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소설, 「몽고반점(채식주의자」정신분석적 연구

라캉의 욕망이론을 중심으로 에로티시즘과 상관관계 연구

by 방정민

Ⅰ. 들어가며

소설 「몽고반점(채식주의자)」에 대해 당시 심사위원들 중 김성곤은 “원초적 순수성을 추구한 예술가 소설”이라고 평했으며, 김채원은 “진부한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원시의 생명감을 찾는 구원의 몸짓으로 감동을 자아내는 역작”이라고까지 했다. 이처럼 「몽고반점」은 탄탄한 줄거리와 예사롭지 않은 문체로 인간의 근원적 성적 욕망과 예술혼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게 성적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이자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소설 「몽고반점」은 이런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예술혼으로 승화시키고 있는데, 그 방법이 금기시된 사회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며 다분히 정신분열적이며 환상적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들도 결핍에 따른 욕망 가득한 캐릭터들로서, 그 욕망을 성적으로 해결한다. 이 지점에서 라캉의 욕망이론과 문학의 영원한 소재인 에로티시즘의 교차가 생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라캉의 욕망이론과 에로티시즘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몽고반점』의 미의식을 연구하고자 한다.

작가가 의도했건 안 했던 훌륭한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산적이고 다양한 논쟁거리를 던져준다. 이런 점에서「몽고반점」은 위와 같은 다양한 주제를 던지고 있으면서도 각 소재와 주제를 이어가는 작가의 서술(이야기) 능력이 탁월해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고반점」은 발표된 지 9년이 지났으나, 아직 이 작품과 관련된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없는 편이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 약간의 학위논문이 나오고 있고 「채식주의자」와 관련하여 학술지 논문이 있다. 학위논문으로 김선영은 「몽고반점」에 대한 연구보다 작품해설에 그치고 있을 뿐이며, 강연옥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이론을 중심으로 「몽고반점」의 미의식을 논하고 있다. 소재 몽고반점을 아직 영토화되지 않은 순수한 대지의 상태로 규정하며, 소설은 현실의 윤리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기존의 영토로부터 탈영토화를 지향한다고 평가한다. 내용의 정합성을 차치하고서 최초의 비평다운 논문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장명훈은 한강의 작품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내 여자의 열매」를 대상으로 연구하여 이 작품들이 자본주의 논리에 예속되지 않는 탈주의 방식과 지향점을 모색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박은진은 「몽고반점」을 김동인의 「광화사」, 이청준의 「서편제」의 계보를 잇는 예술가 소설로 평하고 있다. 학술지 논문으로 정미숙은 라캉의 이론과 다양한 정신분석의 방법으로 「몽고반점」을 분석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욕망을 탐색하려다 실패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반면 라캉에 대한 논문은 철학분야에서 무수히 많이 다루고 있으므로 이 지면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성적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다. 그러나 문명, 특히 근대 이후 이성중심의 문화는 몸과 성적 욕망을 억압해왔다. 문화적 엄숙주의가 근대를, 인간을 억압해 온 것이다. 이로 인해 인간(특히 근대인)은 모두 정신적인 문제를 조금씩 안고 있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기본 적 생각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라캉의 욕망이론과 에로티시즘의 상관관계의 연구를 통해 『몽고반점』에 나타난 인간의 근원적 욕망, 그 기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라캉의 욕망이론과 에로티시즘의 상관관계 고찰

