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대를 정리한 나의 영화!
◆ 시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며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 <밴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음으로 가는 존재라고 할 때, 이런 시간의 니힐리즘을 길들이고 정복하는 방법은 영원회귀를 통해 자아의 연속성을 찾는 일이다. 동양의 시간은 순환적ㆍ일원적 시간으로 무한 반복가능하기 때문에 다함이 없는 존재론적인 시간이고, 이를 통해 존재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다. 존재의 동일성 확보는 이승에서 내 존재의 일회성과 허무함을 극복하는 길이요, 영원한 회귀를 하는 일이다.’
박사논문(서정주 시에 나타난 동양적 시간의식 연구)초록에 있는 글 중의 일부다. 나의 30대는 어쩌면 이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 존재했고, 결론적으로 박사논문을 쓰면서 다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일까?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끝없이 나에게 질문하고 학문적으로 파고들었지만 여전히 대답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시간이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일까…’ 정말 운명이란 게 있는 것인지, 나의 30대 시간은 나를 철학과 유학준비생에서 고시생으로, 고시생에서 문학박사로 이끌어 왔다. 지난해 통과된 박사논문을 다시 한 번 슬쩍 보면서 반문해본다. ‘나에게 시간이란… 지금의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그러자 박사논문을 막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보았던, 그것도 내 논문주제와 비슷해 아주 인상적으로 보았던 이 영화 ‘밴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가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무던히도 열심히 공부했다. 제대 후 복학하면서부터 일본 유학을 꿈꾸며 철학공부를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아침 7시 도서관에 도착하여 밤 9시 도서관을 나오는 생활, 이런 별보기 생활을 3년 반이나 했다. 그러나 철학과를 사라지게 만든 대학의 신자유주의인 학부제 실시, 졸업당시 IMF발생, 유학비를 마련할 수 없는 제정상태 등 이런 저런 문제로 나는 유학을 가지 못하고 아버지 권유로 행정고시를 했고, 적성에 맞지 않은 탓인지 머리 나쁜 탓인지 결국 실패했다. 행정고시를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30대 중반에 심각하게 진로문제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을까? 이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번민하던 중, 고등학교 때부터 써오던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지금 보면 웃길 정도로 수준 은 낮지만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써왔던 것이다. 순간 내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바로 이거다.’ ‘유레카!’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나도 알 수 없었던, 의식 저 밑에 있던 또 다른 내 꿈을 찾았다. 시인이 되고 싶었다. 집에서는 고시 계속한다고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하고 나는 시 창작 공부를 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학자 스타일인 나는 시인도 되고 싶었지만 학자가 더 되고 싶었다. 그래서 국문학을 들여다보았다. 국문학베이스가 거의 철학이라는 것을 알고 뛸 듯이 기뻤다. 철학은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자신 있는 분야였다.
완전히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 한 지방대 국문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하였다. 내 나이 36이었다. 물론 그 중간에 잠시 일도 하고 국문학 공부도 하던 중 등단하게 되어 시인이 되었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수많은 일들이 내 나이 30대 초중반에 터졌다. 견딜 수 없는 일들이라고 그땐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다잡고 또 다시 옛날 학부시절처럼 열심히 문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문학박사가 되었다.
