는 제 자신이 안타깝군요.
◆ 세상의 근원은 현묘한 암컷! - 노자사상은 여성적이다
- 도덕경 6장 -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곡신불사, 시위현빈.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면면약존, 용지불근.)
빈 골짜기의 신령한 기는 죽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현묘한 암컷(玄牝)이라 부른다. 현묘한 암컷의 세계는 천지의 뿌리라 부른다. 이 천지의 뿌리는 면면하게 이어져서 존재하는 것 같고, 그것을 사용해도 지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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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도덕경>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제가 만약 결혼한다면 딸을 낳고 싶은데요, 그러면 그 딸을 ‘현빈’이라고 이름 짓고 싶습니다.(하하!) 빈 골짜기의 신령한 기는 바로 여성을 이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여성의 생식기를 말합니다. 여성의 ‘자궁’은 문학에서 많이 다뤄지죠. 바로 생명의 근원이니까요. 자궁은 영혼의 안식처이자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기 힘들 때 바로 엄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노자는 이것을 천지의 뿌리라고 하여 면면히 이어져 아무리 사용해도 지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곧 ‘현빈’입니다.
‘검은 암컷, 오묘하고 그윽한 암컷의 세계!’ 이 세계가 인간말종적인 일이 많이 벌어지는 혼탁한 지금의 사회를 바로 잡아줄 대안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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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암소를 타고
저녁 어스름을 먹으며 나타나는 암소는
검다
세상이 온통 검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검어진 세상에는 구멍이 없어
암소는 숨을 쉴 수가 없다,
날카롭게 빛났던 한낮의 밝음이
자신의 몸을 베어 암소에게 내어주면
비로소 세상은 고요한 검은 허공을 만들고
암소는 작고 긴 숨으로 세상을 비운다.
허여히 검어진 세상에 검은 암소를 타고
남은 세상 내가 쉴 곳을 찾아보지만
내가 왔던 그 곳은 이미 가득 차 있고
내가 머물 이 곳엔 마음 하나 흘러가지 못하니
가난하고 또 가난해져 갈 곳 조차 잃어버리면
오직 나는 나로 인한 나를 허공에 태워버릴 것이다,
그러자 검은 암소의 울음소리가 길을 형성하고
막혔던 생의 자궁에 맑은 물소리 흘러가니
다하지 못한 내 삶의 시간은
흘러 비워서 갈 곳을 지워버린다.
검은 암소를 타고
길고 오래된 천지 속으로 들어간다
아침이 되어도 세상은
검다, 그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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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최상!
- 도덕경 8장, 78장 -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 8장
(상선약수. 수선리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
天下柔弱莫於水, 而攻堅强者, 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弱之勝强, 柔之勝剛,
(천하유약막어수, 이공견강자, 막지능승. 이기무이역지. 약지승강, 유지승강,
天下莫不知, 莫能行.
천하막부지, 막능행.) - 78장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매우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물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거의 도에 가깝다.
세상에 물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게 없다. 그러면서도 굳세고 강한 것을 치는 데는 물보다 더 나은 것도 없다. 물을 대신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억센 것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기는 것을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실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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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로 세상은 남자가 지배하지만, 남자는 여자가 지배한다고 하는데, 설마 이 말이 위 <도덕경>의 구절을 이해하고 한 말은 아닐 테지요. 흔히 바람처럼, 물처럼 살라고 하는데 참 쉽지가 않습니다. 누구보다 앞서야 하고 누구를 이기고 짓밟아야 내가 살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그러지 못하면 저처럼 무능한 놈이라고 속으로 욕하잖아요. 그나마 예의 있는 사람은 제 앞에서는 제가 능력 있다고, 당당해서 보기 좋다고 하면서 막상 자기 딸을 나에게 시집보내기엔, 여성이 나한테 시집와야 한다면 꺼리게 되거든요. 언제 잘릴지 모르는, 돈도 못 버는 남자라고 말입니다. 참, 세상이 남 말하기는 쉬운데요… 현실에선 물처럼 되기정말 어렵습니다.