1. 라캉의 욕망이론에 대한 이론적 고찰

자크 라캉(Jaques Lacan)의 이론적 근간은 욕망이론이다. 라캉은 욕망(desire)과 욕구(need), 요구(demand)를 구별한다. 욕구는 순수한 육체적 생존을 위해 충족되어야 할 생물학적 필요성으로 생물학적 본능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인간은 욕구의 차원을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요구의 차원으로 받아들인다. 요구라는 것은 타자가 개입되면서 욕망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욕망은 인간의 개인적인 신체나 감정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형성된다. 그런데 이 욕망은 결핍에 의해 생성되므로 욕망은 근원적인 결핍을 메우려는 노력이다. 결론적으로 욕망의 본질적인 요점은 주체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것이라는 데 있다. 즉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자신을 타자의 욕망의 미끼로서 제공하기를 원한다. 인간은 타자의 성적 욕망이 되기를 원하며 또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때로는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또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 속에서 형성된다. 인간의 욕망은 빈 공간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타자는 부모이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욕망은 부모의 욕망 속에서 형성된다.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욕망하는지, 아이에게 무엇을 욕망하는지가 바로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렇듯 욕망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의 완벽한 충족은 이루어질 수 없다. 사실상 영원히 채워질 수 없다. 욕망의 타자성은 달리 말하면 요구와 욕구의 불일치로 인해 생기는 결여의 체험에서 생겨난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타자의 질문에 주체는 결국 대답할 수 없고 히스테리적 질문으로 되묻는다. ‘왜 나는 당신이 나라고 말하는 그것이 되는 것일까?’ 이런 과정은 대상의 간극을 열어놓는다. 환상은 이때 작용한다. 타자의 욕망의 공백을 채우는 상상적인 시나리오가 바로 환상인데, ‘타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절박한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써 기능한다. 타자의 타자, 즉 대타자는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회피하게 해주며 이 세계의 맹목성, 우연성에 대해 눈감게 해준다. 만약, 타자 속의 공백, 결여가 부재한다면 타자는 완전한 폐쇄적 체계를 이룰 것이며 주체는 타자로부터 완전히 소외될 것이다. 주체가 소외를 피할 수 있고 동일시를 꾀할 수 있는 것은 이런 타자 내의 결여 때문이다. 주체는 타자의 결여와 자신의 결여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환상은 주체를 고통스럽고 불안하게 하는 심리적 외상, 실재, 타자의 주이상스(jouissance), 가늠할 수 없는 욕망 등을 받아들일 만한 것을 변화시키려는 방어수단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환상이라는 공간은 에로티시즘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공간이다. 라캉의 욕망이론 안에서 에로티시즘이란 욕망과 교차되는 과정에서 욕망이 넘쳐 밖으로 나오는 결과적인 에너지이다. 넘쳐 나온 욕망은 개인의 환상이라는 필터를 거쳐 상징계 밖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주이상스의 체험으로 가장 긍정적인 에너지원으로서 에로티시즘을 발화한다. 이 지점에서 라캉의 욕망이론의 핵심인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 알아보자.


상상계의 기초는 거울 단계에서 자아가 거울에 비친 영상이나 또는 유사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동일시는 상상계의 중요한 특징이 되고, 상상계는 동일시의 모형이 된다. 상상계는 인간 주체성과 동물행동학이 만나는 근접한 지점을 나타내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상상계는 상징계에 의해 구조화되기 때문이다. 동물과 인간이 상상계를 공유하고 있지만, 인간 존재에게 상상계는 동물에게 그러하듯 자연적인 상상계가 아닌 상징계에 의해 왜곡된 것이다. 동물에게 없는 언어가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징계는 언어의 습득으로 특징된다. 이 상징계는 ‘기표의 영역’으로 근본적으로 타자성을 경험하게 된다. 문화의 영역인 상징계에선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적 동일시가 깨어지고 아버지가 개입한다. 아버지는 상상적 동일시를 깨는 근원적인 타자성의 영역, 즉 상징계를 대변하는 존재이다. 아버지는 법과 금지의 명령이며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하는 아이의 욕망을 거세시킨다. 이것은 은유와 치환의 이미지로 기표화 되어 나타나는데 이 과정에서 ‘대상 a’가 부상한다. ‘대상 a’는 욕망의 원인이자 상징계의 욕망구조를 파괴하는 실재이며 주이상스의 영역에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욕망을 불러일으킨 ‘대상 a’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경험하는 것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고통과 불쾌이며 극단적인 경우 죽음충동으로 이어진다.


실재계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무엇으로 정의된다. 불가능한 것으로 현실의 사회적-상징적 네트워크 속에 포함되지 않은 잉여다. 언어와 기표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상징계의 그물망이 포착하지 못하는 언어 이외의 것, 불가능한 것,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실재계다. 실재계는 상징계의 구멍이며, 구멍이 판타지로 치장했을 때 욕망의 미끼, 즉 대상 a가 된다고 한다. 아울러 실재계는 쾌락의 원칙너머에 있는 반복적 강박의 동인이며 존재를 드러낼 뿐 포착되지 않는다. 실재는 상상과 상징계를 연결하는 제 3의 고리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공백이지만 그 비어 있음으로 인해 순환과 반복을 가능케 한다. 판타지의 주체를 만들고 주체의 얼룩이자 타자로 작용한다.