이렇게 10여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많은 사건이 일어났고 그만큼 힘들었다. 매 순간순간이 인생의 중요한 시점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 인생의 가장 결정적 순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 10여년… 나는 행복했을까. 아니면 불행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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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밴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에서는 불행했던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라도 행복한 일상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도 인생의 일부분이고 이것이 원처럼 순환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순환하는 시간에서 어떤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때가 되면 저절로 찾아오는 줄 알았다, 사랑도 행복도. 그게 아니란 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고 영화는 말한다. 70대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고 어려지는 밴자민, 어린아이로 태어나 계속 늙어가는 우리들! 그러나 변하는 건 같다. 머물러 있지 않고 변해서 도달하는 그 종착점은 모두 같다. 바로 죽음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어떤 관계로 만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영화도 이와 같은 질문을 한다. “고의든 아니든 끝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삶은 무수한 상호작용의 연속이다.” 영원한 건 없다며, 굳이 있다면 변화하는 시간만이 영원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시간 속에 무엇을 묻어야 할까. 의도한 대로 나는 내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뜻했건 뜻하지 않았건 우리는 끝없이 변해가며 관계 속에서 영원의 시간을 살고 있다. 언제나 소중한 것은 그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이 소중했다는 것을 깨닫는 법! 사랑도 우정도, 관계도 삶도 끝없이 잃어가며 완성되는 것, 우리는 그 영원한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는 시간의 의미를 통해 내 존재의, 내 인생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 소중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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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없는 풍경
비가 오고 있었다
그녀가 말없이 떠났던 그때
흘렸던 슬픔이 눈물이었는지 비였는지 기억이 없다
화려한 꽃잎이 제 생을 낙화시키고 있었고
나는 그 비련의 풍경을 비를 맞으며 가슴속에 담았다
오랜 기다림
그리고 무수한 시간
멀리 왔건만 잊혀지지 않는 풍경들
기다림이 사라지던 날
이미 지워진 기억 속에서 그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왜 오지 않나요
기다림의 시간이 상처로 싹터요
변한 것 없는 낯선 풍경 속에서
나는 또 내 기억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멀리 왔을까
그 공간만큼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제 스스로를 잃고 나를 떠났을까
떠났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나의 기억
그리고 잊혀진 관계들
풍경 속 그녀는 지금도 나를 기다리건만
지키지 못한 약속을 오늘도 지킬 수 없는 나
상처의 싹은 기다림과 떠남으로
비와 꽃잎을 다시 피우고
이 비극적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나는 다시 그녀를 떠나보낸다
만날 수 없는 생의 결핍
풍경 없는 풍경 속에서
날 꼭 붙잡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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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 누구나 당시는 감당할 수 없이 가슴 찢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이별이 나를 성장시키고 있음을 나는 안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아름다운 이별이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별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별 중 뜻하지 않은 가족과의 이별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일 것이다. 이 슬픈 이별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가족의 중심인 엄마의 죽음을 소재로 한 영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벌써 7년! 나는 대학 강사로 새 삶을 살기 시작했다. 영화가 개봉하자마자 학부수업을 마치고 근처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제 서서히 아버지의 부재가 느껴지는 즈음, 아버지와의 이별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고, 이 영화가 금방 영화관에서 내려갈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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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설마 설마하면서도 불안감에 휩싸여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깜박 잠이 들었을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자마자 즉각 반응하여 깼다. ‘띠리리링~’ 나는 너무 겁났다. 새벽이었다. 이 새벽에 울리지 말아야 하는 소리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버지가 위독하시다. 운명하실 것 같다. 우리도 병원으로 가는 중이다. 빨리 집으로 내려와라.”
휴대전화로 들려오는 큰누나의 목소리가 다급했고 들떠있었다. 지난 주 큰누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었다. 며칠 뒤 아버지 생신 때 아무 선물도 사오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있다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설마설마 했다. 그렇게 강건하고 위대한 산처럼 느껴졌던 분이 작은 교통사고를 당해 저세상으로 가실 거라곤 전혀 생각 못했다.
우리시대 아버지는 대체로 그러겠지만 나의 아버지도 가부장적이었고 아주 엄한 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만능 해결사였다. 집안 대소사는 물론 손 안 대면 해결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집밖의 크고 작은 사건도 아버지가 나서면 척척 해결되었고 우리 집안에서도 일인다역이었다. 집을 고치는 목수일, 전자제품 고치는 전기기사일은 물론이며 치과의사, 내과의사, 심지어 외과의사이기도 했다(지금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내 어렸을 땐 간단한 치통이나 복통, 외상은 아버지가 치료해주셨다). 아버지는 마치 신처럼 여겨졌다. 위대한 거목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영원히 우리 곁에 당당한 모습으로 남아주실 것만 같았다.
