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꽃>과 <잔칫날>에 나타난 ‘삶’과 ‘죽음’, 그리고 ‘애도’의 의미
코로나 시대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것이 두렵고 꺼려지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시대에 큰 영화들이 개봉을 안 하니 작고 울림이 큰 영화가 더 많이 개봉되어 안전하게 볼 수만 있다면 더욱 의미 있는 영화의 시간이 되고 있다. 잘 찾아보면 정말 좋은 영화가 많다. 그 중 죽음과 애도의 문제를 진중하게 다루면서 그 의미를 묻는 영화가 있다. <종이꽃>과 <잔칫날>이다.
코로나로 인한 전 세계 사망자가 150만 명이 넘었고 1년 안에 그 이상 죽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죽음과 애도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제 죽음과 애도는 남의 일이 아니다. 나의 일이고 우리의 일이다.
<종이꽃>의 성길(안성기)은 죽은 자를 위해 손수 손으로 하나 하나 종이꽃을 접는, 고지식하게 옛날 방식을 고수하는 장의사다. 그러다보니 손님이 거의 없고 폐업 직전이다. 이때 대기업 장의회사에서 자기회사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그러면 장의절차와 모든 것이 이윤 목적으로 진행된다. 망설이는 가운데, 그의 아들 지혁(김혜성)은 의사를 꿈꾸다 사고로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어 집안에 24시간 누워있다. 자살을 여러 번 시도하고 삶에 의욕이 전혀 없다. 낡은 빌라 지하에 살고 있는 부자 앞집에 딸 하나를 홀로 키우는 여자 고은숙(유진)이 이사온다. 그녀는 남편의 가정폭력으로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 중이다. 지혁의 간병인을 구하지 못하던 중 은숙이 그의 간병인을 자처한다. 밝고 명랑한 은숙으로 인해 지혁과 성길의 삶에도 한 줄기 빛이 비치고 어둠으로 잠식된 그들의 삶이 서서히 변해간다. 그런데 은숙은 딸을 두고 병원에 감금될 위기에 처한다. 희망이라고는 하나 없는 이 둘의 가정에 죽음과 삶, 그리고 애도의 순간이 겹친다.
<잔칫날>은 어머니는 도망가고 없고 아버지와 살고 있는 남매의 이야기다. 역시 허름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버지마저 병을 앓고 몇 년 째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 오빠 경만(하준)과 여동생 경미(소주연)는 힘들게 일을 하고 남은 시간 번갈아 아버지 간병을 하고 있다. 점점 지쳐가던 중 아버지가 죽고 장례식을 치르는데 장례비가 없다. 텅 빈 병원 장례식장, 오는 조문객도 거의 없는데 조문객 음식문제로 고민을 하게 되고 상조 직원은 장례절차와 관련해 결제하라고 재촉한다. 이 와중에 아버지 친척들은 빌려간 돈 갚으라고 경만에게 닦달하고 고모들은 슬픔 하나 없는 곡소리를 내며 남매를 욕한다. 스산한 장례풍경 속에서 경만은 선배에게 한 지방의 어느 집안 팔순 잔칫날 행사 MC를 제안 받는다. 일당이 커다. 아버지 장례비용을 벌기 위해 경만은 망설이지 않고 잔칫날 행사에 투입된다. 그런데 잔칫날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 애쓰다 그만 잔칫날 주인공인 할머니가 쓰러져 죽고 만다. 책임을 다투다 일당을 받기는커녕 경찰에 체포될 위기에 처한다.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다말고 남의 잔칫날에 흥을 돋우다 그 집의 장례까지 치르게 된 경만… 장례와 애도에도 비용 문제가 중요한 우리 사회의 진풍경이 디테일하게 그려진다.
장례는 원래 개인에겐 슬픔이지만 마을 공동체에겐 축제이기도 했다. 마을 사람 한 사람이 죽으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힘을 모아 그 사람의 장례를 도왔고 이 과정에서 마을 공동체는 시끌벅적 음식과 술을 마시며 한 마당 축제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저승으로 가는 사람도 그나마 마음 편히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개인의 슬픔(애도)은 마을의 축제와도 연결되는 묘한 지점이 있었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극심한 현대는 이런 공동체의 끈끈함이 모두 사라졌다.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 그 시체가 썩어도 모르는, 몰라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 죽음에는 어떤 애도도 없으며 공동체의 모습도 사라졌다. 그저 황량할 뿐이다.
또한 장례는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하고 죽음은 삶을 전제로 한다. 곧 장례는 죽음과 삶과 연계되어 있고 그것을 성찰하게 한다. 죽음은 무엇이며 삶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죽는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다. 죽은 자를 보내는 산자의 마지막 예가 남아 있으니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닌 것이다. 장례 문화가 그것이며 이것은 곧 산자의 몫이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을 때 잘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장례를 치르기 위한 남은 가족의 고통은 죽은 자보다 클 것이며, 장례 치를 가족이 없으면 그 마지막은 정말 비참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그리고 장례, 이것은 서로 얽혀 있는 한 원의 일부다.
<종이꽃>은 비루하기 그지없는 삶을 보여준다. 오래된 빌라 지하 집에서 사는 폐업 직전까지 간 고지식한 장의사와 자살시도하는 장애인 아들, 그리고 가정폭력으로 살인자가 되어 혼자 딸을 키우는 여자가 앞집에 이사온다. 정말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딱 맞을 지경이다. 그러나 삶을 대하는 태도는 남자들만 사는 성길 집과 여자들만 사는 은숙 집이 대조적이다. 어둡고 부정적인 성길 부자는 밝고 긍정적인 은숙 모녀에 동화되어 삶이 조금씩 변화한다. 아니 서로 조금씩 영향을 주고받아 그래도 삶은 그럭저럭 살아 갈만 하다고 말한다. 서로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제를 내세우기 위해 영화는 또 다른 축을 살짝 보여준다. 가난한 자와 노숙인들을 도우며 국숫집을 하던 남자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무연고 죽음이다. 시청에서는 바로 화장하려고 하나 그의 도움을 받은 노숙인들은 시청에서 시민 장례식을 치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한 바탕 소란이 벌어지는데, 바로 장례는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결국 영화는 삶과 죽음, 그리고 장례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으며 이것은 산자와 죽은 자 모두를 위한 것이며 서로 도와야 한다는 것을.