2. 몸, 욕망과 관련된 에로티시즘의 의미


에로티시즘(Erotisism)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에로스이다. 에로스는 남녀 간 사랑의 결과이며, 그 속성은 가득찬 것 같으면서도 항상 갈구하는 이중성을 지녔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로스는 육체적인 욕망의 갈구인 동시에 더욱 완전한 것을 지향하는 정신적인 갈구로 발전하며, 이런 갈구는 속성상 항상 만족과 불만족, 지향과 좌절, 생의 애착과 죽음에의 동경과 같은 이중성으로 드러난다.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자율적인 전개행위를 통하여 내재적 완성에 도달하려는 예술활동으로 드러나는데, ‘감각, 지각, 육체적 쾌락의 의식적 개발로서 성애로부터 출발한 강한 생의 충동’으로까지 의미가 확대되게 된다.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후 에로티시즘은 육체적 성애의 성격이 강해졌다.


이러한 에로티시즘은 현대와 와서, 조르쥬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에 의해 자아 발전의 원동력과 감각적인 성적 쾌락의 조화라는 현대적 의미로 해석되게 되었다. 성적 본능 안에는 어떤 형태로든 정신적인 것이 투사되어 있기 마련인데, 에로스는 정신적 계기로서의 육체적 본능일 수도 있고, 육체적 본능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적 차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에로스는 정신적인 차원과 육체적인 차원이 상호교차하는 과정 속에서만 그 독자적 의미영역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자아의 완성을 이루려는 의식에서 출발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모태회귀를 상징한다. 모태회귀는 육체성 회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아 상실감을 느끼고 태어난다. 그런데 에로티시즘에서 자아 상실을 고지하는 곳은 몸이다. 인간이 모태와 분리되는 순간 느끼는 자아 상실감은 몸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따라서 몸은 자아 상실을 고지하는 상징적 자리가 된다. 몸의 욕망은 성적 욕망으로 표출되어 나오기 때문에 에로티시즘에서 타자와의 성적 결합은 상실한 육체성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에로티시즘은 몸을 그 의미 지평으로 삼고 있으며 몸은 에로티시즘의 해석적 토대인 자아와 타자, 그리고 욕망을 한데 응축하고 있는 상징적 장소가 된다.


에로티시즘에서 몸이 중요한 의미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에서 자아 인식의 자리는 몸이다. 따라서 에로티시즘에서 몸은 욕망의 요체가 된다. 그런데 몸이 욕망의 대상이 될 때, 그 몸은 타자를 함축하게 된다. 그래서 몸에 대한 욕망은 타자에 대한 욕망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결국 에로티시즘은 몸에 대한 욕망의 타자화로 인해 그 빛을 더욱 발하는 것이다.

일상의 좌절은 에로스를 상승시키는 주원인이 된다. 즉 자기가 단념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내적 욕망, 즉 에로스적 대상의 가능성을 자기 환상 속에서 되찾고자 하는 심성 속에서 확립되는 것이 에로티시즘인 것이다. 거세의 지표를 강하게 지니는 현실 앞에서 인간은 생래적으로 에로틱한 대상을 촉구하게 된다. 이처럼 에로티시즘은 타자를 자아의 일부분으로 흡수 동화하려는 욕망을 작동시키는 인간의 내적 의식이다. 즉 타자를 통한 자아 회복의 욕망이 몸을 매개로 하여 성립되는 정신이다. 다시 말해 에로티시즘은 욕망하는 몸인 동시에, 자기애로 인해 끊임없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애정 충동의 축으로 자기 자신에 의해 욕망되는 몸을 인식하는 정신이자 에너지이다.


라캉에게 사랑(에로티시즘)이란 즐거움과 쾌락이 있는 기표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이다. 사랑이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결여에 근거하고 결여를 해석하려는 과정이다. 라캉의 사랑은 생물학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경계에 있다. 여기에서 섹스의 기표가 사랑의 기표와 의미의 연결고리를 가진다. 왜냐하면 사랑을 하는 주체는 단지 언어의 효과로서의 주체가 아닌 존재로서의 주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존재로서의 주체는 욕동의 주체이다. 욕동은 섹스의 기표와 관련이 있다. 즉 사랑과 섹스는 주이상스의 공간을 사이에 두고 그 경계를 넘나들며 에로틱한 에너지의 발화점인 기표로서 존재한다.


