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욕망, 식물성과 에로티시즘의 상관관계 연구
한강 소설, 「몽고반점(채식주의자)」에 나타난 미의식 연구
-몸, 욕망, 식물성과 에로티시즘의 상관관계 연구-
Ⅰ. 서론
소설 「몽고반점」은 작가 한강이 쓴 중편 소설로, 문예 계간지인 『문학과 사회』의 2004년 가을호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창작과 비평』의 2004년 여름호에 실린 「채식주의자」의 연작 소설로, 한강은 「몽고반점」으로 2005년 제 29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소설가 한강은 1970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소장 작가이다. 그녀는 1993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가,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1995년에 ≪한국일보≫가 뽑은 우수소설가상을, 1999년 중편소설 「아기 부처」로 한국소설문학상을, 2000년에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2005년도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녀는 아버지 한승원의 뒤를 이어 이상문학상 수상자가 됨으로써 부녀가 나란히 동일한 문학상을 수상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분석 텍스트인 「몽고반점」은 파격적인 소재와 관능적인 성적 묘사를 통하여 절대미를 추구하는 한 장인의 모습을 정치하게 보여줌으로서, 전통적인 예술적 성담론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당시 심사위원들 중 김성곤은 “원초적 순수성을 추구한 예술가 소설”이라고 평했으며, 김채원은 “진부한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원시의 생명감을 찾는 구원의 몸짓으로 감동을 자아내는 역작”이라고까지 했다. 이처럼 「몽고반점」은 탄탄한 줄거리와 예사롭지 않은 문체로 인간의 근원적 성적 욕망과 예술혼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게 성적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이자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소설 「몽고반점」은 이런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예술혼으로 승화시키고 있으며, 여기에다 여성의 이미지인 꽃과 식물성을 연결시켜 다분히 페미니즘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식물성의 이미지는 기존의 페미니즘 소설에서 상징하는 유연성, 부드러움, 평화, 포용성, 반문명성 등의 여성 이미지만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의 식물 내지 꽃은 에로티시즘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성적 욕망과 예술혼을 연결시키는 매개체가 바로 식물이고 꽃이기 때문이다. 즉 여성성, 반문명성이라는 꽃의 이미지에서 탈피한 에로티시즘적인 꽃으로 변모되어 있다. 달리 말해 식물 내지 꽃의 이미지를 에로티시즘과 연결할 수 있는 것으로 식물성에서 성적 이미지를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가 의도했건 안 했던 훌륭한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산적이고 다양한 논쟁거리를 던져준다. 이런 점에서「몽고반점」은 위와 같은 다양한 주제를 던지고 있으면서도 각 소재와 주제를 이어가는 작가의 서술(이야기) 능력이 탁월해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고반점」은 발표된 지 5년이 지났으나, 아직 이 작품과 관련된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없는 편이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 약간의 학위논문이 나오고 있고 「채식주의자」와 관련하여 학술지 논문이 있다. 학위논문으로 김선영은 「몽고반점」에 대한 연구보다 작품해설에 그치고 있을 뿐이며, 강연옥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이론을 중심으로 「몽고반점」의 미의식을 논하고 있다. 소재 몽고반점을 아직 영토화되지 않은 순수한 대지의 상태로 규정하며, 소설은 현실의 윤리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기존의 영토로부터 탈영토화를 지향한다고 평가한다. 내용의 정합성을 차치하고서 최초의 비평다운 논문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장명훈은 한강의 작품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내 여자의 열매」를 대상으로 연구하여 이 작품들이 자본주의 논리에 예속되지 않는 탈주의 방식과 지향점을 모색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박은진은 「몽고반점」을 김동인의 「광화사」, 이청준의 「서편제」의 계보를 잇는 예술가 소설로 평하고 있다. 학술지 논문으로 정미숙은 라캉의 이론과 다양한 정신분석의 방법으로 「몽고반점」을 분석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욕망을 탐색하려다 실패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근대 이후 이성중심의 문화는 몸과 성적 욕망을 억압해왔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와 함께 몸과 성적 욕망을 긍정하는 담론이 이어져오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몽고반점」에 나타난 몸, 욕망, 에로티시즘과 관련된 미의식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재 몸, 욕망 담론은 광범위하게 그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는데, 본고에서는 「몽고반점」에 나타난 몸, 욕망, 식물성과 관련된 에로티시즘의 미의식을 연구할 것이다.
Ⅱ. 몸, 욕망, 식물성과 에로티시즘의 상관관계 고찰
1. 몸, 욕망과 관련된 에로티시즘의 의미
에로티시즘(Erotisism)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에로스이다. 에로스라는 말의 의미는 에로스신화에서 유래한다. 즉 Polos(풍요, 가득함)왕자와 Penia(결핍, 갈구)라는 여자 거지와의 사랑의 결과 태어난 아들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이 신화에서 에로스는 남녀 간 사랑의 결과이며, 그 속성은 가득찬 것 같으면서도 항상 갈구하는 이중성을 지녀 야누스 얼굴에 비유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로스는 육체적인 욕망의 갈구인 동시에 보다 완전한 것을 지향하는 정신적인 갈구로 발전하며, 동시에 이러한 갈구는 속성상 항상 만족과 불만족, 지향과 좌절, 생의 애착과 죽음에의 동경과 같은 이중성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적극적인 드러냄과 소극적인 은혜, 승화된 표현행동과 카오스적 질서 파괴 행위 등과 같은 이중성으로 표현된다.