그랬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의식 없이 15일 동안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나실 거라곤 정말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충격 그 자체였고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집안으로 들어와 당당한 그 목소리와 모습을 보여주실 것만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아버지가 안 계신 것이 현실이다. 이제 아버지 없는 삶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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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며느리이자 현모양처인 인희(배종옥), 아내가 아프다는데도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남편(김갑수), 자기들만 아는 철없는 자식들…. 인희는 결국 암에 걸려 죽는다. 이렇듯 영화는 신파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었다. 15년 전 드라마에서 새로 추가된 것은 주인공 엄마 인희의 남동생과 그 아내가 나온 다는 것이다. 그나마 전의 드라마와 차별화된 것이어서 지나친 신파에서 탈출하는 듯하나 이 부부의 설정도 인희를 괴롭히는 존재(노름에 빠진 남동생과 치고 박고 싸우는 그의 아내), 또는 그녀의 아픔과 죽음을 부각시키는 존재로 나와 오히려 더 신파의 경향을 띠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는 완벽한 신파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럼 이 영화가 신파라서 볼만한 영화가 아닐까? 철지난 구닥다리 영화로만 치부해야 할까? 그러기엔 우리 현재의 모습이 너무나 메마르다. 세상은 무서울 정도로 각박해져가고 있고, 무한경쟁이니 뭐니 하면서 1등만을 기억하는 세상에서 평범한 행복을 꿈꾸는 것 자체가 힘들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무엇을 잃어가고 있으며 무엇을 꿈꾸어야 할까? 아니 꿈을 꾸기 전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영화는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소중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가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 영화는 우리가, 우리 사회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지를 묻고 있다. 나에게,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최소한 지키며 살아가자는 이 빤한 메시지를 21세기 신파영화에서 기분 좋게 확인하였다면 지나친 말일까…
통증자각은 이미 몸이 죽는다는 신호! 고통을 느낄 땐 죽는 일만 남아 있음을 우리는 모른다. 왜 우리는 이렇게 항상 늦게 느끼고 후회한 뒤에 깨닫는 걸까… 깨달을 땐 이미 떠나고 난 뒤인데.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남기랴… 삶이 위태롭다, 삶이 불안하다… 어긋나기만 하는 삶! 삶은 끝내 나를, 인생을 배반하고 만다! 무엇을 이별해야 하나! 누구와 이별해야 하나… 난 아직 이별할 준비가 안 되었는데… 그래도 이별해야 한다면 ‘그동안 고마웠어! 그리고 미안해! 잘 가!’ 이 한 마디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이렇게 끝났다. 7년 전 아버지와의 이별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아무 말도 못한 채…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아버지와의 이별을 통해 나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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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한 마리 지저귄다
덧든 봄날 아침 새 한 마리 지저귄다
창 밖에서 언제나 지져겼던 새
나는 이제야 새소리를 듣는다
새가 지저귀는 동안
아버지는 시간의 윤회 속으로 떠났고
어머니는 시간과 공간의 주술적 경계에서 서성이고
그녀는 흐르는 노을만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했는데
시간은 흐르고 흘러
만날 수 없는 공간을 형성하고
아쉬움과 그리움만을 그 속에 켜켜이 쌓는다
왜 하지 못했던가, 그때
왜 듣지 못하는가, 지금
온전히 만날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알면서 후회하고
후회하면서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면서 만나지 못한 채
언제나 떠나보내야만 하는 잔인한 삶
새 한 마리 지저귄다
그 새소리가 들리는 지금
나는 변화하는 영원 속으로 들어간다
모두를 떠나보내고
나마저 떠날 준비하며
지는 노을을 한없이 바라본다
무엇을 기억하며
무엇을 간직해야 하는가
지저귀던 새 한 마리
날갯짓하며 훨훨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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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많은 집
돌돌돌 냇물이 흐르고
얼굴 창백한 여인이 목을 적신다
물은 여인의 목을 타고 깊은 기억 속으로 빠져
수북한 시간의 먼지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운명의 문신을 또렷이 들추어낸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동그랗게 부른 배를 한 손으로 받치며
여인은 물 위에 집을 짓는다
씻어준 상처, 그 뒷면에 또 다른 상처를 입히는
물, 그 물 속으로 여인은 부풀어 오른 배를 가른다
아직 달도 채우지 못한 새끼들,
탄생의 울음소리 채 멈추기도 전에
벌겋게 변한 물 속에서 파도 놓은 삶을