Ⅲ. 「몽고반점」에 나타난 미의식 양상


1. 「몽고반점」에 나타난 환상적 욕망 - 상상계

라캉에게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욕망인 것이다. 욕망의 타자성은 결여에서 비롯된다. 요구와 욕구의 불일치로 인한 결여는 근원적이라 그 어떤 것으로도 성취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즉 타자의 욕망은 욕망주체의 향유를 경험하게 하는데, 이 과정은 환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환상은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기는 무의식적 본능이다. 오직 ‘대상(오브제 쁘띠) a’로 나타나는데, 결국 ‘대상 a’에 대한 욕망인 셈이다. 그런데 이 욕망은 상상계에 존재하면서 항상 거세의 위험(또는 윤리적 심판)을 받으며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강렬하여 도저히 멈출 수 없다. 그래서 쾌락을 넘어선 죽음의 본능에 서 있다.

『몽고반점』은 바로 상상계의 환상적 욕망을 몸과 꽃으로 치환하여 보여준다. 처제는 채식주의자로 상징계의 질서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버지와 언니 등 가족으로부터 외면 받는다. 그녀의 욕망은 오로지 상상계에 있는 환상적 욕망이다. 식물성으로 상징화되는 그녀의 욕망은 원시성의 순수함에 대한 욕망이다. 동물적이고 이성적이며 문화적인 이 세계에서 이룰 수 없는 근원적 욕망인데, 처제에 대한 서술과 그녀의 행동에서 잘 나타난다.


퇴화된, 모든 사람에게서 사라진, 오로지 어린아이들의 엉덩이와 등만을 덮고 있는 반점.(24면) ~(중략)~ 이제는, 그녀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 곡식과 나물과 날 야채만 먹는다는 것마저 그 푸른 꽃잎 같은 반점의 이미지만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어울리게 느껴졌으며(25면) ~(중략)~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35면)

처제의 환상적 욕망은 몸과 꽃이라는 대상을 통해 획득되는데, 바로 몸에 꽃을 그리는 것이다. 몸은 이성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문명이후 터부시되었다. 이성(문화)에 의해 지배되고 억압받아야 했다. 이런 견고한 현실에서 탈주가 가능한 유일한 매개가 바로 몸이다. 그것도 원형적 순수를 지향하는 식물이 내재된 몸을 통해 이 세계의 탈주를 시도한다. 그러나 처제의 몸은 식물성이 내재된 몸으로 현실세계(상징계)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럴수록 그녀의 욕망은 환상을 통해 더욱 강렬해진다. 문제는 그녀의 욕망이 그녀의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상상계에서의 욕망은 바로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타자는 바로 형부다. 꽃이 페인팅된 처제의 몸에 대한 형부의 욕망으로 치환된다. 결국 처제의 욕망은 형부의 욕망인 셈인데, 이 모든 욕망의 근원은 꽃이 페인팅 된 몸이라는 ‘대상 a’일 뿐이다. 어쩌면 ‘대상 a’ 가 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상상계에서의 인간의 욕망은 근원적이고 강렬하다. 처제와 형부의 근친상간이라는 소재는 바로 페인팅된 몸에 대한 욕망으로 드러나는데, 즉 라캉식으로 말하면 상상계에서의 환상적 욕망인 셈이다.



“이걸 내 혀로 옮겨 왔으면 좋겠어.”

“...... 뭘요?”

“이 몽고반점.”

......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손으로 반점을 어루만졌다. 낙인 같은 이 점을 나눠 갖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널 삼켜서, 녹여서, 내 혈관 속을 흐르게 하고 싶다.

그는 처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성적 욕망에도 탐닉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처제의 몽고반점이 지니고 있는 순수한 생명력이었다. 섹스를 나누고 난 후 검푸른 새벽빛 속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말 속에는 그러한 그의 열망이 깊이 배어 있다.

그녀는 베란다 난간 너머로 반짝이는 황금빛 젖가슴을 내밀고, 주황빛 꽃잎이 분분히 박힌 가랑이를 활짝 벌렸다. 흡사 햇빛이나 바람과 교접하려는 것 같았다.