에로티시즘은 에로스로서의 사랑을 행동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의식화하는 것이며, 때로는 사랑을 하나의 가치로서 주장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자율적인 전개행위를 통하여 내재적 완성에 도달하려는 예술활동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예술활동 자체는 감성적인 지적 작업의 가치를 가지며,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고상한 형태인 동시에 정신적이며, 그 배후에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감정과 신체 부분과 그리고 존재 방식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에 와서 에로티시즘은 ‘감각, 지각, 육체적 쾌락의 의식적 개발로서, 성애로부터 출발한 강한 생의 충동’으로까지 의미가 확대되게 된다.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후 에로티시즘은 육체적 성애의 성격이 강해졌다. 하지만 에로티시즘은 감각, 지각, 운동적 쾌락의 의식적 개발로서 성애로부터 출발하여 드디어 성을 초월해 세계의 존재에 깊이 관련하려는 지각 인식을 구조화하는 강한 생의 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에로티시즘은 현대와 와서, 조르쥬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에 의해 자아 발전의 원동력과 감각적인 성적 쾌락의 조화라는 현대적 의미로 해석되게 되었다. 즉 에로티시즘은 성에 대한 태도나 개념, 행동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성(性)이란 글자가 지니는 원래의 의미가 마음(心)과 몸(身)의 양면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면 에로티시즘은 바로 그와 같은 인간이 전성적(全性的)인 차원에서의 성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정신적인 양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성적 본능 안에는 어떤 형태로든 정신적인 것이 투사되어 있기 마련이다. 에로스는 정신적 계기로서의 육체적 본능일 수도 있고, 육체적 본능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적 차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에로스는 정신적인 차원과 육체적인 차원이 상호교차하는 과정 속에서만 그 독자적 의미영역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자아의 완성을 이루려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는 다양한 심리를 통해 설명되는데, 일반적으로 모태회귀를 상징한다. 모태회귀는 육체성 회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아 상실감을 느끼고 태어난다. 그런데 에로티시즘에서 자아 상실을 고지하는 곳은 몸이다. 인간이 모태와 분리되는 순간 느끼는 자아 상실감은 몸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따라서 몸은 자아 상실을 고지하는 상징적 자리가 된다. 몸의 욕망은 성적 욕망으로 표출되어 나오기 때문에 에로티시즘에서 타자와의 성적 결합은 상실한 육체성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에로티시즘은 몸을 그 의미 지평으로 삼고 있으며 몸은 에로티시즘의 해석적 토대인 자아와 타자, 그리고 욕망을 한데 응축하고 있는 상징적 장소가 된다.
에로티시즘에서 몸이 중요한 의미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성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에로티시즘에서 자아 인식의 자리는 몸이다. 따라서 자아 상실감은 몸의 결핍감을 유도하게 된다. 그것이 육체성 상실이다. 몸에 대한 결핍감은 몸을 욕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몸에 대한 욕망은 자아 상실과 회복, 육체성 상실과 회복, 생명 상실과 회복 등의 다층적인 의식들이 투사되어 있다.
욕망은 올바른 자기 인식을 전제로 한다. 자아 회복의 욕망에 그 토대를 두는 에로티시즘이 인식론적 충동에 뿌리를 두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따라서 에로티시즘에서 몸은 인식론의 주요한 자리이며 욕망의 대상이 된다. 몸은 비밀을 벗기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이며 원초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에서 몸은 욕망의 요체가 된다. 그런데 몸이 욕망의 대상이 될 때, 그 몸은 타자를 함축하게 된다. 그래서 몸에 대한 욕망은 타자에 대한 욕망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는 단순히 육체적 욕망의 대상임을 거부한다. 본질적으로 타자는 자아를 회복시켜 줄 심정적 대상으로 치환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타자를 통하여 자기의 낭만적 환상이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정신이 에로티시즘이다.
이처럼 일상의 좌절은 에로스를 상승시키는 주원인이 된다. 즉 자기가 단념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내적 욕망 즉 에로스적 대상의 가능성을 자기 환상 속에서 되찾고자 하는 심성 속에서 확립되는 것이 에로티시즘인 것이다. 거세의 지표를 강하게 지니는 현실 앞에서 인간은 생래적으로 에로틱한 대상을 촉구하게 된다. 이처럼 에로티시즘은 타자를 자아의 일부분으로 흡수 동화하려는 욕망을 작동시키는 인간의 내적 의식이다. 즉 타자를 통한 자아 회복의 욕망이 몸을 매개로 하여 성립되는 정신이다. 쉽게 요약하면 에로티시즘은 감동시키고 마음을 끄는 대상을 잡기 위해 언제든 달려들 태세를 갖춘 욕망하는 몸인 동시에, 자기애로 인해 끊임없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애정 충동의 축으로 자기 자신에 의해 욕망되는 몸을 인식하는 정신이자 에너지이다.