잔인하게 살아남아 어미가 떠난
빈 자리를 차지하며 흘러 시간을 쫓아간다
가고 가고 돌고 돌아도
한 평 남짓한 집을 벗어날 수가 없거늘
어미는 어딜 가고 태곳적 상처만이
흐르지 않는 시간을 밝혀 주는가
떠나고 난 빈 자리의 상처는
남은 사람의 몫,
여인이 남긴 물 위의 집에서
또 하나의 생명은 제 운명의 시간을 안고
그렇게 제자리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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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한 편의 시일까?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 감성이 사라진 시대, 이 시대에 시란? 나에게 시란… - <시> -
고시원생활을 마감하고 잠시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내 손으로 돈을 벌고 싶었고 땀을 내고 싶었다. 그리고 틈틈이 시창작 공부와 문학공부를 병행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운 좋게도 한 출판사에서 공고한 시공모전에 당선되어 등단하게 되었다. 내가 시인이 된 것이다. 기쁨이 없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두려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하지 않았던 나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시인이라니…’ 나의 아주 작은 꿈이 현실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쁨이 크지 않았던 이유가 있다. 현실적으론 내가 주목받거나 유명한 시인이 아닌 것이 이유이고, 근본적으론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에 시란 과연 무엇인지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요즘은 시인을 무슨 구닥다리인간쯤으로, 잉여인간쯤으로 여기는데, 그래서 현실적으로 아무 소용없는 시라는 것에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이전엔 철학자가 되고 싶었고 지금은 문학가ㆍ시인이 되었는데, 나는 왜 이렇게 현실에서 고립되는 학문이나 직업만을 선호하는지 참 한심스러웠다. 아니, 인문학을 외면하는 현실에 어쩔 수 없이 내 자신이 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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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이의 시체(자살)가 강물에 떠내려가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이 영화의 제목은 <시>다. 역설이다. 시가 사라진 시대, 시를 왜 쓰냐고 묻는 시대, 시를 개뿔로 생각하는 시대에 시란 무엇인가? 감독은 이 진지한, 문학적이고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런 질문을 살리기 위해 실제 유명한 김용택 시인이 나와 시 강의를 한다.
사과를 수강생에게 보여주고는 사과를 진실로 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 진짜로, 진정으로 사물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시인… 나도 시인인데 그 대사를 보면서 ‘나는 ‘사과’를 진실로 본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은 조금은 생뚱한 대답을 한다. 주인공 미자의 입을 통해. ‘사과는 보는 것보다 깎아 먹는 거야.’
인문학에 무슨 정답이 있겠느냐마는(그렇다고 정답이 없다는 말은 아님) 시를 쓴다는 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 사물의 본질을 본다는 것이라는 김용택 시인의 말을 떠올려 본다. 진실로 그러한가? 나는 시를 쓸 때 아름다움을 보려고 하였는가, 사물의 진실한 면을 보려고 하였는가. 답은 모르겠다, 이다. 그러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이 사물의 본질인지…
감독이 ‘시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단순히 시가 사라진 시대를 아파해서 묻는 말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물질적으로 바뀌었지만 인간에게는 불변의 것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불변의 것들을 안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가령 성폭력을 저지른 너(손자)의 잘못, 그것만은 최소한 깨닫고 살아야 인간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또는 돈으로 잘못(성폭력을 저지른 자기 자식들의 행위)을 덮으려고 하는 사람들(성폭력 가해자 부모들)의 뻔뻔함과 수치심도 모르는 인간의 이기심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사람다운 사람은 되자! 그것이 시의 마음이고 시인의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미자에게 “시를 왜 배웁니까?” 라고 묻는 남자(안내상)에게 최소한 ‘너는 인간이냐’ 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성폭력을 한 여학생이 죽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손자! 손자는 무심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과자를 먹고 식사를 한다. 참 편안한 일상을 즐기는 손자. 가장 인간다워 지려는, 그래서 시를 쓰려는 할머니(미자)가 같이 동거를 한다. 이 또한 얼마나 역설적인 상황인가. 가장 아끼고 소중한 손자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극악무도한 성폭력을 한 가해자라니. 이런 삶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찾아야 하는가. 인생이란 시처럼, 시인의 생각처럼 아름답지 않은데.