식물이 되기를 바라는 처제(영혜)에게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하여 고기를 먹게 하는 아버지와 동생을 이해 못하여 정신병원에 보내는 언니는 이성 중심주의와 합리주의에 해당하는 권력으로서 이들의 강압성은 지배담론의 권력행사이다. 권력을 행사해서라도 그녀의 광기를 제거하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권력이 행해지는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식물을 꿈꾸고 식물이 된 것 같은 환상에 빠져있는 것이다.

인간의 환상적 욕망은 상상계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을 어겨서 상징계로 진입하는 순간 제지당하고 심판 당한다. 그러면서 정신병이 생기고 신경증을 앓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병은 상상계를 잘 들여다봐야 치유할 수 있다. 정신적 치유는 상상계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처제는 형부와 자신의 몸에 꽃을 페인팅하고 섹스 한 후 시체가 나오는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상징계에서는 결코 용납되지 않지만 그 용납되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꿈꾸면서 치유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상상계에서의 환상적 욕망을 통해 현 사회의 문제점, 인간정신병의 근원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2. 「몽고반점」에 나타난 금기시된 예술적 욕망 - 상징계

「몽고반점」은 한 비디오 아티스트가 처제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에 매혹되어 예술적 영감을 얻은 후 예술혼을 불태우고 싶은 욕구에 시달려 결국 처제와 근친상간을 하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욕망을 추구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예술적, 남성적 생명력을 잃어버린 중년의 비디오 아티스트인 그는 20세가 넘도록 몽고반점을 가지고 있는 처제에 대한 강렬한 예술적, 성적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자신의 위험한 욕망 때문에 가정은 물론 자신이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위기감에 시달리면서도 그 욕망의 종국을 향해 무섭게 달려간다.

그의 선택으로 인한 발걸음 한 번에 그가 이뤄온 모든 것을, 가정마저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경험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많은 것들이 그의 안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인가 또는 제법 도덕적인 인간인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강한 인간인가.


퇴화된 모든 사람(문명인)에게는 사라지고, 어린 아이들 몸에만 있는 몽고반점은 태고의 순수성, 원시성을 상징한다. 황폐한 일상을 폭력으로 느끼며 그 삶을 견딜 수 없어하던 주인공에게 처제의 몽고반점은 그러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구원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는 식물성의 세계를 지닌 처제의 몸에 꽃을 그려 넣고 몽고반점을 중심으로 암술과 수술이 교합하는 장면을 비디오 아트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은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순수의 세계, 애초에 지니고 있던 야생성, 원시성의 세계를 나타내고자 하는 예술적 욕망, 곧 욕동인 것이다. 그는 이 욕동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욕동은 스스로 제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계를 넘어선 욕동, 즉 예술적 행위는 반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고 상징계적 법의 질서에서 단죄된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은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것을 ~(중략)~ 자주와 빨강의 반쯤 열린 꽃봉오리들이 어깨와 등으로 흐드러지고, 가느다란 줄기들은 옆구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오른쪽 엉덩이의 둔덕에 이르러 자줏빛 꽃은 만개해, 샛노란 암술을 도톰하게 내밀었다.


그의 예술적 욕망은 벌거벗은 처제의 몸에 꽃을 그리고, 그것을 영상화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진정으로 실현하고 싶었던 또 다른 이미지를 찾아 더 나아간다. 진공 공간 같은 침묵 속에서 몸에 꽃을 그린 한 남녀가 교합하는 장면을 실현할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그 최고의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처제와 섹스를 하기에 이른다. 처제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망과 예술적 욕망에 휩싸인 그는 그 욕망을 다스릴 수 없었다. 드디어 자신의 온 몸에 꽃을 그리고 처제와 예술적 향연을 펼치며 섹스를 하면서 그토록 원했던 장면을 완성한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꿈꿔왔던 그대로였다. 그녀의 몽고반점 위로 그의 붉은 꽃이 닫혔다 열리는 동작이 반복되었고, 그의 성기는 거대한 꽃술처럼 그녀의 몸속을 드나들었다. 그는 전율했다.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물들이고 배와 허벅지까지 흠뻑 적시는 끈끈한 풀물의 푸른빛을 보았다. ~(중략)~ 영원히, 이 모든 것이 영원히… 라고 그가 견딜 수 없는 만족감으로 몸을 떨었을 때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도덕적 원리와 미적 열망, 현실과 예술 사이의 경계를 넘어섰을 때, 그가 그토록 갈망하고 꿈꿔왔던 미적 이미지가 실현되었다. 비디오 아티스트가 추구하고자 했던 예술적 욕망의 행위는 분명한 금기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 근대화에 내제된 파괴성과 폭력성이 만연한 현실 세계는 태고의 순수성과 생명력을 지닌 식물성의 세계를 상징하는 예술가가 지닌 예술 세계의 치유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상상계적 욕망은 상징계에선 허용될 수 없다. 심판당하고 처벌당한다. 상상계가 문명 이전의 자연의 영역이라면 상징계는 문화의 영역이다. 여기에서는 근친상간적 동일시가 깨어지고 아버지가 개입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법과 금지의 명령이며 타자(원래는 어머니, 이 소설에서는 형부라 할 수 있다)의 욕망을 욕망하는 아이(처제)의 욕망-주이상스-을 거세시킨다. 소설에서 거세는 언니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 거세는 상징화, 사회화 과정이자 문명의 과정, 문화의 과정이다. 언니는 동생(처제)과 남편(형부)을 정신병동에 보내는 것으로 그들을 단죄한다. 상징계의 법적 질서, 힘을 보여준다.