2. 식물성(꽃)의 성적 이미지와 이와 관련된 에로티시즘의 의미
유혹을 하기 위해 향기와 호르몬, 색깔, 미각 그리고 성(性)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식물이다. 이런 행위가 점차 곤충에게, 새에게, 결국 호모 사피엔스에게까지 퍼진 것이다. 식물은 우리에게 다양한 유혹의 손길을 뻗는다. 산소를 배출하고, 탄소, 석유, 더 나아가 먹잇감과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낸다. 식물은 꽃받침 조각, 다채로운 꽃잎의 화관, 암술 위에 올라앉은 씨방, 화분을 담은 수술 등 유혹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경이로운 생물체다. 여기에 꿀이 흐르는 샘과 향기롭고 달콤한 분비물이 가세하여 기적적인 존재를 더욱 충만하게 만든다. 곤충과 인간이 이런 유혹의 결정체를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식물이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곤충을 유혹(식물도 동물과 성적인 관계를 하고 있음을 상징)하듯 남자는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흔히 꽃을 여자에게 선물한다. 즉 유혹은 에로티시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여성과의 성적 합일을 위해서 여성을 유혹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생명의 탄생을 위한 행위, 즉 생의 연속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에로스다. 따라서 유혹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식물(속씨식물)은 근원적으로 에로티시즘과 깊은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꽃은 일반적으로 아름다움의 상징이자 여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꽃은 생물학적으로 생식기이며 생명이 시작되는 곳이다. 따라서 꽃은 문학에서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하며 자연의 생명력에 순응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는 꽃이 시각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자연의 법칙 안에 존재하며 인간처럼 생명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착안된 것으로 보인다. 즉 여성이 성기라는 장소를 통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과 같이 자연의 일부인 꽃이 화려하게 피어난 뒤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켜 그 종을 유지시키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꽃의 안은 여성의 자궁을 연상시키고 겉형태는 여성스러운 유선형과 볼륨감 있는 잎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여성의 신체라인과 성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만족시켜 주는 형태이다. 또한 생식을 위해 매개동물을 유인하여야 하는 특징상 갖가지 화려한 색을 가지고 있다는 점, 즉 식물(꽃)에서에서 보이는 형태, 구조, 색상은 에로티시즘의 메타포가 되는 것이다.
꽃은 예술작품 속에서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여성의 성기로 상징되기도 한다. 꽃을 신비로운 내부 공간, 때로는 위험하고 때로는 유혹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향한 문화적 태도로 이미저리하기도 한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며, 자신을 복제하고 퍼뜨리기 위해 의미화 하는데, 이 과정을 식물의 거대한 욕망이 진행되는 과정으로 볼 때, 이것은 곧 여성의 성기관이 가지는 잉태와 생산성, 생명의 근원 등의 상징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파생되는 비밀스럽고 은밀한, 부드럽지만 근원을 알 수 없는 힘 등의 성적인 요소는 본능에 의한 것이 되며 이렇듯 본능에 의해 끌리는 힘은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의 힘 중 하나일 것이다.
Ⅲ. 「몽고반점」에 나타난 미의식 양상
1. 「몽고반점」에 나타난 식물성을 꿈꾸는 몸
몸이 세계에 대한 무한한 해석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할 때, ‘지금 여기’에 가장 이슈가 되는 것 중의 하나는 몸과 일상의 문제이다. 그동안 일상은 사소함과 무의미함으로 인해 주변으로 밀려났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이유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상이 주는 사소함과 무의미함이란 밤, 어둠, 무의식, 죽음, 위협 등과 낮, 밝음, 의식, 삶, 안전 등 일련의 서로 다른 양태들이 끊임없이 상호 침투 교섭되면서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서로 다른 양태들의 상호침투는 쉽게 깨뜨릴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푸코는 광기가 자명하게 드러나는 행위적 또는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ㆍ문화적 실천들의 산물이라 했다. 특정한 시대에 주어진 문화의 필요와 요구 또는 그 시대의 특정 상황과 관련지어 자체의 존재 영역과 자격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푸코는 광기가 언제나 그 자체로서가 아닌, 단지 ‘이성이 아닌 어떤 것’으로서 규정되어 온 사실에 주목한다. 각 시대에 따라 ‘이성적인 것’이 어떤 것으로 규정되느냐에 따라 광기는 ‘이성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규정되어 왔다는 것이다. 푸코의 관점에서 보면, 소설 속 처제는 당시의 질서 속에서 정상인으로 분류되지 않은 사람, 광인이다. 처제의 친정 식구들, 특히 언니는 당시의 질서 규범을 대변하고 법과 윤리를 집행하는 인물이다.
