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적 인식으로 바라본 인물성동이론

AI시대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근본적 차이가 있을까...

by 방정민

생태학적 인식으로 바라본 인물성동이론




Ⅰ. 서론

1970년대 이후 서구 선진국에서 시작된 환경운동이 21세기에 와서는 단순히 환경오염을 고발하고 생태를 보존하자는 차원의 운동이 아니라 근대이후 진행되어 온 서구문명과 근대문명 자체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환경운동에서 시작된 이 변화는 앞으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통째로 바꿀 거대한 담론으로 자리잡을 태세다. 『21세기의 승자』란 저서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2037년 12월에 모든 재화 가치가 소멸하고 자본주의는 종말을 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자크 아탈리뿐만 아니라 많은 미래학자들이나 생태학자들은 그 시기에서 차이가 있을 뿐 자본주의 종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300년 이상 지속되어온 자본주의가 21세기에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엄청난 문제가 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는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하나의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투자되고, 그 투자는 다시 재생산되고 재투자되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끝없는 잉여를 창출해 내고 있다. 그 잉여는 더 많은 잉여를 창출하기 위해 기술을 발달시키고 문명을 발달시킨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은 철저히 그들의 생존방식을 무시당한 채 희생되고 파괴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바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불러온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하에서는 욕망이 있는 그대로 분출되는 생산력 위주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진다. 경제적 효용가치를 위주로 하는 삶의 방식을 취할 때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욕망을 최대한 부풀릴 수밖에 없다. 욕망은 본래 인간으로 하여금 쾌락을 추구하도록 하고, 그와 관련된 대상들을 소유하도록 부추기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근대 자본주의 이후 비롯된 생태환경의 파괴는 이런 욕망과 관련하여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서구의 근대문명은 이성중심의 인간중심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인간관 내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은 인간의 性을 우위에 놓으며 자연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 사고는 인간이 자연을 이용가치와 수단으로만 생각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하는 개체중심적 성향을 가지게 한다.

개체들의 행위 성향 속에는 개체들 간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상대적 이점을 추구하려는 ‘개체중심적 성향’과 주변 개체와의 협동을 통하여 전체의 화합을 추구하는 ‘생태중시적 성향’이 공존하게 된다. 이러한 개체 생명의 성향을 사회에 적용시킨다면 경쟁위주의 형태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생계활동에 있어서 생태적 고려 보다 수익의 확대에 보다 관심을 쏟게 될 것이며, 협동위주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생태적 고려를 통하여 보다 장기적인 공동의 선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현대문명이 야기한 생태계의 위기는 인간이라는 개체생명이 지닌 개체중심적 성향에서 그 근본요인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동물이나 자연에 비해 인간을 우위에 두는 인간중심적 사고가 이 지구를 둘러싼 생태계의 파괴를 불러일으켰으며, 인간 존재 자체의 수단화와 부정을 야기시켰다. 인간은 주변개체들과의 공존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착취하고 때로는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인간이라는 종의 이상 번식을 가져온 것이다.


이런 인간중심주의가 생태계 위기의 근본 요인 중의 하나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이제는 이 지구를 둘러싼 시스템이나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시기가 되었음을 깨달아야한다. 이때에 즈음하여 생태문학에 대한 논의가 동양의 세계관을 주목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자연을 이용가치로 보지 않는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보며 하늘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삶, 즉 天人合一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인간이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의 전환이 생태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관건이 된다고 한다면, 이제 문제의 초점은 인간을 제외한 자연물들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라는 물음으로 모아진다. 자연을 영혼이 빠져버린 단순한 물질 내지 정교한 장치로 가동되는 기계로 규정하거나, 인간의 필요와 이해관계에 따라 보조해야할 자원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이 교정되지 않는 한, 인간중심주의는 극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동양사상중 특히 유학사상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조선은 유학(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나라를 건국하여 사회를 다스렸다. 건국초의 유학은 실용적 학풍으로 그다지 심오한 철학논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화되고 한편으로 보수화되면서 지배계급의 지배논리로 유학이 작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 여러 전쟁을 겪게 되었는데,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엄청난 사회의 혼란이 야기되었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각성은커녕 오히려 부당한 지배구조를 더욱 고착화시키려 성리학을 이용하였다. 그러면서 사회는 더욱 부패하고 섞어갔다. 그러나 한편으로 선각자들은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바로 읽고 성리학에 새로운 해석을 하기 시작한다. 사회는 부패하고 보수화되어갔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학문은 더욱 세련되고 깊어져간 것이었다.