남편과 동생의 정사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본 아내가 그를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것은 탐미주의적 예술과 이미지의 세계- 상상계적 세계 -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세계에서는 모든 비관습적인 행위들과 일탈은 격리되고 처벌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상실한 아름다움과 순수함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진부한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원시의 생명력을 갈구하는 예술가를 통해 삶에 대한 진정한 구원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열망과 생명력에 대한 열망이 아무리 순수했다고 해도, 그가 자신의 처제와 근친상간을 하고 그것을 비디오로 담은 사실은 우리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금기사항이다. 아무리 예술가의 예술적 욕망이라 해도 우리 사회는 사회 나름의 법과 제도, 윤리를 어겼을 때 그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여기서 예술가의 욕망과 사회제도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나 사회적 금기의 벽을 넘은 두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주인공 그가 사회의 금기사항조차도 넘어서려고 한 것은 강한 예술적 욕망이었지만, 처제인 영혜에게는 처음부터 우리 사회의 윤리나 도덕 같은 것은 없었다. 자신의 본능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부인 그를 자신의 몸속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즉 주인공 그는 자신의 도덕적, 윤리적 경계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참을 수 없는 예술적 욕망을 쫓아 자신의 의지로 그 경계를 넘었지만, 처제인 영혜에게 있어 경계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라캉의 욕망이론으로 보자면, 형부의 예술적 욕망을 욕망이라 하고, 처제의 욕망을 욕동(drive)이라 할 수 있겠다. 눈여겨 볼 만 한 것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올 때 욕망은 욕동으로 변화되고 어느 순간 이 둘은 같은 연장선에 서 있게 된다는 것이다.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명제가 떠올려 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둘이 상징계로 넘어오는 과정에선 그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바로 법의 심판자 아버지(아내)의 거세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계의 표상 그의 아내는 이 둘을 정신병원에 집어넣는다. 사회의 윤리와 법을 실행하는 주체인 아내에 의해 예술가인 그는 예술적 욕망의 끝에 마주하게 된다. 아내에 의해 파렴치한으로 몰리고,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가 어떤 예술적 희열을 맛보았든, 어떤 생명적 에너지를 느꼈던지 간에 그가 도덕적 윤리적 금단의 경계를 넘는 순간, 그의 행동은 모두 이 사회(상징계)에서 용납될 수 없는 정신 나간 짓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병원에 전화한 아내에 의해 단호히 단죄된다. 예술과 욕망의 끝에 이르렀던 그는 이제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여, 현실의 가장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다.


3. 「몽고반점」에 나타난 욕망과 에로티시즘의 상관관계 - 실재계

라캉의 실재는 상징화 과정의 결과/효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또한 상징질서에 환원될 수 없는 외적 존재다. 따라서 상징계와 상상계 너머에 있는 것으로서 양자 모두의 한계로 설정된다. 언어와 기표에 의해 특징화 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실재계다. 상상계에서의 환상은 ‘오브제(대상) a’로 드러나고 이 욕망은 상징계적 질서에 의해 심판받는다. 이때 실재계는 상징계 내부의 잉여로 내재적인 적대로 기능한다. 따라서 실재계는 쾌락 원칙 너머에 있는 반복적 강박의 동인이며 존재를 드러낼 뿐 포착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아닌 공백이지만, 그 비어 있음으로 인해 순환과 반복을 가능케 한다. 이러 실재계의 특성으로 인해 인간의 (실재계적) 욕망은 항상 결여를 내포하고 있다. 아무리 채워도 충족되지 않는다. 결여란 욕망이 채우고자 하는 소망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욕망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항상 조심스럽게 틈새를 남겨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욕망은 실질적인 대상이 없는 것이다. 실질적 대상이 없기 때문에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 더 이상 욕망할 수 없게 되고 또 다른 욕망의 대상을 찾아 나서는 허무의 반복이 계속된다.