영화에서 김욕택 시인은 강의 마지막에 수강생들에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말해보라고 한다. “내 인생에서 아름다웠던 순간!” 어떤 이는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어떤 이는 아이 낳는 순간을, 어떤 이는 바람 피는 순간을 말한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웠던 순간은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말 그대로 그것은 순간일 뿐. 인생은 대부분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아름다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살아야 하는 것, 그것이 인생! 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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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픈 할아버지를 씻겨주며 근근이 살아가는 미자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인 섹스의 상대가 대어준다(고전적으로 문학에서 비는 남자의 정액이나 사랑을 상징하는데, 이 영화에서도 비는 이런 의미를 조금 좇고 있다. 즉 미자는 처음에 할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다가 치매 등 여러 가지 비애를 겪는다. 그리고 밖에서 비를 맞는다. 서럽게 운다. 이후 곧바로 할아버지에게로 와서 할아버지를 씻겨주고 할아버지와 섹스를 한다). 자신이 창녀가 된 것일까. 뒤늦게 인생을 배워나가는 것일까. 미자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살구는 땅에 떨어져야 맛이 있듯 사람도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져야 인생을 제대로 아는 것인가. 그런 사람이 진정 인생을 아는 사람인가. 그래야 시를 쓸 수 있는가.
피해자(여학생)의 사진을 식탁에다 갖다 놓아도 아무 죄책감도 못 느끼는 손자. 자신마저 치매에 걸려 인생은 더욱 암울해지고… 결국 미자는 홀로 떠난다. 마지막 시 한 편 남기고. 이 처음이자 마지막 시 한 편 남기려고 그녀는 그 많은 세월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했는가. 엔딩 장면에서 여리고 맑은 소녀가 미자의 시를 낭독한다. 순수하고 영혼 맑은 소녀의 목소리가 시를 읊는데 강물은 무심하게 말없이 흐른다. 흘러간다.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무엇을 되찾아야 하는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는 이 영화는 인생이 무엇인가, 이 시대 시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시종일관 낮은 톤으로 현장의 모습을 담으며 꾸밈이 없다. 일상이 지리멸렬하다고 느끼는 사람, 인생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모두 꼭 이 영화를 보며 성찰하자, 라고 하면 이 또한 고리타분한 말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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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창동 감독 영화, ‘시’를 보고-
그녀 무엇을 보고 갔는가
한 세상
얼마나 아파하고 갔는가
삶을 위로할 수 없어
고통을 위무하려 했던
그녀
아름다움을 찾은 순간
떠나야만 했던 생
그녀는 슬픈 시 한 편 남기고
맑은 영혼을 강물에 흘러보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인생
그러면 안 되는 삶
그 경계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녀
얼마나 아름다워지고 싶었을까
시를 쓴다는 것
삶을 산다는 것
그 마음으로 한 세상 살기엔
추하다 고통스럽다 너무 삶이
그녀를 닮은 시만이
오직 그녀를 위로하며
강물을 적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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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씨년스러운, 그러나 고즈넉한 늦가을의 정취! 인생은 그런 것이다.
- <만추> -
‘늦가을’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낙엽, 상념, 바바리코트, 헤어짐, 인생… 등등. 늦가을엔 막 사랑하기 시작한 연인들의 사랑스런 모습보다 사랑하다 헤어지는 장면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그것도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이 떠오르는 이유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상큼한 사랑이 화창한 봄에 해당한다면 비극적 사랑은 늦가을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영화 <만추>도 운명적이고 비극적 사랑에 해당하는 영화다. 그것이 인생이라며.
이제 막 마흔에 접어든 내가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만큼은 아니지만 참 힘겹고 지난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철학과에서 국문학과로 전과하여 결국 나는 원래 꿈이었던 학자가 되었고 뜻하지 않게 시인이 되었다. 세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전공책을 출간한 학자가 되었지만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용돈 겨우 벌어 사는 대학 강사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지나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몇 명의 여자와 짧았지만 강렬하게, 때론 가슴 저리도록 아프게 사랑했으며 헤어졌다. 왜 헤어져야했는지 이유도 모른 채 이 영화처럼 운명적이고 비극적으로 헤어졌었다.