17세기 이황과 기대승에서 시작된 사단칠정 논쟁은 18세기 이간과 한원진의 인물성동이론 논쟁으로 이어져 학문적 큰 성과를 이루게 된다. 이는 중국에서도 없었던 학문적 성과이며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 황폐화된 생태계와 수단화된 인간존재에 대한 반성을 하게함은 물론이요 아울러 미래에 대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동양이나 한국의 사상이라면 인간이 무조건 자연과의 합일을 강조했고 인간을 동물이나 자연과 동등하게 간주하였다고 흔히 말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나 맞는 말도 아니다. 물론 서양처럼 이원론적으로 자연계(또는 초자연계)와 인간계(현상계)를 나누고 인간이 초월하거나 구원받아서 이상계인 이데아 즉, 초자연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고를 가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사상이 인간을 자연이나 동물로 대표되는 ‘物’과 같은 종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주류는 인간의 존귀함과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조선조 후기 유학의 최대논쟁인 인물성동이론에 주목하면서 선조들이 인간과 자연[物]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그 대립되는 주장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논리적으로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우리들이 또는 생태문학에서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그 장점을 人物性同論에서 찾아볼 것이다.


Ⅱ. 본론

1. 논쟁의 발단과 배경


성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 만물의 발생과 변화는 理와 氣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조선 초부터 인간의 性情에 관심을 기울이고 심성의 올바른 발현을 통해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조선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성정이 우주만물 사이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관해 이미 깊은 탐구를 해 왔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사단칠정논쟁이었다.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다른 동물들과 달리 사회 규범을 가지고 이를 실천해 나갈 수 있다고 할 때, 이제 시야를 인간의 성정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 쪽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논리적으로 자연스런 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인물성동이 논쟁이 본격화되는 시기를 국내적으로 보면 조선에서는 양란을 겪고 난 후 사회는 동요하였고 불안정해졌다. 그리고 조선을 둘러싼 국제질서에서 일본은 강대해지고 있었으며, 그토록 엎드려 존중을 마다하지 않았던 명나라가 망하고 오랑캐라고 업신여긴 여진족이 청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중국을 中和라 하고 조선을 小中和라 하며 스스로 명나라를 따라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자부심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동물과 같다고 생각한 오랑캐인 청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현실의 문제가 있었다.

학문적으로는 인간의 心과 性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세계 학문사에 유례가 없는 그 깊이를 더해갔으며, 현실적으로는 청나라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현실정치의 문제인식이 인물성동이론의 시작이었다. 당시로는 성리학이라는 학문이 조선이라는 나라와 현실을 지배하고 있던 때라 국제사회에 있어서 청나라와 외교를 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토벌하고 눌러야 하는 대상인지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즉 동물과 동격인 오랑캐에게도 사람과 같은 性이 있는지, 있으면 어떻게 다르며 같은지를 논해야만 청나라와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었다. 이런 현실의 문제를 성리학이라는 학문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 이 논쟁의 배경이다.

권상하는 이이-김장생-송시열의 뒤를 이어 기호학파의 맥을 계승하는 사람이다. 그 문하에는 이 논쟁의 주인공이 되는 외암 이간과 남당 한원진이 있었다. 한원진은 1705년에 지은 「示同志說」에서 인물성론에 관해 이미 상당히 정리된 입장을 밝히고 있고, 이간은 1709년 최성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五常과 未發에 관한 논의를 한 바 있다. 본격적인 논쟁은 1712년 이간이 스승 권상하에게 미발 상태의 純善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된다.

처음에 권상하는 이간의 설에 수긍하였으나, 한원진이 자기의 의견을 설명하자 이번에는 한원진의 설을 인정하였다. 그러자 이간은 스승 권상하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과 한원진의 설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한원진은 스승을 대변해서 다시 이간을 반박함으로써 이들 둘 사이의 논쟁은 본격화되었다.

2. 논쟁의 전개

1) 性 개념의 다의성

① 인물성동이론의 문헌적 근거

인물성동이론의 문헌적 근거는『중용』 제1장 ‘천명지위성’과 『맹자』의 ‘생지위성’에 대한 주자의 주석이다.

1. 命은 令과 같고, 性은 곧 理이다.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 만물을 화생함에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치가 또한 여기에 부여 되었으니 명령하는 것과 같다. 이에 人. 物이 생함에 각각 부여받은 理를 근거로 하여 健順五常의 덕을 이루었으니 이른 바 性이다.

만물이 모두 리를 부여받아 기로써 형태를 이루고, 이때 각기 부여된 리가 곧 성이 되므로, 인간을 포함하는 만물의 성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2. 인. 물이 생함에 性과 氣를 갖고 있으나, 기로써 말한다면 지각 운동은 인. 물이 다르지 않은 듯 하지만 이치로써 말한다면 인의예지를 품수받은 것이 어찌 물이 얻어 온전한 바이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성이 선하여 만물의 신령함이 되는 까닭이다.

기에는 차이가 없지만 품부받은 이가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다고 하여 인물성 이론의 논거로 삼고 있다.