「몽고반점」에서 두 사람이 윤리를 잊고 치달아가는 광기의 세계는 우리가 애초에 지니고 있었던 야생성, 원시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자본으로 훈련되고 잘 다듬어진 몸에서 벗어난 순수한 원형의 아름다움을 가진 몸을 탐미적으로 묘사함으로서, 시원(始原)을 향한 탈주와 회귀 욕망을 형상화시킨다. 그가 욕망한 것은 더 고요한 것, 은밀한 것, 더 매혹적이며 깊은 것이었으나 언제나 그의 일상은 환멸로서 되돌아온다. 그러던 중 주인공인 그는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내에게서 듣고 전율을 경험한다. 처제의 육체에 남아있는 몽고반점을 욕망하는 그에게 원초적 순수로 회귀하고자 하는 예술적 탐미의식이 발현되고, 이것은 처제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식물성의 몸’에서 예술적 행위로 승화된다.
퇴화된, 모든 사람에게서 사라진, 오로지 어린아이들의 엉덩이와 등만을 덮고 있는 반점.(24면) ~중략~ 이제는, 그녀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 곡식과 나물과 날 야채만 먹는다는 것마저 그 푸른 꽃잎 같은 반점의 이미지만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어울리게 느껴졌으며(25면) ~중략~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35면)
작가는 처제(영혜)의 실존이 점차 희미해지는 것을 식물성이 내재된 몸으로 새로이 발아시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예속된 영역을 벗어나려는 해법을 탐미와 관능의 미학으로 찾고 있다. 처제는 ‘식물성이 내제된 몸’을 가지고 있고 현실 세계에서 탈주가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다. 탈주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탈주를 욕망하는 주체는 무기력함을 보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견고한 현실에서 새로운 방식의 탈주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매개가 ‘몸’이었고, 원형적 순수를 지향하는 ‘몸’이 식물을 꿈꾸고 있다.
작가 한강이 「몽고반점」에서 약육강식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냉혹한 현실 사회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평화로운 식물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 식물의 세계를 나타내는 가장 뚜렷한 상징 중 하나가 바로 어른이 된 처제의 몸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이다. 갓난아이의 엉덩이에만 남아 있는 푸른 꽃인 몽고반점, 어른이 되어 힘겨운 현실에 적응해 가면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이 몽고반점은 태곳적의 순수한 생명력과 평화로운 식물성의 흔적이며 상징이다. 하지만 작가 한강이 주장하는 식물의 세계는 우리가 흔히 식물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수동적이고 유약한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주인공인 그가 처제와 J의 몸에 그리는 화려하고 관능적인 꽃에서 느껴지듯, 암술과 수술이 서로 수분을 하고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는 힘차고 열정적인 생명의 세계인 것이다.
“이걸 내 혀로 옮겨 왔으면 좋겠어.”
“...... 뭘요?”
“이 몽고반점.”
......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손으로 반점을 어루만졌다. 낙인 같은 이 점을 나눠 갖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널 삼켜서, 녹여서, 내 혈관 속을 흐르게 하고 싶다.
그는 처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성적 욕망에도 탐닉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처제의 몽고반점이 지니고 있는 순수한 생명력이었다. 섹스를 나누고 난 후 검푸른 새벽빛 속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말 속에는 그러한 그의 열망이 깊이 배어 있다.
그녀는 베란다 난간 너머로 반짝이는 황금빛 젖가슴을 내밀고, 주황빛 꽃잎이 분분히 박힌 가랑이를 활짝 벌렸다. 흡사 햇빛이나 바람과 교접하려는 것 같았다. 가까워진 앰뷸런스의 사이렌, 터져 나오는 비명과 탄성, 아이들의 고함, 골목 앞으로 모여드는 웅성거리는 소리들을 그는 들었다. 여러 개의 급한 발소리들이 층계를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식물이 되기를 바라는 처제(영혜)에게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하여 고기를 먹게 하는 아버지와 동생을 이해 못하여 정신병원에 보내는 언니는 이성 중심주의와 합리주의에 해당하는 권력으로서 이들의 강압성은 지배담론의 권력행사이다. 권력을 행사해서라도 그녀의 광기를 제거하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권력이 행해지는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식물을 꿈꾸고 식물이 된 것 같은 환상에 빠져있는 것이다.