인생이란 참 어렵고 힘들다. 그것이 무엇이든 뜻하지 않게 만났다가 운명처럼 사랑하고 비극적으로 헤어져야 하는 것! 이것이 인생이라면 나는 너무 비관론자일까. 내 인생도 대체로 그랬다. 유학을 가지 못한 것, 고시 실패한 것, 전과를 한 것, 학자가 된 것, 시인이 된 것, 한 여자를 만나 뜨겁게 사랑한 것, 그리고 헤어진 지금 나는 살짝 미소를 짓는다. 내가 짓는 미소지만 나는 그 미소의 의미를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오지 않는 현빈을 기다리며 탕웨이가 짓는 미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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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만추>는 제목만큼이나 늦가을 을씨년스러운 시애틀의 풍경과 이 늦가을이라는 시간에 힘들어하는 두 젊은 남녀의 만남을 고즈넉하게 보여준다. 인생은, 삶은 나이와 상관없이 늦가을처럼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진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줄거리는 있는 듯 없다. 그래서 제목에 더 맞다. 이 영화는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아픔을, 상처를 따라가는 영화다. 그래서 인생을, 삶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애나(탕 웨이)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는 생략한다(그래서 이 영화는 더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다. 결혼생활의 고통이 원인이 되어 애나가 고통 받는 것만은 아님을 암시하듯). 시퍼렇게 멍든 애나가 남편을 죽이고 감옥에서 7년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휴가차 감옥에서 나오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한 눈에 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는 안 보이는 훈(현빈)이 누군가에게 쫓겨 급히 버스에 올랐지만 버스 값이 없어 애나에게 돈을 빌린다. 애나는 어머니 장례식만 마치고 바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둘은 상대방에 대해 거의 묻지 않고 짧은 하루의 데이트를 시작한다. 주변의 인물들은 거의 나오지 않은 채 영화는 이 두 남녀에게 집중한다. 그래서 제목처럼 만추의 느낌대로 흐름은 느릿느릿하고 필름은 시간을 거꾸로 흐른 듯 무성영화처럼 소박하다 못해 투박하다. 안방에서조차 고화질 디지털화면을 보는 시대에 이 영화는 정말 시간이 멈춘 듯, 시간이 뒤로 돌아간 듯 질박하기 그지없는 화면으로 뚫어지게 두 남녀의 인생에 집중한다.
현빈과 탕웨이가 놀이공원에서 데이트하던 중 실사처럼 나오다 필름화면으로 바뀌어 그 필름 속 배우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장면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압권이다. 마치 무성영화의 변사를 흉내 내 그들의 처지를, 아픔을, 관계를, 꿈을 투사한다. 거기다 필름의 남녀배우들이 아름다운 춤을 추다(뮤지컬처럼) 하늘로 날아간다. 이 환상적인 장면은 아주 독특하고 뛰어난 미장센이라 할 만하다. 내면 투사된 이 장면은 그들의 꿈이요 희망일 것이다.
탕웨이는 살인자로 삶의 종착점에 서 있고, 현빈은 피해다니고 쫓기는 삶을 살면서 인생의 종착점에 서 있다. 이 둘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단 하루의 데이트는 그들에게 무슨 의미일까? 영화는 끝날 때쯤에서야 둘이 서로를 좋아하게 되고 조금씩 알아 가는데 그들에게 남은 것은 헤어짐뿐이다. 2년 뒤 만나자고 한 약속은 지켜질까!
출옥한 탕웨이는 약속한 장소(어느 카페)에서 현빈을 기다린다. 한참을 기다리지만 현빈은 나타나지 않는다. 카페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진다. 그녀가 기다린 것은 무엇일까? 현빈일까? 시간일까? 아니면 자신의 인생일까? 기다리던 현빈이 끝내 오지 않자 탕웨이는 살짝 미소를 머금는다. 알 수 없는 그녀의 묘한 미소! 그녀의 이 미소는 무슨 의미일까? 실망? 허탈? 자괴? 자신만을 위한 삶의 의지? 또 다른 사랑에 대한 갈망?