3.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반드시 理를 얻은 다음에 건순오상의 성을 이루게 되고, 반드시 기를 얻은 다음에 魂魄 五臟 百骸의 신체를 이루게 된다. ....... 그런데 그 리로 말하면 만물의 근원은 하나이므로 참으로 사람과 사물은 귀천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기로 말하면 기의 正하고 通한 것을 얻어 사람이 되고 그 偏하고 塞한 것을 얻어 物이 된다. 그러므로 귀천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도 사람과 사물의 차이를 말하고 있기는 하나, 이번에는 리는 동일하지만 기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의 다름이 생긴다고 한다.

『중용』의 주석에 따르면 사람과 사물이 모두 天으로부터 理를 부여받아 性으로 삼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의 성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맹자집주』에 따르면 부여받은 리의 차이에 의하여, 『대학혹문』에 따르면 기의 차이에 의하여 사람과 사물이 달라진다. 성이란 리가 기와 결합된 경우를 말하므로 리의 차이에 의한 것이든, 기의 차이에 의한 것이든 기와 결합된 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리와 성의 개념을 다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주희의 혼용이 문제된다. 만물 생성과 변화의 원리라는 의미에서 리는 우주 전체에 관통하고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는 개체 내의 리인 성도 동일하다. 그러나 각종의 사물이 유적 특성을 이루게 하고, 또한 각각의 개체이도록 하는 원리를 성이라 할 때 이 성은 사람과 사물에서, 나아가 각각의 개체에서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차이의 원인을 기라고 하든 리라고 하든 그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된 성 개념을 사용하는 한 인물성동이 논쟁의 전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② 同論과 異論의 입장


ㄱ. 동론의 입장

위 1번의 중용주에 대하여 동론의 입장인 이간은 기가 있으면 반드시 그 이치가 있다는 성리학의 전제에 의거하여, 모든 사물은 음양오행의 기로 이루어져 있음으로 그 이치인 오상을 균등하게 부여받았다고 주장한다.

인. 물이 오행의 기를 균등하게 받았으나 偏全(치우침과 온전함)에는 분수가 있다. 지금 분수의 많고 적음과 발용여부를 논하는 것은 좋지만 오행 가운데에 하나는 있고 하나는 없다고 말한다면 안 된다.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도 모두 음양과 오행이 만든 것인데 하물며 초목보다 신령한 것이 어찌 다섯 가지의 이치를 모두 갖고 있지 않겠는가.

이간은 또한 一原과 異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일원으로 말하면 천명 오상이 모두 형기를 초월할 수 있으므로 사람과 사물에 편전의 다름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本然之性이다. 이체로 말하면 천명 오상이 모두 기질로 인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사람과 사물 사이에 편전의 다름이 있을 뿐 아니라, 성인과 범인 사이에도 천차만별이 있다. 따라서 偏한 곳에서는 性命도 함께 편하고 全한 곳에서는 성명도 함께 전하다. 이것이 이른바 氣質之性이다.

근원으로 말하자면 만물에 다름이 있을 수 없고, 기질에 구애됨으로 말하자면 사람과 사물이 다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결국 이간은 일원의 관점을 택한다. 성은 곧 리이므로 일원의 관점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연의 성이든 기질의 성이든 간에 성은 단지 리일 뿐이다. .......성을 말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리로 바꿀 수 없고, 리를 말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성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한다면, 나의 비천한 견해가 미칠 바 아니다.

ㄴ. 異論의 입장

2번의 견해에 대해 物에서 인의예지라는 도덕성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그 전체를 소유하고 있는 데에 비하여 物은 일부분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보다 열등하다. 반면에 인간은 四德 전체를 부여받아 그 본성이 절대선이라는 점에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자리매김 된다.

무릇 지각 운동은 인. 물이 동일하다는 것이 어찌 인간은 알지 못함이 업고 깨닫지 못함이 없는데 物도 또한 그것과 동일함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대개 지각이 인. 물에 있는 것은 비록 精과 粗의 같지 않음이 있으나 그 지각하는 것은 같다. 그러나 인의예지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정조의 섞임이 없으니 사물이 얻어 온전한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각운동은 인. 물이 같으나 인의예지는 인. 물이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인의예지가 있는가 없는가, 온전한가 편벽되었는가를 논한다면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각하는 기가 다른 데에 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가? 物의 지각은 오행의 粗濁한 것을 얻었음으로 그 이치는 조탁한 이치가 된다. 비록 그 이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인의예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지각은 오행의 精英한 것을 얻었기 때문에 그 이치는 인의예지가 되며 지각의 발현은 인의예지의 작용이 된다.

