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 2025. 2. 28
봉준호 감독이 5년만에 신작 <미키 17>을 내놓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는 자신의 인터뷰(인터뷰에서는 메시지를 담으려고 의도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와는 다르게 항상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래도 놓치지 않는 것이 재미다. 그의 모든 영화가 일단 재미있다. 봉준호를 몰랐던 그의 첫 작품인 <플란다스의 개>만 흥행에서 실패했을 뿐 그 이후 상업영화는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이 어떨지 의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를 낮추고 보면 그럭저럭 재미있게 볼 것이고 <기생충>, <괴물> 같은 기대를 하면 실망할 것이다. 미국영화라서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지만 실제 영화는 화려한 SF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봉준호답게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와 현실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있는 영화다.
외계행성 니플하임에 이주를 계획하고 있는 2054년 지구. 마카롱 사업 등에 실패한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사채업자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빚을 갚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해서 지구를 탈출하는 우주선에 몸을 싣는다. 그런데 아무 능력이 없는 미키는 외계행성을 실험하는 소모품인 익스펜더블에 지원한다. 이는 실험하다 죽으면 다시 프린팅 복제되는 프로그램이다. 마치 실험쥐처럼. 4년의 항해와 얼음행성 니플하임에 도착한 뒤에도 늘 미키를 지켜주던 여자친구 나샤(나오미 아키에)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던 중 이 행성의 생명체‘크리퍼’를 만난 미키는 죽을 위기에서 살아 돌아온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미키 17’이 죽은 줄 알고 벌써 ‘미키 18’이 프린트 복제되어 있다. 하나의 행성에 하나만 허용된 익스펜더블에 멀티플이 생긴 것이다. 불법이다. ‘미키 17’은 죽어야 한다. 이 우주선에 약간 모자란 독재자 마셜(마크 러팔로)과 그의 부인(토니 콜렛)이 미키를 가만 둘리 없다.
영화 <판도라>처럼 굉장하고 화려한 화면의 외계행성이 나오거나 기괴한 괴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스타워즈>처럼 미래 기계나 무기도 나오지 않는다. 찬 얼음행성 니플하임이 잠시 나올 뿐 거의 대부분 영상은 우주선 안에서의 씬이다. 그렇다면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미래에 대한 비판이나 미래 세계관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현재의 정치에 대한 풍자이자 힘들게 노동하며 소모품처럼 소모되고 마는 노동자(인간)에 대한 애정이자 이런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다운가, 인간보다 복제인간이 더 인간다운 것 아닌가.’ 라는, 즉 인간본질에 대한 비판과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미키가 계속 프린트 복제되기 전 죽을 때 지켜보던 사람은 정작 “죽는 느낌이 어때?”라는 비인간적인 질문을 던진다. 복제 미키의 팔이 잘려나갈 때도 사람들은 무감각하다. 살기 위해 지구를 탈출한 미키는 정작 끊임없이 죽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또한 지구를 대신할 외계행성을 찾는 지구인은 외계행성을 무차별 침략하고 억압한다. 이 최정점에 조금 모자란 독재자 마셜과 그의 부인이 있다. 이런 설정은 미국의 정치 현실만이 아니라 한국의 정치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특정 나라 특정 인물이 아니라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현실인 셈이다. 감독은 이런 정치 현실에 대한 거대한 야유와 풍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영화평론가와 정치가들은 이 영화를 싫어한다고 한다. 미국의 돈으로 미국을 비판한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미국인들이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더 웃긴 것은 마치 한국의 윤석열과 김건희를 모방한 듯하기도 하다. 이 영화 시나리오는 문재인 정부 때인데도 말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건 이런 독재자들은 항상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침략의 역사이자 학살의 역사임을 풍자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많은 SF영화에서 ‘인간복제’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는 이런 영화와 무엇이 다를까? 아쉽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라리 흥행을 포기하고서라도 심오한 철학을 담았으면 더 좋은 평단의 평을 받았을 것인데, 감독은 일단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복제와 인간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주제를 깊이 다루지 않았다. 대신 여기에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아 영화를 이어간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 거의 최초로 애정씬과 배드씬이 담겨있다. 인간과 복제인간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일반적인 남녀 간 사랑이야기로만 영화를 풀어가지는 않는다. 이 영화가 남녀 간 사랑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감독은 인간에 대한 철학적 깊이를 없애고 여기에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와 독재자에 대한 비판을 첨가하였다. 그리고 남녀 간 사랑이야기를 덧붙였을 뿐이다. 이런 어정쩡한 선택이 조금은 아쉽다. 인간의 대한 철학적 깊이를 더 파고 들어가든지, 아니면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만들었어야 했다. 그것도 아니면 화려한 화면에 치중하든가. 여러 가지 요소를 대충 섞어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봉준호는 봉준호인 만큼 엄청난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즐길 수 있는 영화다.