한강의 소설은 유토피아적 환상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곳과는 명백하게 유리된 현실의 영역을 강하게 대비시켜 나타내면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새로운 리얼리티적 전망을 획득하게 한다. 따라서 「몽고반점」을 비롯한 한강 소설에서 탈주화된 몸은 개인적인 차원의 욕망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현실과 환상성이 공존하는 새로운 리얼리즘의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이다. 여기서 주요 논의될 문제는 ‘몸’이다. 새로운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환성성의 매개가 왜 ‘몸’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식물성의 이미지는 반식물성의 이미지와 대치 상황을 이루고 있다. 동물성의 세계는 식물성의 세계를 잠식하지만, 식물성의 세계는 동물성의 세계를 위해하지 않고 자연의 운용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생명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러한 생명의 에너지는 한 개인의 시공간적 영역을 넘어서 우주의 시공간과 소통을 이루며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생명력을 확장시킨다. 작품에서 이러한 생명 에너지의 매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몸’이다. 몸은 특정 시대 사회 구조의 논리에 예속되고 지배되면서도 이성의 사유방식과는 달리 본능에 충실하며, 몸이 보유하고 있는 자체의 생명력까지 의식화되지는 않는다. 시원의 영역으로 회귀할 수 있는 힘은 인간의 지배담론에 길들여진 사유가 거세된 몸 자체에서 발생한다. 「몽고반점」에서 식물성의 담론이 ‘몸’에 귀착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에서 처제의 식물화된 몸의 탈주는 개별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른다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탈신과 탈주의 욕망은 새로운 리얼리즘을 실현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여 생명 실체를 구현하고자 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2. 「몽고반점」에 나타난 금기시된 예술적 욕망
「몽고반점」은 한 비디오 아티스트가 처제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에 매혹되어 예술적 영감을 얻은 후 예술혼을 불태우고 싶은 욕구에 시달려 결국 처제와 근친상간을 하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욕망을 추구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예술적, 남성적 생명력을 잃어버린 중년의 비디오 아티스트인 그는 20세가 넘도록 몽고반점을 가지고 있는 처제에 대한 강렬한 예술적, 성적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자신의 위험한 욕망 때문에 가정은 물론 자신이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위기감에 시달리면서도 그 욕망의 종국을 향해 무섭게 달려간다.
그의 선택으로 인한 발걸음 한 번에 그가 이뤄온 모든 것을, 가정마저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경험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많은 것들이 그의 안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인가 또는 제법 도덕적인 인간인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강한 인간인가.
주인공 그가 예술가로서 추구하려는 그의 예술체계는 그 동안 일구어 온 예술적 성과들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나아가 가정까지 파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사회적 금기와 대립을 이룬다. 그의 예술적 행위는 반사회적 행동을 통해 성취될 수 있기에 자신이 속한 세계와 근본적으로 합치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되고 세계와의 대립을 가져오게 된다.
사회적인 금기사항에 괴로워하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 없던 그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실현하기에 이른다. 처제의 몸에 있는 몽고반점으로 인해 예술적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사회적 금기사항인 근친상간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 한강의 주제와 소재에 대한 결합 솜씨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이다. 처제와 형부라는 사이, 성인 여인의 몽고반점이라는 것, 비디오 아티스트(예술가)로 나오는 그, 이 세 소재는 푸른 꽃, 혹은 예술과 욕망의 시원이라는 주제와 절묘하게 결합되는 것이다.
퇴화된 모든 사람에게는 사라지고, 오로지 어린 아이들 몸에만 있는 몽고반점은 태고의 순수성, 원시성을 상징한다. 황폐한 일상을 폭력으로 느끼며 그 삶을 견딜 수 없어하던 주인공에게 처제의 몽고반점은 그러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구원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는 식물성의 세계를 지닌 처제의 몸에 꽃을 그려 넣고 몽고반점을 중심으로 암술과 수술이 교합하는 장면을 비디오 아트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은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순수의 세계, 애초에 지니고 있던 야생성, 원시성의 세계를 나타내고자 하는 예술적 욕망인 것이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은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것을 ~중략~ 자주와 빨강의 반쯤 열린 꽃봉오리들이 어깨와 등으로 흐드러지고, 가느다란 줄기들은 옆구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오른쪽 엉덩이의 둔덕에 이르러 자줏빛 꽃은 만개해, 샛노란 암술을 도톰하게 내밀었다.