한원진은 인간과 사물의 지각능력에는 차이가 있으나 지각력을 갖는다는 사실은 동일하다고 본다. 그러나 인의예지와 같은 고차적인 도덕성에서는 본질적인 차이를 갖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의 인의예지는 인간에게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리는 본래 하나이다. 그런데 형기를 초월하여(超形氣) 말한 것이 있고, 기질에 인하여(因氣質) 말한 것이 있고, 기질을 섞어서(雜氣質) 말한 것이 있다. 형기를 초월하여 말하면 태극이라는 이름이 이것으로 만물의 리가 동일하다. 기질로 인하여 이름하면 건순. 오상의 이름이 이것으로 사람과 사물의 성이 같지 않다. 기질을 섞어서 말하면 선악의 성이 이것으로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의 성이 또한 같지 않다.

기질을 초월하여 말할 때는 만물의 리가 동일하고, 기질과 같이 있는 것으로서의 리인 성을 말하자면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르며, 기질과 섞여 있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모든 개체의 성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이간과 한원진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과 같다. 주희가 처음부터 혼동되게 리와 기와 성을 말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는 리기철학을 학문적으로 깊이있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서, 즉 <논어>. <맹자>, <대학>, <중용>에도 리기와 관련하여 아주 짧게 다루고만 있을 뿐 그 의미와 논리체계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송나라 학자였던 주희가 주를 달면서 리기에 관하여 논하고 있는데, 그 학문적 깊이와 논리는 오히려 떨어진다.

따라서 人物의 性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문제는 결국 주자가 번역한 사서 중에서 어느 것을 인용하여 자기주장으로 삼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것이다. 동론을 주장하는 이간은 주로 순정한 理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고, 이론을 주장하는 한원진은 차이와 개별성을 뜻하는 氣의 입장에 서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 理通氣局의 이중성


서로의 관점을 인정하면서도 의견의 대립을 이루는 양측이 공통으로 이용하는 또 하나의 논거가 있다. 그것은 이이의 理通氣局설이다. 같은 학설을 양측에서 똑같이 논거로 삼고 있다는 것은 이이의 리통기국설에 어떤 개념이 혼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들 사이의 논쟁의 쟁점을 파악하는 데에도 좋은 단서가 된다.

理란 본말이 없고 선후가 없는 것으로 이를 이르러 理通이라 하고, 氣는 본말이 있고 선후가 있는 것으로 氣局이라고 한다. 통이 리가 무형하여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두루 통할 수 있음을 뜻한다면, 국은 기가 유형하여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어 국한됨을 말한다.

리통기국은 본체 위에서 말해야 하며, 또한 본체를 떠나서는 따로 流行을 구할 수도 없다. 사람의 성이 사물의 성이 아님은 기의 국이요, 사람의 리가 곧 사물의 리임은 리의 통이다. 모나고 둥근 그릇은 다르나 그릇 안의 물은 동일하고, 크고 작은 병은 다르나 병 안의 공기는 동일하다. 기의 一本이란 理의 通 때문이고, 리의 萬殊란 氣의 局 때문이다. 본체 가운데 유행이 갖추어져 있고, 유행 가운데 본체가 있다. 이로써 생각해보면 리통기국의 설이 과연 일변에 떨어지겠는가?

이이의 리통기국설은 리의 무형무위한 특성과 기의 유형유위한 특성에 기초하여 리기의 不相雜. 不相離한 구성 관계를 리일분수의 체계로 설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리통에 의하면 사람과 사물의 리가 동일하고, 기국에 의하면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를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 사이의 성도 다르다. 따라서 리통에 따르면 인물성 동론을 지지하게 되고, 기국에 따르면 인물성 이론을 지지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리통기국은 인물성동이 논쟁을 야기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논쟁을 하나의 체계 속에서 포용할 수도 있는 상위 개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이의 리통기국설도 이론과 동론을 완전히 포용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우주만물의 존재 근원을 탐구하면서도 가치론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 성리학자들의 공통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즉 서론에서 말했던 인간존재의 근원을 탐구하여 그것으로 현실의 문제(국제적으로는 일본이라는 왜국과의 교섭과 오랑캐인 청과의 관계설정 등의 외교문제가 있으며 또한 국내적으로는 신분질서 동요에 의한 사회혼란 등의 문제가 있었다)를 극복하려고 하였으나 보수적이고 변태적으로 흐르는 조선의 신분질서와 계급문제를 그대로 놔둔 채 성장하는 백성의 시민의식과 주권재민의식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미봉책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3) 本然之性과 氣質之性


아직 발하기 전에 리가 기 가운데 있을 때 리만을 가리키면 本然之性이고, 기를 함께 가리키면 氣質之性이다. 아마도 이는 바꿀 수 없는 이론일 것이다.