소설에서도 식물성의 원시성을 원하는 처제의 욕망과 일상의 폭력을 예술성으로 극복하려는 형부의 욕망이 뒤엉켜 무엇이 주체적 욕망이고 무엇이 타자의 욕망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욕망’이라는 라캉의 욕망이론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욕망이 근친상간적 욕망이라는 것이 더 문제적이다. 프로이트나 라캉의 욕망은 결국 근친상간적이다. 그 욕망이 가장 강렬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도 형부와 처제의 근친상간을 소재로 하고 있어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이 근친상간적 욕망이 몸을 매개로 에로티시즘을 발하고 있어 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학에서 몸은 엄마와 분리되는 순간 결핍을 인지하는 장소다. 이 결핍은 소설에서 몸에 꽃을 페인팅하는 것으로 충족하려 하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급기야 두 사람은 근친상간을 하게 된다. 욕망과 어울린 에로티시즘이 얼마나 강렬한지 잘 알 수 있다. 아니, (근친상간적)욕망은 에로티시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욕망은 그 어떤 것으로도 충족이 안 되는 결여를 안고 있기 때문에 처제는 몸을 완전 연소시키려 한다. 바로 식물이 되고자 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죽음충동에 빠진다. 결국 삶에 대한 강한 욕망이 에로스라면(이것이 문학적으로 에로티시즘이라 함), 이것은 죽음에 대한 욕망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정리하면, 라캉의 욕망은 곧 근친상간적 에로티시즘 - 삶의 충동인 에로스의 다른 이름이자 이것은 몸을 기표로 발화된다 - 이며 이것은 죽음충동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라캉의 욕망과 에로티시즘의 상관관계는 주로 꽃을 매개로 묘사(은유)되어 있다. 자아상실을 인지하는 몸에 꽃을 페인팅하고 근친상간적 욕망을 불태움으로써 강한 에로티시즘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처제와 형부 둘 다 자아상실을 경험하고 있다. 자아상실이 강하면 강할수록 타자의 몸을 욕망하는데, 소설에서는 그것이 몸에 페인팅된 꽃이나 식물을 매개로 근친상간적 욕망을 실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J의 성기를 중심으로 선혈 같은 진홍의 거대한 꽃을 거렸다. 마치 J의 음모가 검은 꽃받침처럼, 성기는 꽃술처럼 보이도록.(54면) ~(중략)~ 그녀의 몽고반점 위로 그의 붉은 꽃이 닫혔다 열리는 동작이 반복되었고, 그의 성기는 거대한 꽃술처럼 그녀의 몸속을 드나들었다. 그는 전율했다.(66면)



굉장히 관능적인 묘사임에 틀림없다. 실재계에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말해주는 듯하다. 라캉이 말하는 욕망이 결국 에로티시즘임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처제에 느끼는 욕망이 단순한 육체적 욕망이 아니라할지라도, 처제의 욕망이 섹스가 아니라 할지라도’ 라는 표현은 잉여(거짓)에 불과하다.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애초에 자신의 것이 아닌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에로티시즘도 결국 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이 지점에서 라캉의 욕망과 문학의 에로티시즘은 조우하게 된다. 타자가 주인인 셈이다. 또한 에로티시즘은 결여하고 있다는 것과 하나가 되려는 강한 성적 충동으로서 욕망과 연결되며 결여된 객체와 하나로 결합하려는 실현될 수 없는 반복 충동이어서 현실에서는 부정적 이미지로 표현된다. 결국 라캉의 욕망과 에로티시즘은 모두 타자를 필수로 한다. 이 두 개념은 죽음충동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라캉의 실재계에서의 욕망은 죽음충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문학적 의미의 에로티시즘도 결국 죽음충동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베란다 난간 너머로 반짝이는 황금빛 젖가슴을 내밀고, 주황빛 꽃잎이 분분히 박힌 가랑이를 활짝 벌렸다. 흡사 햇빛이나 바람과 교접하려는 것 같았다.


