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영화를 내놓았다. 다작하지 않는 그지만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가 뭘까? 그 이유를 좇다보면 이번 영화 <버닝>의 메시지를 구하는데 조금은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한국 영화사에서 굉장히 뚜렷한 족적을 가지고 있다. 국어교사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처음 영화 <초록물고기>는 영화를 이렇게 사실적으로 만드는 감독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영화인지 영화가 아닌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인기배우들이 나오지만 않았다면 정말 다큐인줄 알 정도였다. 그러더니 <박하사탕>에서는 역사와 인간 삶의 상관관계 즉, 역사의 물줄기에 휩쓸린 한 인간의 삶에 대해 묻는 심각한 메시지를 던지더니, <오아시스>에서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물었다. 인간존재의 현실적 경계를 허물었다. 그리고 <밀양>에서는 인간(내면)의, 종교의 허구(이중성)를 신날하게 비판하더니 <시>에서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에 대해, 인간의 근원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물었다. ‘윤리적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속세적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다시, 인간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이렇게 철학적 질문을 던진 감독은 이번 영화 <버닝>에서 그가 추구한 질문을 총체적으로 구하고 있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이번 영화 <버닝>에서도 감독의 색채는 아주 진하게 묻어나고 있다. 겉으로는 탈출구 없이 방황하는 20대의 분노를 말하고 있기도 하고, 연쇄살인마(?)의 이중성을 교묘하게 비틀고 있기도 하지만 조금 속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강하게 던지고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계적인 것,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계, 보이는 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닌 그 경계 어느 지점에 삶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모호한 그 경계의 어느 지점에서 인간은 항상 불안하고 분노하며 때론 지루해하고 울부짖기도 하면서 결국 모든 것을 태운다. 태우지 않으면 안 되는 삶! 태울 수밖에 없는 삶! 그래야 분명해지니까… 참 지독하게도 첫 영화부터 끝까지 이창동 감독은 이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묻고 있다. 그것도 직접 묻고 있다. 현란한 수사가 아닌 적절한 비유와 서사를 담아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의 인생은 어떠하냐고. 삶이 무엇이냐고.
알바인생을 살고 있는 종수(유아인)는 우연히 어릴 적 고향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가는 동안 자신의 원룸에서 키우고 있는 고양이에게 밥을 줘 달라고 종수에게 부탁한다.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고 온 해미는 거기서 만난 벤(스티브 연)를 종수에게 소개한다. 벤은 아주 배려 깊고 부드러운 강남에 사는 금수저다. 셋은 가끔 어울리는데, 문득 벤과 해미는 종수가 사는 파주 시골로 놀러 온다. 거기서 벤은 쓸모없고 필요 없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 취미라는 말을 종수에게 한다. 그 직후 해미가 사라진다. 해미를 찾아 헤매던 종수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분노를 벤에게 표출한다.
리틀 헝거(Little hunger)는 단순히 배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는 삶에 배고픈 사람, 즉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대사는 영화에서 몇 번 나오는데, 결국 감독이 영화 전체에서 말하고 싶은 메시지이자 구하고자 하는 질문인 셈이다.
삶은 무엇인가? 왜 나는 이렇고 당신은 그런가?
엄마는 어릴 적에 도망가 버렸고,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로 공무원을 때려 감옥에 있고 나, 종수는 미래가 없는 답답한 현실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어릴 적 친구 해미는 이런 것이 싫어 고향을 떠나 가족과 생이별한 채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지만 미래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30대 강남 금수저 벤은 그저 놀면서 아주 화려하고 평온하게 살고 있다. 이 모두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종수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분노폭발 직전에 있고, 해미는 삶의 의미를 찾으러 아프리카까지 가서 노을을 보며 운다. 그리고 자기 고향 마당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춘다. 아프리카 원주민마냥. 부러울 것 없고 다 가진 벤은 배려심 깊고 온화하지만 그 역시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쓸모없고 필요 없는 비닐하우스를 정기적으로 태워야만(불법을 해서라도)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다. 참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요 삶이다. 극과 극이 존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그러나 그 누구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것이 인생이다. 나는 이것이고 당신은 저것이면 삶은 이것과 저것 사이 어느 경계에서 노을처럼 불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파주 시골 마당에는 외제차와 중고트럭이 있고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소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속에서 같이 대마초를 피고 와인을 마시는 세 사람,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어울림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저 멀리 타는 노을처럼 그들 모두 타버릴 존재라는 것을 까마득히 모른 채…
영화는 이질적인 것들을 카메라에 집중적으로 담고 있다. 세 사람의 이질적인 신분적 차이와 그들의 이질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이질적인 풍경이 가득하다. 가령, 해미방에서 보이는 남산타워와 그녀의 지저분한 달동네 원룸 방, 용산참사를 전시하고 있는 갤러리와 그 안에서의 식당 장면, 화려한 강남의 술집이나 벤의 집과 소똥이 가득한 시골 종수네 집 장면, 외제차와 중고트럭 등 이처럼 이런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같이 사는 것이 우리네 삶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로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변주가 있으니 이 이질적인 것들은 결국 모두 태워지고 마는 것이다.
‘여기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된다.’고 해미와 벤의 입을 빌어 영화는 몇 번 말한다. 여기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되는데 왜 그 먼 아프리카까지 가서 노을을 보며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 파주 시골마을에서 노을을 보며 삶의 의미를 찾으면 안 되는 것인지… 쓸모없고 필요 없는 존재는 없을 진대 누가 그런 것을 규정하는지… 왜 벤은 쓸모없고 필요 없는 비닐하우스를 태워야 가슴이 뛴다는 것을 느끼는 것인지! 누구는 어릴 적 해미 집 앞에 우물이 있었다 하고 누구는 없었다고 하고. 해미 원룸에는 고양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이 모두는 여기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비닐하우스 그것들은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태우는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면 되는 걸까? 이것이 자연의 도둑인가!(영화 속 벤의 대사)’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다 찾아봤지만 너무 가까우면 못 볼 수가 있는 것(벤과 벤의 여자친구와 종수가 고양이를 찾는 대목에서 나온 대사)’처럼 떨어져서 보면 벤도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자연의 도둑’ 시각에서 보면 흙수저 종수와 해미만 필요 없고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금수저 벤도 쓸모없고 필요 없는 존재일지 모르니까. 영화 마지막 장면, 칼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벤이 고통만이 아니라 차라리 행복해할지도 모른다고 느낀 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내가 사디스트라서 그렇게 느낀 것일까. 결국 모든 것이 다 타버렸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가 모호한 노을 타는 저녁, 이질적인 모든 것들이 다 타버렸다!
삶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배고픈 사람: Great Hunger
무거운 주제를 너무 현학적으로 난해하게 풀지 않으면서 대립과 반전을 서사 속에 녹여 주제를 풀어나가는 감독의 역량에 그저 놀랄 뿐이다. 끔찍한 살인 장면 하나 없는 연쇄살인마(?)를 소재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철학적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또 있을까.
개인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