한원진은 현상계의 인간과 사물에서 리만 가리킨 것을 본연지성, 리기를 함께 가리킨 것을 기질지성이라고 하고, 인기질의 관점에서 기질지성에 초점을 맞춘다. 즉 한원진은 개별성이며 구체성인 氣에 초점을 두고 말하고 있다. 이는 본성적으로 순정한 리는 현실계에서 발하지 않으므로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원진은 현실에 작용되는 기가 사람과 동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이간은 理氣同實, 心性一致의 입장, 즉 리기를 분리해서 지적할 수 없고, 心을 두고 性만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초월계와 현상계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고, 따라서 理가 純正 그 자체라면 당연히 기도 순정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현실계에 나타난 氣도 사람과 사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것이 곧바로 性에 연결된다.

심은 바르지 않을지라도 성은 스스로 중을 지킬 수 있고, 기는 순조롭지 않을지라도 리는 스스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니, 천하에 이런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선만을 가리킨 것은 기와 분리하는 것이니, 사람의 경우에는 반드시 理氣同實. 心性一致인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 ...... 심은 둘이 아니다. 그러나 구속됨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두 가지로 지적된다면 이른바 大本之性이란 그 本然之心에 나아가 單指한 것이고 기질지성이란 기질지심에 나아가 兼指한 것이다.

한원진처럼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을 구분하여 기와 별개로서의 리를 따로 끄집어내어 이를 본연지성이라 단지한다는 것은 이간이 보기에도 성이라고 하기가 곤란하다. 이간은 기와 분리된 리를 성이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와 결합된 리로서의 성이 본래의 리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리와 기가 공존하는 리기동실. 심성일치의 상태를고수하고자 한다. 본연지심에 나아가서 단지하면 본연지성이고, 기질지심에 나아가서 겸지하면 기질지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원진의 격렬한 비판을 유발한다.

심은 기이고 성은 리이다. 기는 淸濁美惡의 가지런하지 않음이 있지만 리는 곧 순선하다. 그러므로 리를 단지하면 본연지성이고 리와 기를 겸지하면 기질지성이나 성에 二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질을 겸함과 겸하지 않음에 따라 두 가지 이름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간은 자신의 말이 심이 두 개 존재한다는 말은 아니라고 덧붙이지만, 한원진은 이간의 이론이 결국은 이심이성론이라고 비판한다. 한원진은 하나의 物, 하나의 心에서 단지. 겸지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분하고 기질지성의 관점을 택한 것이다. 이간은 자신의 일관된 리기 不相離. 不相雜 및 리기동실. 심성일치의 원칙은 고수할 수 있었지만, 하나의 사람 또는 사물 안에 두 개의 심과 두 개의 성이 존재한다는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4) 오상론


한원진과 이간은 인성과 물성의 동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증거를 五常에서 찾는다.

생각건대 만물이 모두 이 성을 가지고 있는데 오직 사람의 성이 가장 귀하고 지극히 선하게 되는 까닭은 仁義禮智의 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맹자가 성선을 논할 때 다른 말은 없이 다만 인의예지로써 말한 것이다. 만약 만물 중 지각 운동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 인의예지의 온전한 덕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사람의 성이 가장 귀하다는 것은 과연 무슨 까닭이겠는가?

한원진에 따르면 리는 기와 결합함으로써 성이 되고 기의 淸濁粹駁에 따라 오상을 가짐이 다르다. 사람만이 빼어난 기를 얻은 까닭에 오상도 온전히 갖추지만, 나머지 다른 사물들은 거칠고 흐린 기를 얻었으므로 다섯 가지 오상 중 일부만 갖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의 성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간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우주에는 리와 기가 있을 뿐이다. 그 純粹至善의 실상, 無聲無臭의 妙는 천지만물의 똑같은 하나의 근원이다. 그것을 높여서 태극이라 하니 그 명칭은 포괄적이고, 그 전부를 세어 오상이라고 하니 그 조리가 분명하다. 이것은 곧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실체로서, 사람과 사물이 받은 온전한 덕이다.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되고 그 근원을 세부적으로 지칭할 때 오상이라고 하므로 사람과 사물이 오상을 온전히 받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상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태극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오상을 온전히 갖추고는 있지만, 다만 겉으로 드러남에서 차이가 날 뿐이라는 것이다.

이간에 의하면 우주만물의 이치인 리가 기 속에서 그대로 보존되므로 사람과 사물의 차이는 그 발용에서 드러날 뿐이다. 그러나 한원진의 경우 이가 기 안에 들어갔을 때는 그 원인이 기이든 리이든, 이때의 리는 이미 기와 결합하면서 성으로 변화된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성이 온전한 오상을 갖추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 하는 시점의 차이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理, 氣, 性 개념을 서로 다르게 정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 이간과 한원진의 논쟁이후 실학자들의 종합 비판

1) 정약용의 비판


이간이 논변을 통해 가장 역설하는 것은 天命이나 太極으로 표현되는 리가 귀하고 선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에 비해 한워진이 힘주어 주장하는 것은 인간본성으로서의 오상이 동물의 본성보다 훨씬 귀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간이 강조하는 리는 기와의 관련으로 인한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물과 사물 사이의 각종 차별성이 발생하기 이전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존재를 성립시키는 근원이다. 한원진이 강조하는 五常은 존재일반의 근원인 포괄자로서의 理가 각 종류의 사물을 구성하는 氣 속에 내려와 있는 양태이다.