그의 예술적 욕망은 벌거벗은 처제의 몸에 꽃을 그리고, 그것을 영상화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가 진정으로 실현하고 싶었던 또 다른 이미지를 찾아 나아간다. 진공 공간 같은 침묵 속에서 몸에 꽃을 그린 한 남녀가 교합하는 장면을 실현할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그 최고의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처제의 상대역으로 이미 배가 나오고 대머리가 되어가는 자신 대신 후배를 택하여 실제 촬영에 들어간다. 그러나 실제 섹스를 요구하는 바람에 촬영 도중 후배는 스튜디오를 나가버린다. 그러나 처제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망과 예술적 욕망에 휩싸인 그는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드디어 자신의 온 몸에 꽃을 그리고 처제와 예술적 향연을 펼치며 섹스를 하면서 그토록 원했던 장면을 완성한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꿈꿔왔던 그대로였다. 그녀의 몽고반점 위로 그의 붉은 꽃이 닫혔다 열리는 동작이 반복되었고, 그의 성기는 거대한 꽃술처럼 그녀의 몸속을 드나들었다. 그는 전율했다.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물들이고 배와 허벅지까지 흠뻑 적시는 끈끈한 풀물의 푸른빛을 보았다. ~중략~ 영원히, 이 모든 것이 영원히......라고 그가 견딜 수 없는 만족감으로 몸을 떨었을 때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도덕적 원리와 미적 열망, 현실과 예술 사이의 경계를 넘어섰을 때, 그가 그토록 갈망하고 꿈꿔왔던 미적 이미지가 실현되었다. 비디오 아티스트가 추구하고자 했던 예술적 욕망의 행위는 분명한 금기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 근대화에 내제된 파괴성과 폭력성이 만연한 현실 세계는 태고의 순수성과 생명력을 지닌 식물성의 세계를 상징하는 예술가가 지닌 예술 세계의 치유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편과 동생의 정사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본 아내가 그를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것은 탐미주의적 예술과 이미지의 세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세계에서는 모든 비관습적인 행위들과 일탈은 격리되고 처벌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상실한 아름다움과 순수함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진부한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원시의 생명감을 갈구하는 예술가를 통해 삶에 대한 진정한 구원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예술적 열망과 생명력에 대한 열망이 아무리 순수했다고 해도, 그가 자신의 처제와 근친상간을 하고 그것을 비디오로 담은 사실은 우리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금기사항이다. 아무리 예술가의 예술적 욕망이라 해도 우리 사회는 사회의 법과 제도, 윤리를 어겼을 때 그것을 용서하지 않거나 가차 없이 집행한다. 여기서 예술가의 욕망과 사회제도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나 사회적 금기의 벽을 넘은 두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주인공 그가 사회의 금기사항조차도 넘어서려고 한 것은 강한 예술적 욕망이었지만, 처제인 영혜에게는 처음부터 우리 사회의 윤리나 도덕 같은 것은 없었다. 자신의 본능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부인 그를 자신의 몸속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즉 주인공 그는 자신의 도덕적, 윤리적 경계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참을 수 없는 예술적 욕망을 쫓아 자신의 의지로 그 경계를 넘었지만, 처제인 영혜에게 있어 경계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푸코의 입장대로라면, 그녀를 정상적인 사회의 경계 밖으로 내몬 것은 스스로 정상인이라 자부하는 우리자신, 우리사회이며 그녀 가족들이다.
소설 맨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아내는 이 모든 것을 발견하고는 충격에 휩싸이고, 둘을 정신병원에 집어넣는다. 사회의 윤리와 법을 실행하는 주체인 아내에 의해 예술가인 그는 예술적 욕망의 끝에 마주하게 된다. 아내에 의해 파렴치한으로 몰리고,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가 어떤 예술적 희열을 맛보았든, 어떤 생명적 에너지를 느꼈던지 간에 그가 도덕적 윤리적 금단의 경계를 넘는 순간, 그의 행동은 모두 이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정신 나간 짓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병원에 전화한 아내에 의해 단호히 단죄된다. 예술과 욕망의 끝에 이르렀던 그는 이제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여, 현실의 가장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몽고반점」은 사회적 금기사항과 관련된 예술가의 예술혼, 또는 그 욕망을 에로티시즘과 연관시켜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술가의 욕망은 때로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인데, 그것은 예술가는 근대사회가 만들어 놓은 제도를 종종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자본권력자들은 생산성, 효율성만을 최고의 가치로 치부하여 거기에 맞는 제도와 윤리를 만들었는데, 예술가는 그런 제도와 윤리를 깨트리면서 예술적 혼과 욕망을 실현시킨다. 때로는 격정적이고 에로틱하면서 금기시된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예술가의 욕망인 것이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원시의 생명감과 순수성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다.
3. 「몽고반점」에 나타난 식물성과 에로티시즘의 상관관계
「몽고반점」은 식물성을 가진 처제를 통해 식물성의 이미지를 기존의 여성적 이미지로만 상징하지는 않는다. 평화, 포용, 반문명성 등의 이미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에서 작가는 식물성과 에로티시즘을 연결시키고 있다. 흔히 문학에서는 식물, 특히 꽃을 여성으로 비유하여 대상을 유혹하고 성적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소설은 처제에 대한 묘사라든지, 처제가 사는 원룸에 대한 묘사부터 식물성 내지 식물이 상징하고 있는 원시성을 드러내고 있다. 몽고반점, 가지를 치지 않은 야생의 나무, 외까풀 눈, 비음이 섞이지 않은 다소 투박하나 정직한 목소리, 광대뼈 튀어나온 얼굴, 맨발, 가구가 거의 없는 집안, 알몸으로 지내는 행위, 포크 대신 손으로 과일을 먹는 모습,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차림, 뱃속 얼굴, 갓난아이의 몸에서 나는 배냇냄새, 모든 것이 비워진 눈 등 처제의 몸은 식물성, 내지 원시성을 상징하는 풍부한 수사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원룸의 구조로 된 남향의 실내는 시월 초입의 가을볕이 부엌까지 들어 고즈넉한 느낌을 주었다. ~중략~ 손가락 마디만 한 먼지 덩어리들 몇이 굴러다니고 있었으나 어쩐지 지저분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중략~ 예전에 그녀의 집에서 덧없는 아름다움으로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은 누선을 건드릴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마른 쇄골과, 누었기 때문에 소년처럼 밋밋해 보이는 가슴, 드러난 갈빗대들, 관능 없이 벌어진 허벅지, 눈을 뜬 채 잠든 것 같은 사막 같은 얼굴까지. 그것은 구석구석 일체의 군더더기가 제거된 육체였다. 그녀는 포크 대신 손으로 배 한 조각을 집어 베어 물었다.