현빈은 왜 오지 않았을까. 알고도 오지 않았을까. 올 수 없는 상황이었을까. 한 사람이 기다리면 한 사람은 떠나고, 한 사람이 떠나면 또 한 사람은 기다리는 것! 그것이 인생 아니겠냐며, 그래서 인생은 참으로 엇갈리기만 하는 것, 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엇갈리기만 하는 만남! 그래서 그들에게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아픔으로 머물러 있다. 힘들고 고통스런 인생! ‘인생이란 무엇일까?’ 탕웨이의 얼굴에 카메라가 집중하는 이유이자 물음이다. 늦가을에 보면 더 좋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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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에 걸려있는 것들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노오란 은행나무가 만추에 걸려있다
황홀한 이 빛깔을 담으려고 사진 찍는 이들 사이에서
나는 지금여기 흑백사진을 홀로 찍는다.
어둠이 어둠으로 일찍 쉬는 시간
바알간 단풍나무가 늦게까지 가을에 걸려있다
형용할 수 없는 이 밤풍경을 계속 찍어대는 사람들
나는 지금여기외 파노라마사진을 홀로 감는다.
어디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
몇 번을 윤회해도 만날 수 없는 시간
나는 나의 공간에서 홀로 멀어지고 있다
만추에 걸려있는 나의 생이 지금여기에 없다.
우리는 어디에서 만나고 언제 헤어지는가
시간은 나와 너 사이에 비선형적이고
공간은 너와 나 사이에서 역윤회한다
만남이 없는 헤어짐, 헤어짐부터 시작하는 만남
삶의 내면이 권태롭게 산화한다.
수많은 내가 흘러 모이는 늘그막 가을
짙은 허무가 걸려있는 삶이 이글거린다
시간과 공간의 엇갈림은
내 육체와 영혼의 길항작용으로 생긴 선물
사람 그 자체가 운명인 것을
만추의 작고 짧은 미소는
내 생의 긴 여운을 입가에 머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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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을 짓는 것처럼 인생도, 사랑도 그렇게 지을 수만 있다면…
- <건축학 개론> -
첫사랑! 흔히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모르겠다. 내 경험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 맞는 말이라고 해야 하나. 확률적으로 첫사랑은 성숙하지 못한 어릴 때 하니까 당연히 이루어질 가능성이 낮을 것이다. 나이로 보나, 환경으로 보나, 성숙도로 보나 첫사랑은 이루어지기 힘든 게 사실이다. 문제는 어떻게 헤어졌는지, 현재의 삶이 어떠한지에 따라 그 첫사랑에 대한 추억과 기억이,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첫사랑만 꼭 애틋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진실한 사랑이라면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항상 애틋하고 아련하다. 남녀 간 사랑이라는 것이 특별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고, 때론 몸을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지난 사랑을 돌아보면, 한편으로는 남들처럼 마음이 아팠고 또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한 사랑 모두 이유도 모른 채 헤어졌기 때문이다(하긴 나만 이유를 모르지 그녀들은 이유가 있었겠지… ㅋ). 그런 것 보면 사랑하는 이유 수십 가지이지만 헤어지는 이유는 수백 가지인 것 같다. 사랑 앞에 ‘진실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버리면 과연 내가 한 사랑이 진실했는지 장담 못하겠지만 그때만큼은 나름(?) 진실했던 것 같다.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다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서일까. 지금 와서 지난 몇 번의 사랑을 떠올려보면 모두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
대학 4년 교생실습 때 만난 여자, 서울에서 잠시 일을 할 때 만난 여자, 대학원 때 만났던 여자, 강사 때 소개로 만난 여자(아니, 내가 짝사랑한 여자, 나를 짝사랑했던 여자들도 포함시켜야 하나… 잘 모르겠다, ㅎ)! 그 사랑이 모두 길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는 지금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여자들이다. 사랑 없인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는 한 연극인의 말이 사실일까. 단 한 순간도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사랑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자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에너지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나를 살리는 삶의 원천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현실이, 현재의 삶이 녹녹치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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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첫사랑은 아련하고 가슴 시린 것일까? 순수하고 어린 나이 때 한 풋사랑이어서 그럴까? 아니면 현재의 삶이 팍팍하고 힘들어서 그럴까?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에 대한, 그것도 90년대 대학생활을 한 30대 후반, 40대 초반이 경험해봤을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풋풋하고 때로는 순수하고 약간은 당차기도 했던 15년 전의 첫사랑이 어떻게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건축과 (첫)사랑을 연결하여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집을 짓는 과정은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보금자리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알아내고 찾아서 다시금 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과정이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는 아련하고 가슴 아픈 첫사랑의 추억이 깊이 박혀 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 이 첫사랑을, 첫사랑의 추억을 보듬고 녹여서 나만의 보금자리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일일 것이다.