이간의 관점에서 리는 곧 인의예지일 뿐이다. 사물의 본성도 리의 현상적 내재태인 한 인의예지 밖의 것일 수 없다. 인의예지가 인간에게는 있고 사물에는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한원진도 이 점을 긍정한다. 다만 그의 관점에서는 리를 싣고 있는 기에 바르고 치우침, 뚫리고 막힘의 차별이 있다. 따라서 인간과 사물은 똑같이 리를 내재하고 있지만, 양자의 본성은 각각의 형체를 이루는 기속에 있는 만큼 온전하고 그렇지 않은 차이가 있다. 이간 또한 이런 점을 인정한다. 다만 그러한 차별성은 본성(本然之性이) 아니라 기적 조건에 따른 속성 또는 성질(氣質之性)일 뿐이다. 그러나 한원진에게는 바로 이 기질의 성이야말로 실질적 의미의 인성이요 물성이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가 상대방의 이론적 핵심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그렇게 인정된 상대방의 중심명제가 각자 자신의 체계 속에서는 부차적인 주변적 지위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양자의 이론적 차이는 어떤 점을 강조하느냐에 있을 뿐이다.

정약용은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오로지 도덕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 밖에 없다고 한다. 성리학에서는 기질의 성이 서로 다른 것은 형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상 형기는 인간과 사물이 똑같이 부여받은 몸 또는 형체의 꼴과 바탕일 뿐이다. 형기가 같으므로 기질의 성은 같을 수밖에 없다. 저들은 본연의 성은 똑같은 리가 품부된 것이라고 하나 실상 그것은 하늘이라는 근원에서 연유한 것인 만큼 본연의 것일 수 없다. 품부받을 때를 본연이라고 한다면 기질의 성 또한 그와 똑같이 본연의 것이다.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이란 나눌 수 없는 것이며, 둘이 합쳐진 것이 하나의 성을 이루는 것이다.

정약용의 관점에서는 인간의 특수성, 고유성은 단적으로 말해서 몸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 성리학은 인간다움의 핵심근거인 도심을 경시하고, 대신 인간과 동물간의 육체적 조건의 상이성을 중시하는 셈이다. 그러나 실상 인간과 인간 사이는 물론 인간과 동물 사이에도 육체의 구성요소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으며, ‘군자가 보존하는 것이란 바로 도심’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연원을 정약용은 『맹자』에서 찾는다.

맹자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 다르게 되는 근거인 道心을 군자는 보존하고 서민은 버린다’고 했다.

2) 홍대용의 비판


정약용이 비록 인물성 동론과 이론 모두를 비판하지만 주로 이론을 받아들여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홍대용은 동론을 토대로 하여 주장을 구축하였다. 그는 <의산문답>에서 인간과 자연물과의 관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1. 실응: 내가 너에게 묻겠다. 생물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인간, 금수, 초목이다. 초목은 倒生하기 때문에 知는 있으나 覺은 없고, 금수는 橫生하기 때문에 覺은 있으나 慈가 없다. 세 가지 생물의 부류들이 엉클어지고 뒤섞여 서로 쇠퇴하기도 하고 왕성해 지기도 하니 귀천의 등급이 있겠는가?

2. 허자: 천지가 (만물을) 낳음에 오직 인간이 귀하다. 지금 금수와 초목은 慈, 覺, 禮, 義가 없으니 인간은 금수보다 귀하고 초목은 금수보다 천하다.

3. 실응: 五倫과 五事는 인간의 예의이며, 무리지어 다니면서 서로 불러 먹이는 것은 금수의 예의이며, 떨기로 나서 무성한 것은 초목의 예의이다. 인간으로서 物을 보면 인간이 귀하고 物은 천하며, 物로서 사람을 보면 物이 귀하고 인간이 천하며, 하늘에서 보면 인간과 物은 균등하다.

무릇 大道를 해하는 것은 矜心보다 심한 것이 없으며 인간이 인간을 귀하게 여기고 사물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 긍심의 근본이다.


홍대용은 생태계를 구성하는 생물의 종류로서 인간 금수 초목을 들고 그 차별성을 지적한다. 그러나 차별성이 곧 차등성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금수-초목이라는 위계질서를 주장하는 허자를 비판하면서 금수와 초목에도 비록 그 내용은 다를지언정 나름대로의 예와 의가 있다고 말한다. 人, 物의 귀천은 상대적인 것으로서, 하늘이라는 절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 물은 균등하다. 인간의 관점에 집착되어 물을 천하게 보고 인간을 가장 귀한 존재로 보는 긍심, 즉 인간 중심적 사고야 말로 진리를 해치는 근본 요인인 것이다.