햇빛은 식물들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영양소를 제공하는 근원이기도 하지만 미세한 것들, 그리고 하찮은 것들의 존재를 드러내주기도 한다. 햇살 속에서 먼지들이 굴러다니는 것이 지저분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일종의 카오스적 원초성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카오스란 원초적 이미지와 에너지를 함축하고 있는 질서화 이전의 상태라는 점에서 절대미의 세계와 연결된다. 이 카오스적 원초성에서 식물이 탄생하고, 식물의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다른 생명이 배태되는 생명 탄생의 전이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를 식물의 유혹, 또는 식물의 욕망이라 하기도 한다. 이는 에로티시즘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인 생의 본능, 즉 에로스이기도 하다. 이런 식물의 원시성, 원초성을 처제는 갖고 있는 것이다.
작가 한강이 말하는 식물의 세계는 앞서도 말했듯이 수동적이고 유약하고 포용적이고 반문명적인 세계만은 아니다. 오히려 주인공인 그가 영혜와 후배인 J의 몸에 그리는 화려하고 관능적인 꽃처럼, 암술과 수술이 서로 수분을 하고 서로가 서로를 껴안고 원하는 열정적인 생명의 세계인 것이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작품에서 식물성과 연관된 에로티시즘을 느낄 수 있다. 에로티시즘이 반드시 동물성과 연관된 것만은 아닌 것이다.
J의 성기를 중심으로 선혈 같은 진홍의 거대한 꽃을 거렸다. 마치 J의 음모가 검은 꽃받침처럼, 성기는 꽃술처럼 보이도록.(54면) ~중략~ 그녀의 몽고반점 위로 그의 붉은 꽃이 닫혔다 열리는 동작이 반복되었고, 그의 성기는 거대한 꽃술처럼 그녀의 몸속을 드나들었다. 그는 전율했다.(66면)
굉장히 관능적인 묘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묘사를 너무 협소한 관점으로 보아서 섹스를 중심으로 평가하는 것은 작품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즉 섹스를 동물적인 행동으로 규정하여 그가 가지고 있는 동물성과 처제가 가지고 있는 식물성의 대립으로 상징화하는 것은 식물성과 에로티시즘의 의미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의 섹스는 동물성과 식물성의 결합이라기보다 육체적 욕망을 초월한 심미적 승화로 보아야 더 합당하다. 그가 처제에 대해 느끼는 욕망은 단순한 예술적 욕망만이 아니라 육체적 욕망이기도 하지만, 더 분명한 사실은 예술적 욕망 속에 육체적 욕망이 함께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로티시즘 본래의 의미이다. 육체적 탐미와 함께 예술적, 생명적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에로티시즘인 것이다. 이는 곧 생에 대한 의욕,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이 그 매개가 되는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생에 대한 욕망이 있고, 그럼으로써 상대를 유혹하고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위 장면은 동물과 동물의 섹스장면이 아니다. 동물과 동물의 섹스라면 성적 탐닉이라는 에로티시즘의 성애화로 비쳐질 수도 있으나 작가는 동물성과 식물성의 섹스로 묘사함으로써 생의 본능이라는 에로티시즘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즉 육체적 결합을 초월한 심미적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35면) ~중략~ 자주와 빨강의 반쯤 열린 꽃봉오리들이 어깨와 등으로 흐드러지고, 가느다란 줄기들은 옆구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오른쪽 엉덩이의 둔덕에 이르러 자줏빛 꽃은 만개해, 샛노란 암술을 도톰하게 내밀었다. 몽고반점이 있는 왼쪽 엉덩이는 여백으로 남겼다. 대신 그 푸르스름한 점 주변으로 그보다 흐린 연둣빛을 큰 붓으로 깔아, 연한 꽃잎 그림자 같은 반점이 도드라지게 했다.(36면) ~중략~ 이즈음부터 색채들이-물론 이전에도 색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었으나-그의 안에서 터져 나온 적은 없었다. 마치 몸의 내부가 힘찬 색채들로 가득 차올라, 그 격렬함이 더 견디지 못해 분출해 나오는 것 같았다. 매우 격렬하게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이전의 어떤 시기에도 결코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각이었다.(52면)
작가 한강은 색채에 대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하고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색깔은 언제나 그 생명체의 본질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식물에게 색깔을 잃는다는 것은 암컷을 유혹할 능력의 상실, 즉 알을 낳거나 자식을 생산해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점이 공룡의 멸종을 재촉한 원인 중의 하나였다. 식물 내지 꽃은 색채들과 어울려 생명의 신비로움과 환상을 동시에 자아낸다. 색채는 감정유발과 심리적 효과도 일으킨다. 색채간 조화나 형상이 사람의 감정을 열정적, 환상적으로 일으키기도 하고 흥분을 자아내기도 한다. 또한 색이 종류마다 고유의 파장과 진동수를 갖고서 신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색채로서 정신치료, 심리치료까지 한다고 한다.