낮은 곳에 있는 물은 부드럽고 약하므로 동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되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나게 됩니다. 홍수를 보면 알 수 있듯 단단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물만한 것도 없죠. 이것을 보면 부드럽고 약한 물이 최고인 것 같은데, 현실 세상은 부드러우면 안 되고 강하라고만 하네요. 자본주의에서 제일 강한 것은 당연히 돈이겠죠. 남을 이겨 많이 벌고 높은 곳에 처해야 인간 대접 받고 살 수 있는 세상 아닙니까. 물론 제가 낮은 곳에 처하고 싶어서, 약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약하기만 한 제가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세상이네요. 이왕 약하니, 낮은 곳에 처해 있으니 물처럼 살아나 볼까요… (^^)
◆ 비워야 산다 - 비움의 미학
- 도덕경 11장 -
三十幅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挻埴以爲器, 堂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삼십폭공일곡, 당기무, 유거지용. 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착호유이위실,
堂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당기무, 유실지용. 고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
삼십 개의 수레바퀴살들이 다함께 하나의 가운데 바퀴통에 박히니, 그 바퀴통의 無에 어울려 수레의 쓰임이 있게 된다. 진흙은 빗어서 그릇을 만듦에, 그 그릇의 빈 데인 무에 어울려 그릇의 쓰임이 있게 된다. 문과 창을 뚫어서 방을 만듦에, 그 빈 곳인 무에 어울려 방의 쓰임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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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무는 유의 원인이 아닙니다. 무가 유를 생기하게 한다는 사고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이고도 존재론적인 표현인데, 무가 유를 창조한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자기 안에 유가 이미 이재적인이 존재하고 있는 근거라는 것입니다. 무가 유를 생산한 원인이 아니라 무의 바탕 안에 이미 유의 무늬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임을 말합니다. 즉 허공의 무가 그릇과 바퀴살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는 근거가 된그릇과 바퀴살의 유용함은 그것이 비워있어서 가능하다는 이죠 된그릇과 바퀴살을 만든 원인은 외부에 있는 장인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존재론적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은 바이 무라는 것입니다. 집(House)이 집(Home)이 되는 존재론적 근거는 그 집을 생산한 목수(집이 집이 되게 한 원인이 됨)가 아니라, 그 집을 자기 안에 품고 있는 허공인 것입니다. 즉 인간이 집을 소중하고 안락하게 느끼며 자신의 존재를 품어주는 안식처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바이 집의 무인 허공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영혼의 안식처이 느끼는 것이 바이 이 이유 때문인 거죠. 따라서 무의 사상은 노자의 사상에 전체적인이 나타나고 있는 아주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개념입니다.
저는 요즘, 사람이 조금 모자란 듯 어수룩하게 비워야 함을 많이 느낍니다. 이전에는 나서고 똑 부러져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살다보니 이로움보다 해가 더 많더라고요. 첫인상이 강하다며 안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느긋하게 상대를 품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실천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더욱 비우는 노력을 많이 해야 하리라 봅니다. 비움의 철학은 인간관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것에 통하는 것 같습니다. 많이 먹으면 온갖 성인병의 원인이듯 몸도 비워야 하고요, 요즘은 인테리어도 비워야 함을 강조합니다. 비움의 철학은 이제 시스템으로 정착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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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가다 졸다보면
버스를 타고 가다 졸다보면
어느덧 낯선 생의 끝자락에서 마주치는 영혼들
언젠간 나도 이 자리에 누워야겠지만,
따스한 양지바른 곳이라 아버지는 편안해할까
간단히 차려온 음식
아버지를 지키는 들고양이와 나눠먹고
꾸벅, 절을 하며
내 남은 생의 여백을 아버지에게 고한다.
일 년에 한두 번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버스를 타고
졸다보면 나는 내가 아닌 나를 만난다
살아온 많은 날들을 이승이라고 하자
살아갈 적지 않은 날들을 저승이라고 하자
나는 이승도 저승도 아닌 경계에서
모호한 삶을 두 눈 없이 살아가고 있다
나의 무덤은 언제나 오늘이라는 허무의 시간 속에서 숨쉬고 있다.