이 지면에서 나는 인간복제와 관련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간단히 말하고자 한다. 철학적으로 인간은 이원론에 입각해 몸은 욕망이 지배하고 머리는 이성 또는 정신이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몸이 훼손되더라도 정신만 유지하고 있으면 인간이라고 철학자들은 주장했다. 쉽게 말해 팔다리가 없어도 이성을 보유한 정신이 있으면 인간이라는 말이다. 또한 ‘나는 본질적으로 나의 신체가 아니라 정신’이라고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내가 일정기간 동안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다른 신체 속에서 태어나는 일이 있더라도 혹은 내가 신체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 해도, 나의 신체가 죽어서 완전히 사라졌다 해도 내가 동일한 인격체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기억’이다. 합리론 철학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을 다른 인격체로 생각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과거의 기억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홉스는 인격의 핵심요소로 ‘이성, 의식, 자기-의식’을 주장했다. 합리적인 존재는 의식적이며 생각할 수 있고 자기-의식은 사고와 분리될 수 없다. 이 메카니즘에서 기억이 작동한다. 기억의 연속성이 있는 한, 즉 내가 어떤 것을 행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동일한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한, 나는 여전히 동일한 인격체이다. 가령, 다중인격체는 이런 철학자들에 의하면 동일한 인격이 아닌 셈이다. 나의 이성으로 의식하지만 자기-의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을 이해하고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감독은 영화에서 미키의 기억을 이식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위 철학에 의하면 프린트 복제된 미키도 인간 또는 이전의 프린트된 미키와 같은 기억을 보유하고 있으니 동일한 인격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영화에서 복제 미키는 소모품으로 취급된다. 익스펜더블이라는 뜻도 소모품이라는 의미 아닌가. 감독의 영리함이 여기에서 발휘된다. 인간과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고 의식하며 동일한 기억을 보유하고 있으면 인간인데 정작 복제 인간 미키는 소모품으로 취급되고 이런 미키를 바라보고 대하는 인간은 너무 비인간적으로 묘사된다. 인간은 정작 무감각하고 폭력적이고 독재적이다. 이쯤되면 누가 인간이고 누가 인간이 아닌지 의문스럽다.
그래서 칸트는 이성(정신)을 가지고 있고 단순히 동일한 기억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진정한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칸트는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과 구별하기 위해 ‘인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인격’은 본질적으로 합리적 행위자로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존재의 모습과 목표를 결정할 수 있다. 이런 합리적 자기 결정 능력 때문에 인격은 유일하게 가치있는 존재일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인격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해야 하며 결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즉 인격은 본래적 가치, 즉 존엄을 가지며 이 존엄으로 인해 인격은 최상의 가치를 지닌다.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은 인격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필요한 합리성이나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격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은 인격에 비해 도덕적 존중을 못받을 수도 있다. 이 말을 확대해석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인간을 우리는 진정한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들에게는 합리성도 없고 존중해야 하는 존엄을 가지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즉 2025년에 계엄령을 발표하고 불법, 위헌적인 포고령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계몽령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이 바로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들이 진 선거는 무조건 중국이 개입한 불법선거라고 하는 자들에게 무슨 합리성이 있으며 인격이 있는가! 중앙선관위와 헌법재판소를 없애자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파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합리성도 없고 존엄으로 인식되는 인격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93)>에서 육체노동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같은 인조인간이 있다. 그들은 어떠한 권리나 본래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은 미래의 노예들로, 그저 다른 행성을 착취하고 식민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는 그들을 인간보다 더 인간화하거나 인격화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들을 인간으로 만든 것은 이식된 기억이 아니라, 그들의 기억이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대한 분노였다. 아무튼 영화 전체에서 인간과 복제인간 사이 경계선이 끊임없이 의문시된다. 결국 복제인간을 추적파괴하는 인간 데커드(해리슨 포드) 자신도 복제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암시되며 영화는 끝난다. <미키 17>에서도 <블레이드 러너>를 따라한다. 오마주라고 해야 하나. 하나 다른 것은 인간의 과거 기억을 그대로 이식하는 것 뿐이다. 이렇게 복제된 인간은 소모품으로 취급되지만 인간보다 훨씬 인간다운 인격체이다. 결국 <미키 17>에서도 결말에 미키를 제거하려는 독재자 부인도 결국 복제인간일 수 있다는 암시를 던지고 끝난다.
영화는 다른 문제도 슬쩍 제기한다. ‘미키 17’과 ‘미키18’의 성격이 다르다. 동일한 기억을 이식했는데 어떻게 성격이 다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기억이 동일해도 성격은 다를 수 있다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성격이 다른 쌍둥이처럼. 기억과 성격의 관계를 다룬 철학과 심리학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었어야 했다. 기억이 똑 같은 복제인간이 서로 성격이 다르다… 그러면 또 누구를 인격체로 인식해야 하고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결국 칸트의 주장대로 존엄을 가진 인격으로 진정한 인간을 판단해야 하지 않나 싶다. 인간이 정말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존엄을 가진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도 이런 주재를 다룬 이전의 영화처럼 복제인간이, 그리고 지구인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외계행성 생명체인 ‘크리퍼’가 더 인간답고 인간이 가장 인간 같지 않다는 설정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정신과 기억이 있어도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거나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지 않는 인간, 즉 인격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고 나니 어릴 때 어른들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사람 人 자 여섯 개, ‘인간이 다 인간이라고 인간이냐 인간이 인간다워야 인간이지’라는 말. 이렇게 간단하지만 뜻 깊은 말을 옛 어른들은 하곤 했는데 이 말에 의하면 영화는 누가 과연 인간인지, 인간의 본질에 가까운지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이 우리 사회를 성찰하고 돌아보게 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갈지 의문이다.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이 이 사회에는 너무 많다. <블레이드 러너>의 데커드가 행하던 것처럼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을 제거해야 하는 건 아닐지…
개인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