그는 금수와 초목 같은 생물뿐이 아니라 무생물에게도 인의라는 도덕성을 부여한다.

비와 이슬이 내리는 것과 싹이 트는 것은 惻隱之心이고 서리와 눈이 내리고 나뭇가지와 잎이 떨어지는 것은 羞惡之心이다. 仁은 곧 義이고 義는 곧 仁이니 이치는 한가지일 따름이다. 털끝만큼 작은 것도 다만 이 仁義이며 천지와 같이 큰 것도 이 仁義일 따름이다.(『의산문답』,「심성문」)

유학사상의 기저를 이루는 『주역』에서는 “精氣爲物”(「계사전」)이라고 하여 物은 생명성과 정신성이 내포된 정기로서 구성된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물에는 생명성과 아울러 정신성까지 부여되어 있다. 그 대표적 명제가 “復 見天地之心”(「復卦 彖傳」)이다. 홍대용이 비와 이슬이 내리고 서리와 눈이 내리는 자연현상을 측은지심, 수오지심으로 규정한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은 인과 의의 단서이며, 동시에 인과 의의 발현체이다. 그러므로 털끝에서부터 천지에 이르기까지 전존재는 인의라고 하는 도덕성으로 충만되어 있다. 세계는 ‘생명공동체’를 넘어서 ‘도덕공동체’로서 자리매김 되는 것이다.

앞에서 이간과 한원진의 주장을 설명한 것처럼 인물성동이 논쟁은 物에게 인간처럼 도덕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물도 도덕성이 있다는 것은 한원진도 인정을 하고 있다. 다만 인간과 똑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즉 물이 인의예지와 4덕, 인의예지신 오상의 일부만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전체를 다 갖고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논변이다. 그러므로 동론과 이론 모두 물의 도덕성을 인정하되 동론은 인간과 똑같다는 것이고, 이론은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다.


4. 논쟁의 생태학적 의의


인성과 물성의 동이 문제는 18세기 초에 시작된 후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문제였다. 그 당시 최대의 관심사로서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탐구했던 이 논쟁의 의의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인물성동이에 관한 논쟁은 그 자체로 학문적 성과가 대단한 논쟁이었을 뿐 아니라, 인간존재의 근본적인 문제를 동양철학에 입각해 심오한 사상을 이끌어 낸 점은 한국철학사에 길이 남는 성과이며 현재의 물질문명의 폐해를 반성하게 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생태계 파괴는 단순한 자연환경의 파괴를 일컫지는 않는다. 생태문학에서 논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위기는 근대문명이후 이어져오고 있는 인간중심의 일원적 세계관을 문제 삼는다. 이는 인간존재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우월설과 배타성을 야기시켰으며, 곧 인간의 수단화, 경시화를 낳았다. 따라서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주장한 동론에서 우리는 현재 야기되고 있는 생태문제와 인간존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현재 생태문학에서는 그 철학적 깊이 없이 무조건 동양사상으로의 회귀만을 주장하고 있는 분위기가 있는데, 인물성동이 논쟁은 그 얇은 철학적 사유에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동양(주역)이나 한국의 고유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유학(또는 성리학)에서도 인간의 우월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물론 유교의 인간 우위성은 서양처럼 자연에 대한 지배의 정당화가 아니라 “인간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인간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논어』의 유명한 구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올바르게 될 때에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중용) 인간은 천지의 化育을 도와서 완성시켜주는 존재로서 천지와 더불어 세계를 구성하는 三材의 중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교의 관점이 자칫하면 홍대용이 지적한 것처럼 ‘矜心’이 되어 인간중심적 사유로 전락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식 동양사상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天人合一의 사상을 심어주어 생태문학의 주장에 철학적, 논리적 근거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첫째와 연관되어 현재의 세계적 경제 시스템이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사상적 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후기자본주의는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길어야 50년에서 100년일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근대문명이후 인간중심주의를 자연중심주의라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개체생명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개체중심적 성향’과 ‘생태중심적 성향’ 가운데 생태중심적 성향을 보다 강조하자는 것이다. 개체생명의 성공적 생존을 위해서는 상충되는 듯한 두 성향의 균형과 조화가 요구된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개체중심적 성향이 극대화되어 심한 불균형 상태에 빠져들어감으로써, 마침내 인간이라는 개체생명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생태중심적 성향을 지향해 온 동양의 문화, 특히 동양문화의 주류를 형성하는 성리학이나 실학사상은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금수 초목 땅 하늘 등을 포함한 생태계 전체에 생명권뿐만이 아니라 도덕성까지 부여한 인물성동론(홍대용 포함)은 인간중심주의의 극복이라는 오늘 우리들의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여 줄 수 있을 것이다.

