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12.3>
윤석열의 내란이 일어난 지 벌써 1년 반이 다 되어 간다. 그때의 흥분된 감정이 여전히 생생하다. 21세기에 비상계엄이라니 이게 현실이란 말인가… 너무 어이가 없어 처음에는 어안이벙벙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이 서서히 밀려왔다. 국민의힘이라면, 윤석열이라면 가능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렸던 학창시절 때의 기억, 또는 책으로 배웠던 그 끔찍했던 군부독재 시절이 재현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공포가 나를 휘감았다. 몸이 부르르 떨렸고 눈물이 막흘렀다. 그렇게 꼬박 밤을 새우고 아침에서야 잠시 눈을 붙였다. 그 후 국회에 의한 두 번의 탄핵 소추, 윤석열 체포 실패와 성공, 서부지방법원 폭동, 지귀연의 윤석열 석방, 윤석열 탄핵 찬반 집회, 2025년 4월 4일 윤석열 탄핵 선고, 이재명 공직선거법에 대한 조희대의 사법내란, 이재명 대통령 당선 등 이 수 많은 일들이 6개월에 걸쳐 일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는지, 우리가 이런 큰일을 어떻게 겪어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떨리고 놀랍기만 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담은 영화가 드디어 최초로 나왔다. 이명세 감독의 다큐 영화 <란 12.3>이다.
잠시 이명세 감독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이명세 감독하면 바로 떠오르는 단어가 ‘스타일리시’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 한국 처음으로 영화에 만화의 말풍선을 넣었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박중훈과 안성기의 싸움 장면 중 주먹을 교환하는 장면을 슬로우와 정지화면으로 연출한 것은 세계적인 화제가 되어 지금도 여러 영화에서 ‘오마주’되고 있고, <형사 Duelist>에서는 상당수 영화의 장면을 마치 CF처럼 연출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들어가야 하는데, 바로 영화는 서사 장르라는 것이다. 태초부터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이야기가 없는 영화는 영화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명세 감독이 이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감독은 과감히 서사를 포기하고 영화의 스타일,특히 영상미학에 골몰했다. 서사의 해체라고나 할까. 영화이론에서 기존의 영화문법인 서사를 해체하는 ‘후기서사이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마치 감독은 이것을 실현하는 듯 서사를 포기하고 영화를 독특한 영상장르로 만들어왔다. 스타일리시한 영상에 몰두한 것이다. 결과는 명확하고 처절했다. 일부 평론가들에게는 최고의 스타일리시한 감독으로 칭송받았지만 관객으로부터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관객은 영화관에서 두 시간짜리 CF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감동 있는 서사를 보고 싶은데 말이다. 고집을 꺾지 않았던 감독은 결국 관객과 제작사로부터 외면당했고 상당 기간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감독의 첫 다큐 영화다. 그것도 대통령이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을 다룬 다큐 영화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감독에게 딱 맞는 영화가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 영화 <란 12.3>을 보면 이 영화가 다큐인지 극영화인지 헷갈린다. 감독은 실제 내란 영상에 자신의 장기인 만화와 그림, 내란 당시 사람들의 심정을 황량한 내란의 거리 영상으로 채웠다. 그리고 역사적 불행이었던 5.18까지 살짝 담아내며 한번도 본적 없던 다큐영화를 탄생시켰다. 거기다 내레이션과 인터뷰가 없는 다큐라니, 그러니까 더욱 극영화 같은 다큐영화가 된 것이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극장과 같은 프레임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21세기에 내란이라니 말도 안 되는 현실이라는 것을 풍자적으로, 또는 아이러니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 후 우리가 익히 보았던 내란의 밤 영상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현재 거의 사실로 밝혀진 그러나 영상이 없는 부분인 내란의 6개월 전, 며칠 전은 만화나 그림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계엄 후 깨어 있는 국민들이 막았던 내란의 생생한 현장을 긴박하고 웅장한 음악과 함께 펼쳐보인다. 음악은 때로는 웅장하게 때로는 긴박하게 그리고 조금은 미스매치인 것 같은 블랙코미디적으로 행사되고 있다. 고독한 음악가(피아니스트)가 전쟁 한 가운데 피아노 선율로 전쟁의 상황을 처절하게 기록하듯 깨어 있는 국민들이 온 몸을 바쳐 민주주의를 지켜낸 그날의 현장을 아주 생생하게 재현한다. 여기에 비상계엄을 막기 위한 민주당 의원들의 긴박했던 몸싸움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여의도로 모이지 못한 국민들의 불안한 감정을 그림인지 실사인지 모를 장면으로 살짝 제시한다, 거기다 5.18 장면을 자연스레 붙여 이 12.3 내란에 저항하는 국민들의 투쟁을 역사적으로 기록하고 의미화한다. 민주주의 파괴범인 내란의 주역들은 만화기법을 도입해 시니컬하고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감독의 또 다른 특기인 블랙코미디적으로 그들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여의도로 모였던 국민이건 모이지 못했던 국민이건 각자의 방식으로 내란범 윤석열과 그의 부하들에 저항하고 투쟁했던 국민이라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장면들도 영화 여러 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이며, 누가 지켜내고 누가 이어가고 있는지, 즉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영화는 명확히 하고 끝난다. 진정한 의미의 애국가 불리고 대형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이다.
영화의 흐름과 편집도 굉장히 빠르다. 너무 빨라 자막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 아쉽다면 아쉽다. 이 빠른 편집 덕분에 영화는 다큐라는 사실을 잊고 지루할 틈 없이 긴박하게 흘러간다. 마치 극영화인 듯. 솔직히 극영화였다면 꽤 아쉬울 수 있다. 극영화는 주인공과 악당, 그들 사이의 긴박한 서사가 뒤얽혀 감동과 메시지까지 담아내야 하니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큐다. 다큐이기 때문에 극영화 같은 서사는 필요 없다. 그래서 이명세 감독의 장기인 스타일리시한 장면과 혼합장르의 삽입, 음악 등의 결합으로 이 영화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극영화 같은, 아니 극영화도 아니고 전통의 다큐라고도 할 수 없는 이상하고도 아주 특별한 이명세 감독만의 다큐영화로 탄생된 것이다. 다큐영화의 새로운 전기라고나 할까.
이와 같은 장점을 떠나 12.3 내란을 다룬 그 어떤 영화는 다 봐야 한다. 보는 것으로써 민주주의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영화는 계속 나와야 한다. 솔직히 성질 같으면 윤석열과 김건희는 루이 16와 마리 앙뚜아네트처럼 단두대에서 처형되면 좋겠지만, 최소한 사형판결이 나와야 한다. 또한 윤어게인을 외치는 민주주의 파괴범들 역시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 독일에서 나치를 외치면 처벌되듯. 민주주의는 그 나라 국민들의 의식 수준에 달려 있다, 깨어 있는 국민들이 많아야 유리바닥 같은 민주주의는 온전히 보존될 수 있다. 앞으로도 12.3 내란을 다룬 영화는 많이 나와야 하고, 이제 극영화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으면 좋겠다.
개인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