<잔칫날>은 삶과 죽음, 장례에 대한 일상의 묘사 디테일이 뛰어나다. 감독의 관찰력이 돋보인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는데 장례비가 없어 곤욕을 치르는 장면이 서늘하게 리얼하다. 병원의 장례음식도 돈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수의와 입관 재료도 천차만별이다. 장례음식을 몇 인분 할 것이냐, 편육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장례비 계산을 빨리 하라고 재촉하는 등의 묘사는 살아 있는 대목이다. 거기다 사촌은 망자가 빌린 돈 갚으라고 하고 이모들은 진심어린 슬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의 없는 곡소리나 하라고 재촉한다. 그 외 문상객은 거의 없다. 이 모두가 무너져가는 공동체의 장례문화인 것이다. 진심어린 애도의 시간 없는 허위의 장례… 아들은 장례비를 벌기 위해 남의 잔칫날에 가서 행사 진행을 하고 장례식에 홀로 남은 여동생은 상주인 오빠의 부재에 혼자 진땀 뺀다(가부장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러나 영화는 남의 잔칫날에 벌어진 또 다른 장례라는 색다른 소재를 통해 이 시대 삶과 죽음, 그리고 장례에 대해 가볍지 않게 성찰하며 되새기고 있다.
남매가 겪었을 삶의 무게감, 도저히 벗어날 길 없는 그들의 넌덜머리나는 삶, 그 삶은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주 조금은 벗어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한 희망을 준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장례는 남의 잔칫날과 대응(역설적 대비)되며 그 잔칫날은 다시 장례식이 되는 순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선순환인지 역순환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동양의 순환적 철학을 보여준다. 삶은 죽음이요 죽음은 곧 삶이라는 순환은 장례식과 잔칫날이라는 모습으로 대응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애도의 시간과 그 감정이 중요한데, 영화는 마지막에 보여준다. 행복했던 삶이든 불행했던 삶이든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삶 그 자체를 긍정하려 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애도하고 보내준다. 감독의 묘사력이 뛰어나다.
애도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산 자를 위한 것이다. 죽은 자를 (허례의식 없이) 잘 보내주는 것은 남은 자의 삶을 잘 이어가기 위한 것이다. 쉽게 말해 산자의 삶을 잘 살기 위해 죽은 자를 잘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심어린 애도는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매개인 것이다. 삶이 곧 죽음이라는 것을 성찰하기 위한, 죽음이 내 삶의 바로 곁에 있음을 깨닫기 위해…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질문으로 환원된다!
개인별점: <종이꽃>: ★★★
<잔칫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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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가다 졸다보면
버스를 타고 가다 졸다보면
어느덧 낯선 생의 끝자락에서 마주치는 영혼들
언젠간 나도 이 자리에 누워야겠지만,
따스한 양지바른 곳이라 아버지는 편안해할까
간단히 차려온 음식
아버지를 지키는 들고양이와 나눠먹고
꾸벅, 절을 하며
내 남은 생의 여백을 아버지에게 고한다.
일 년에 한두 번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버스를 타고
졸다보면 나는 내가 아닌 나를 만난다
살아온 많은 날들을 이승이라고 하자
살아갈 적지 않은 날들을 저승이라고 하자
나는 이승도 저승도 아닌 경계에서
모호한 삶을 두 눈 없이 살아가고 있다
나의 무덤은 언제나 오늘이라는 허무의 시간 속에서 숨쉬고 있다.
버스를 타고 가다 깜빡 졸다보면
그동안 내가 만난 모든 기억들이
한 줄기 빛에 피를 흘리고
새로운 형상으로 나의 시간을 준비한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건너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저기에서의 삶을 모른다는 것은
여기에서의 삶이 빈 허공이라는 것
남은 내 생의 여백에 아버지가 들어왔다
비로소 내 생은 차지 않는 충만함이 되었다.
창밖의 장례 행렬
누군가 죽은 모양이다
창밖에 장례 행렬이 늘어서 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향이 향그럽다
창에 차고 슬픈 기억이 아른거린다
삼년 전 아버지를 저 먼 곳으로 보내고도
그날 저녁 나는 끝내 밥을 먹었다
속으로 새겨진 눈물 자국으로 밥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배가 고팠었는지 기억이 없다
슬픔이 일상을 넘어설 수 없는 법
저들도 오늘 저녁 가족을 땅 속에 묻고
밥을 꾸역꾸역 먹겠지
긴 장례 행렬이 짧아 보인다,
커피에서 나는 김이 창에 어린 슬픔을 지운다
잔잔히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커피 향을 더욱 진하게 하고
끊어질 듯 들려오는 창밖의 곡소리는
더 이상 슬픔을 이어가지 못하고,
장례 행렬을 바라보는 내 눈이 섬뜩하게 건조하다
어떠한 슬픔도 현실보다 더 슬플 수는 없는 건지
죽은 자는 이해해줄까
잘 가던 장례 행렬이 잠시 멈추자
순간 내 심장이 멈칫한다
죄 없이 죄인이 된 나는
마음 다하여 창문에 입김을 불어넣는다
그래도,
산 자의 슬픔은 창밖을 넘어서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