Ⅲ. 결론


지구의 생태파괴가 심각한 현실문제로 나타나기 시작한 오늘날, 환경생태의 파괴현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일상의 환경보호운동이란 실천적 삶도 중요하지만, 근원적으로 근대적 세계관에 대한 반성에 기초한 대안의 세계관 모색이 필요하다.

근대 이후 물질문명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는 산업사회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는 대중사회의 확산과 대중문화를 낳았다. 대중문화의 확산은 소비자와 생산자의 분리, 자기 소외에 따른 비인간화, 취향의 하향평준화에 따른 문화와 삶의 비속화, 상업주의에 의한 허위 욕망과 창출, 문화의 획일적 평준화에 의한 개성상실, 불건전한 현혹을 통한 정신적 마취와 무력화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와 도덕적 위기는 인간을 우월적으로 간주하는 서양의 이성중심적 인간중심주위가 만들어 낸 필연적 결과물들이다. 또한 인간중심적 대중 소비문화의 악마적 매혹성은 자연파괴와 인간존재의 위기를 심각하게 야기하였다. 이런 대중소비문화로부터 주체성을 확보하고 인간본연의 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탈인간중심주의가 절실히 요구된다 할 것이다. 20세기까지 지태해온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그 대안으로 종교다원주의와 탈이성중심주의가 제기되고 있다. 이른바 탈서구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국제질서의 탈서구화가 ‘多中心’적 질서로 개편되어 가면서 서구는 사회주의권 몰락이후 ‘유일한 중심’에서부터 ‘여러 중심’ 가운데의 하나로 자리매김 되어가고 있다. 생태학적 위기와 인간존재의 위기는 서구중심적 국제질서와 때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본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리학의 사상, 특히 조선조 후기에 있었던 인물성동이 논쟁은 이런 오늘날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자리 잡기에 손색이 없다. 동론이든 이론이든 성리학 자체가 인간의 무조건적 우월성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품성의 고양을 위한 학문이었으며, 그 바탕 가운데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한 학문이었다. 특히 이간과 홍대용이 주장한 인물성 동론에서 우리는 선구자적인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물건 사이에 전혀 다른 개입을 허용치 않고 그 性이 같다고 하여 생태중심적 사고를 피력한 것이다. 생태중심적 사고는 세계의 사상적, 경제적 패러다임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인물성 동론에서 알 수 있듯 이제 세상은 인간의 우월적 지위를 버려야 한다. 인간이 주체가 되든, 자연물이 주체가 되든 인간이 이 자연계에서 우월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인간과 物이 동등한 도덕적 인격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아울러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평화와 화합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것이다. 하늘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이 모두 동등한 하나임을 깨달아야 한다.

[참고문헌]

* 도서류*

1.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2. 朱紅星. 李洪淳. 朱七星 지음, 김용문. 이홍용 옮김, 『한국철학사상사』, 예문서원, 1993.

3. 주희, 김혁제 校閱, 『논어 집주』, 명문당, 1996.

4. 주희, 김혁제 校閱, 『맹자 집주』, 명문당, 1996.

5. 주희, 김혁제 校閱, 『대학 집주』, 명문당, 1996.

6. 주희, 김혁제 校閱, 『중용 집주』, 명문당, 1996.

7. 주희, 성백효 역주, 『논어 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1.

8. 주희, 성백효 역주, 『맹자 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1.

9. 주희, 성백효 역주, 『대학. 중용 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1.

10. 프란츠 알트 지음, 박진희 옮김, 『프란츠 알트의 생태적 경제기적』, 양문出, 2004.

* 논문*

1. 최영진, 「인물성동이론의 생태학적 해석」, 『한국유교학회 유교사상연구』, 1998.

2. 류초하, 「성리학적 인물성동이론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 소』제12집, 1995.

3. 김상진, 「고산구곡가의 성리학적 생태인식」, 『시조학논총』 제 20집, 1995.

4. 배종교, 「호락논쟁에 있어서의 인물성동이론」,『한국유학의 철학적 전개』, 연세대학 교 출판부, 1996.

5. 윤사순, 「인성물성의 동이논변에 대한 연구」, 『한국철학사』, 고려대 출판부, 1996.

6. 이상익, 「호락논쟁의 근본문제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한국철학 석 사학위』, 1997.

7. ?, 「호락학파의 인물성동이론에 관하여」, 『한국철학회논문』, 1996.

8. 유명종, 「인물성동이론과 호락시비」, 『조선후기성리학』, 이문出, 19

작가의 이전글리얼리즘 개념과 그 시적 세계의 한국적 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