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정의까지 바라지 않는다. 인류사를 통틀어 정의가 제대로 실현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러나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예의가 사라진 시대, 즉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면 상대를 깔보고 무시하고 심지어 때리고 욕하는 시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특히 양극화가 심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사라진 신자유주의(자본주의) 시대, 사회는 대혼란에 빠지고 있다. 폭동의 기미가 스멀스멀 꿈틀대고 있다. 영화 <조커>는 이런 시대적 상황을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영화다. 고담시라는 가상의 도시는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살고 있는 보통의 우리 도시다.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병든 노모를 모시고 낡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코미디언이 꿈인 남자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지만 웃기지 않아 인기가 없는 무명의 광대다.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고 폭력을 가한다. 너무나 무례한 사람들 속에서 그는 점점 지쳐가고 동시에 미쳐간다. 유명 토크쇼 진행자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니로)은 아서플렉의 동영상을 우스개 장면으로 도용하고, 그의 어머니 페니(프랜시스 콘로이)가 이전에 일하던 대저택의 주인 토마스 웨인(브래트 컬랜)은 그를 무시하며 냉대한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는 점점 슬픔과 절망을 넘어선 광인이 되어 간다. 웃음과 슬픔은 절망과 분노로 점철되고 그 절망과 분노의 끝지점에서 그는 시대의 카오스적 광기어린 조커가 된다.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영화는 많이 있어 왔지만 악당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 악당을 정당화(?)하는 영화는 거의 보지 못했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택시 드라이브>(1976), <분노의 주먹>(1980) 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는 하는데 보지 못해 잘 모르겠다. 아무튼 안티 히어로를 전면에 내세워 그를 정당화하는 영화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논란이 크다. 그러나 이 영화가 폭력을 정당화했는지는 의문이다. 무조건 폭력을 정당화하고 악당을 미화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아서 플렉이 악당 조커가 될 수밖에 없는 당위는 영화에서 충분히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폭력이나 살인이 정당화되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최소한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은 마련되었다는 뜻이다. 선인이, 또는 평범한 서민이 악당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것 또한 영화의 목적이자 존재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히어로가 악당을 물리치는 쾌감만이 오락영화의 미덕은 아니다. 한 번쯤은 뒤바꿔 악당이 메인 주인공이 되어 우리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도 사회의 역설적 정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이것을 사회 비판의 사실적 영화라고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영화 <조커>가 정말 사실적 영화의 장르 영화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조커>는 오로지 ‘조커’를 위한 영화다. 그만큼 조커라는 역할과 그 연기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 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막강하다. 웃음과 슬픔, 절망과 분노가 섞인 정신병적인 조커의 탄생을 위해 뼈가 앙상히 드러날 정도로 다이어트를 한 그는 새로운 조커를 완벽히 탄생시켰다. 뼈가 앙상한 등을 보이면서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는 그의 몸짓은 호아킨 피닉스 그가 아니면 누가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섬뜩하고 사악한 조커를 탄생시킨 잭 니콜슨, 신적 수준에 이른 절대 악의 경지를 보여준 히스 레저와 또 다른 조커를 탄생시킨 것이다. 호아킨 피닉스가 탄생시킨 조커는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경계의 악이다. 약하고 슬프지만 분노로 찬 악이면서 내 이웃의 아저씨처럼 곁을 내 줄 것 같으면서도 다가갈 수 없는 섬뜩한 광인 같은 매서움을 내포한 복합적인 인물이 그가 탄생시킨 조커다. 그래서 그의 조커는 동정심을 유발하는 우리의 조커가 되었다. 스스로 히어로 같은 악인이 된 조커가 아니라 부자들에 의해 냉대당한, 차별을 공고히 한 사회에 의해 버림받은 사람들, 즉 이 시대의 아웃사이더들이 만든 조커다. 그래서 사회적 분노에 찬 조커다. 다시 말해 ‘내가 바로 조커다!’, ‘우리가 바로 조커다!’라고 외칠 수 있는 ‘조커’인 것이다.
위태롭고 불안한 시대다.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하고 외면당하고 모욕당하는 시대다. 그런데 이것을 당연시한다. 그래서 분노의 시대다. 이 분노를 정치인도 종교인도, 국가도 사회도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한다. 아니 즐긴다. 그것이 인생이라며. 비극인줄 알았는데 코미디이건, 코미디인줄 알았는데 비극이건 인생이 이러면 안 된다. 좌절 그 끝까지 내모는 이 사회에 탈출구는 없다. 더 이상 희망은 없다. 그래서 미친다. 정신병자가 되지 않으며 이상할 정도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어쩌면 정신병자 광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우리의 ‘조커’다. 우리(사회)가 탄생시킨 ‘조커’인 것이다. 그의 슬픔과 발작적 웃음은 이런 우리 사회의 상징인 셈이다. 그래서 그의 조커는 한 마디로 설명이 불가능한 캐릭터이고 어둠과 빛 그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다. 가히 매혹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이다. 그 매혹은 우리사회의 병든 상징이니 이 또한 얼마나 역설적 슬픔인가!
사실주의 영화이건 오락영화이건 영화에서 이런 복잡한 감정을 느낀 것은 참 오랜 만이다. 우리 사회를, 나 자신을 되돌아봐야 하는 영화다. 영화적 완성도 면에서도 그렇고 호아킨 피닉스의 서늘한 조커 연기는 완벽 그 자체다. 더 이상의 조커는 없을 것이다. 아니, 없어야 한다.
개인 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