버스를 타고 가다 깜빡 졸다보면
그동안 내가 만난 모든 기억들이
한 줄기 빛에 피를 흘리고
새로운 형상으로 나의 시간을 준비한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건너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저기에서의 삶을 모른다는 것은
여기에서의 삶이 빈 허공이라는 것
남은 내 생의 여백에 아버지가 들어왔다
비로소 내 생은 차지 않는 충만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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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의 지도자란, 최상의 정치란
- 도덕경 17장, 37장 -
太上下知有之, 其次親而譽之, 其次畏之, 其次侮之. 信不足焉, 有不信焉. 悠兮其貴言,
(태상하지유지, 기차친이예지, 기차외지, 기차모지. 신부족언, 유불신언. 유혜기귀언,
功成事遂, 百姓 皆謂我自然.
공성사수, 백성 개위아자연.) - 17장
道常無爲, 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도상무위, 이무불위.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화, 화이욕작, 오장진지이무명지박.
無名之樸, 夫亦將無不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무명지박, 부역장무불욕, 불욕이정, 천하장자정.) -37장
가장 좋은 것은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그를 친하게 여기고 명예롭게 여기며, 그 다음은 그를 두려워하고, 그 다음은 그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무위자연의 신표가 임금에게 없으면, 백성들 사이에도 신뢰가 일어나지 않는다. 조심하도다. 임금은 말하기를 아낀다. 그래서 어떤 공적이 이루어지고 일이 성취되어 도 백성들이 다 내가 자연스럽게 그런 일을 이루고 성취했다고 말한다.
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또한 하지 않음이 없다. 후왕이 도를 지킨다면, 만물은 장차 저절로 운화되리라. 운화하여 욕망이 생기면 나는 장차 이를 무명의 통나무로 진정시킬 것이다. 무명의 통나무는 또한 어떤 경우에도 욕망을 내지 않는다. 고요함으로써 욕망을 일으키지 않으면 천하가 장차 스스로 바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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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불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위 말의 취지는 살려야 합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자기 재임 기간 안에 모든 것을 다 이루려고 조바심을 냅니다. 그러다보니 이전 대통령이 해 놓은 것을 무조건 엎고 갈아치우려 하죠. 그러면서 자기가 한 업적을 지나치게 홍보하고 소리 크게 정책을 펼칩니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 당연히 성공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 퇴임 후 성공한 대통령이 하나도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근거할 겁니다. 세금 정책이며 교육 정책이며 요란한 정책이 성공한 예는 없습니다. 무관심이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한 대통령이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봅니다. 부디 대통령은 이 노자의 말에 귀 기울이기 바랍니다.
채우고 또 채우고, 억지로 무엇을 하려는 데서 인간 속세의 악(부정, 비리, 비윤리적 행위, 자연재해 등)이 발생한다면, 수천 년 전 노자는 속세의 악의 실체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으며 악을 해결하는 방법을 인간으로부터 찾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아닌 자연에서 찾았는데, 바로 무위(無爲)여야만 악이 없어진다고 본 것입니다. 무위(無爲:함이 없음)는 불위(不爲:하지 않음)가 아닙니다. 노자는 만물의 근원인 도의 성질이 ‘저절로 그러함’이듯이 인간도 무위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죠. 노자는 우주의 천지만물이 모두 자연의 도에서 생성ㆍ변화하고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유형은 무형에서 생겨나고 현묘하고 텅 빈 것은 실제적인 것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세상 모든 것을 무의 법칙에서 시작해야 인간은 행복해지고 본질적인 나를 찾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만, 통나무를 노자나 공자 모두 위대하게 봅니다. 그만큼 거칠고 질박한 것의 의미를 꿰뚫고 있는 것이죠. 거기다가 노자는 무명의 통나무라고 하여 무의 의미를 더합니다. 화려하고 풍성한 것이 때론 지금도 좋긴 합니다만, 그리 오래 가지 않더라고요. 금세 지겨워지고 불안해집니다. 그런데 꾸밈없는 질박한 자연에 가면 그리 마음이 포근하고 안락해질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자연에 완전히 푹 묻혀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자연이 더 그립고 끌립니다. 말없이 흐르고 지나가는 구름과 바람과 물처럼, 그리고 이름 없는 통나무처럼 정치도 그 정신을 조금만이라도 배우면 국민들의 삶이 정말 행복해질 텐데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