『몽고반점』의 연작 소설 『나무불꽃』에서는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중략)~ 내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어.”라는 말이 나온다. 결국 처제는 식물 되기를 바라고 있다. 현실세계에서의 죽음충동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에로티시즘의 다른 표현이고, 이것은 곧 삶에 대한 동경이자 죽음에 대한 열망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은 결국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욕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욕망은 궁극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결여를 안고 있는 모순적인 욕망으로 무(無)이다. 실재계에서의 욕망은 사물을 통해 생성되는데, 그 사물은 결국 무(nothing)이기 때문이다.

Ⅳ. 나오며


이상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작가 한강은 소설 「몽고반점」에서 한 인간의 유미적 추구를 통해 그 욕망의 종국을 그리고자 했다고 밝혔다. 작가의 말처럼 「몽고반점」은 성년이 넘어서까지 몽고반점을 지니고 있는 처제를 향해 도덕적, 윤리적으로 금지된 예술적, 성적 욕망을 품고, 결국 차가운 현실의 끝으로 치닫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처제에 대한 형부의 금기시된 욕망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예술과 삶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주제, 근친상간이라는 소재, 그리고 다소 환상적인 장면 등은 정신분석학적으로 연구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라캉의 욕망이론을 기본으로 삼아 이것이 문학적 의미의 에로티시즘과 어떤 상관성을 띠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럼으로써 『몽고반점』에 나타난 미의식을 고찰하였다.

『몽고반점』은 상상계의 환상적 욕망을 몸과 꽃으로 치환하여 보여준다. 처제는 채식주의자로 상징계의 질서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아버지와 언니 등 가족으로부터 외면 받는다. 그녀의 욕망은 오로지 상상계에 있는 환상적 욕망이다. 식물성으로 상징화되는 그녀의 욕망은 원시성의 순수함에 대한 욕망이다. 동물적이고 이성적이며 문화적인 이 세계에서 이룰 수 없는 근원적 욕망으로 처제의 환상적 욕망은 몸과 꽃이라는 대상을 통해 획득되는데, 바로 몸에 꽃을 그리는 것이다. 페인팅된 몸에 대한 욕망은 상상계에서의 환상적 욕망인 셈이다.

또한 「몽고반점」은 한 비디오 아티스트가 처제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에 매혹되어 예술적 영감을 얻은 후 예술혼을 불태우고 싶은 욕구에 시달려 결국 처제와 근친상간을 하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욕망을 추구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이런 상상계적 욕망은 상징계에선 허용될 수 없다. 심판당하고 처벌당한다. 상상계가 문명 이전의 자연의 영역이라면 상징계는 문화의 영역이다. 여기에서는 근친상간적 동일시가 깨어지고 아버지(언니)가 개입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법과 금지의 명령이며 타자(원래는 어머니, 여기서는 형부라 할 수 있다)의 욕망을 욕망하는 아이(처제)의 욕망-주이상스-을 거세시킨다. 언니가 둘을 정신병원에 보내는 장면이 그것이다.


소설에서 라캉의 욕망과 에로티시즘의 상관관계는 주로 꽃을 매개로 묘사(은유)되어 있다. 자아상실을 인지하는 몸에 꽃을 페인팅하고 근친상간적 욕망을 불태움으로써 강한 에로티시즘을 발하고 있다. 라캉의 욕망과 문학적 에로티시즘은 모두 타자의 개념을 필수로 하고 있으며 죽음충동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라캉의 실재계에서의 욕망은 죽음충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문학적 의미의 에로티시즘도 결국 죽음충동과 연관되어 있다. 결국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에로티시즘의 다른 표현이고, 이것은 곧 삶에 대한 동경이자 죽음에 대한 열망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은 결국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욕망하는 것인 셈이다. 이 욕망은 타자의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결여를 안고 있는 모순적인 욕망으로 무(無)이다. 바로 실재계에서의 욕망은 사물을 통해 생성되는데, 그 사물은 결국 무(nothing)이기 때문이다.

소설 『몽고반점』은 철학적 문제의식과 정신분석적인 접근 등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한 묘사도 뛰어날 뿐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를 남겨놓은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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