작가 한강은 초록, 빨강, 자주, 노랑, 파랑(푸른색), 연두라는 색을 다양하게 등장시켜 아주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다. 빨강색은 인간의 삶, 힘, 숨 쉬는 생명력의 상징이다. 빨강, 청록, 노란색, 보라색 등 원색은 에너지 회복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것이 꽃의 에너지인 이유이다. 내부로 색채가 가득 차올라 격렬함에 견디기가 힘들다고까지 했다. 이는 매우 격렬하게 존재감을 느끼게 하고, 이런 감정은 전혀 새로운 감각이었다고 했다. 작가는 주로 원색을 사용하여 섹스의 강렬함을 묘사하고 있고 그 감각은 황홀 그 자체였다고 서술한다. 그는 이전에 그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한 강렬한 감정을 식물성의 섹스로 느끼고 있고, 거기에다가 식물의 다양한 색채로 생의 황홀함을 느낀다. 이는 동물의 섹스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이 처럼 식물과 색이 함께 어울려 강렬한 생명력과 근원적 생의 충동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에로티시즘의 근본적 의미인 것이다.
식물의 성징인 꽃은 유혹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인간으로서 동물성과 예술가로서 예술성이 결합되어 있는 존재인 그에게 꽃을 페인팅하는 것은 식물성의 투사로 보이며, 씨앗 같은 몽고반점에 줄기와 꽃잎을 그리는 것은 태고의 순수성을 현재와 연결하여 깨우기 위한 상징적 행위이다. 또한 색채와 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마침내 처제도 에로틱한 흥분을 느끼는 것은 식물성과 관련된 에로티시즘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이는 식물성과 관련된 에로티시즘이 생의 충동이자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몽고반점」은 육체에 대한 탐미나 예술적, 생명적 구원 등의 의의를 모두 포함한 진정한 에로티시즘의 의미를 밝힌 소설이라 할 수 있다.
Ⅳ. 결론
이상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작가 한강은 소설 「몽고반점」에서 한 인간의 유미적 추구를 통해 그 욕망의 종국을 그리고자 했다고 밝혔다. 작가의 말처럼 「몽고반점」은 성년이 넘어서까지 몽고반점을 지니고 있는 처제를 향해 도덕적, 윤리적으로 금지된 예술적, 성적 욕망을 품고, 결국 차가운 현실의 끝으로 치닫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처제에 대한 형부의 금기시된 욕망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예술과 삶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예술과 삶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가 통속적인 근친상간과 간통이 아니라 잃어버린 원시의 순수한 생명력이었음에 초점을 맞추어 「몽고반점」에 나타난 미의식을 알아보았다. 그 미의식은 식물성을 꿈꾸는 몸, 금기시된 욕망, 식물성과 관련된 에로티시즘의 의미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약육강식의 원리에 벗어나 있는 처제의 몸은 평화로운 식물의 세계를 꿈꾼다. 어른이 되어서도 몽고반점을 가지고 있는 처제는 그 자체로 원형적 순수이다. 그런 몸이 식물성을 꿈꿈으로써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예속된 영역을 벗어나려고 하는데, 작가는 그 방법을 탐미와 관능의 미학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식물성의 세계는 단순히 유약한 세계만이 아니라 원시의 순수한 생명력이다.
「몽고반점」은 사회적 금기사항과 관련된 예술가의 예술혼, 또는 그 욕망을 에로티시즘과 연관시켜 잘 보여주고 있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예술적 욕망의 행위는 분명한 금기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 근대화에 내제된 파괴성과 폭력성이 만연한 현실 세계는 태고의 순수성과 생명력을 지닌 식물성의 세계를 상징하는 예술가가 지닌 예술 세계의 치유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물의 성징인 꽃은 유혹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인간으로서 동물성과 예술가로서 예술성이 결합되어 있는 존재인 그에게 꽃을 페인팅하는 것은 식물성의 투사로 보이며, 씨앗 같은 몽고반점에 줄기와 꽃잎을 그리는 것은 태고의 순수성을 현재와 연결하여 깨우기 위한 상징적 행위이다. 또한 색채와 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마침내 처제도 에로틱한 흥분을 느끼는 것은 식물성과 관련된 에로티시즘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이는 식물성과 관련된 에로티시즘이 생의 충동이자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몽고반점」은 육체에 대한 탐미나 예술적, 생명적 구원 등의 의의를 모두 포함한 진정한 에로티시즘의 의미를 밝힌 소설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