건축학개론 수업시간에 승민(이제훈)은 서연(배수지)을 만난다. 음대출신인 서연은 건축학과이자 방송반 동아리 선배를 좋아해서 건축학개론 수업을 듣고 있는 중이다. 수업 과제를 하던 중 우연히 승민과 서연은 동네에서 만난다. 한 동네에서 살고 있는 둘은 이래저래 어울리게 된다. 감정표현에 서툰 승민은 서연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지 못하고 자꾸 망설인다. 이 와중에 동아리 선배가 끼어들게 되고 오해 아닌 오해로 둘은 헤어지게 된다. 15년이 지난 현재 서연(한가인)이 건축가 승민(엄태웅)을 찾아와 자기의 집을 지어 달라 제안 한다. 승민에겐 개인 첫작품이 되는 셈인데, 서연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서연의 옛집을 허물고 다시 집을 짓게 된다. 이 과정에서 둘은 과거의 오해 아닌 오해를 풀고 서로가 첫사랑이었음을 확인한다.
영화는 아주 감정적이지도 아주 세련되지도 않으면서 때론 무덤덤하게 때론 무난하게 과거의 아련하고 가슴 아픈 첫사랑을 되짚는다.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면서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어간다. 과거와 현재가 거의 동등하게 나오면서 30대 중후반, 때론 40대 초반의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은 사라진 ‘삐삐’로 의사소통을 하며 사랑한 촌스럽지만 낭만적인,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했던 그때(90년대)의 감정을 되짚는다. 90년대 아날로그의 감성이 첫사랑의 주요 감정 포인트로 사용된다. 왜 일까? 그것은 디지털이 판치는 현재 점점 무엇인가 메말라가고 잃어간다는, 그래서 현재의 삶이 팍팍하다는 반증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그러나 그 과정이 너무 무난하고 평범하다는 점이 이 영화의 핵심, 즉 장점이자 단점이다. 즉 감정의 폭발적인 사건 없이 여느 첫사랑 소재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머뭇거림과 오해로 첫사랑에 실패하게 된다는 점과 현재의 비중이 덜하다는 점 등으로 인해 조금은 아쉽기도 한 영화다. 그러나 오히려 무난해서, 즉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편집과 영상과 감정처리가 어쩌면 이 영화를 살리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첫사랑, 또는 삶이 그러니까.
승민(엄태웅)과 술을 하던 자리에서 매운탕이 나오자 서연(한가인)은 말한다. 매운탕이 제일 싫다고. 안에 뭐가 들어가든 맵기만 하면 매운탕이 되는 게 뭐냐면서 욕을 하며 운다. ‘마음에 안 들어’ 하며 괜스레 욕을 하고 울부짖는데 이 욕은 자신에 대한, 삶에 대한 하소연일 것이다. 현재의 삶이, 아니 삶이라는 것 자체가 매운탕 마냥 내 삶의 본질(내 꿈이나 열정)은 온데간데없고 현실은 맵기만 해서 매운탕이 되어버렸다. 내가 진정으로 찾고자 하던 것(이룩하고자 한 것)은 온데간데없고 맵기만 해서 너절한 삶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하소연일 것이다.
… 인생 참 힘들고 서럽다. 그래서 우리는 첫사랑에 대해 아련해하고 가슴 아파하는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것(첫사랑)이 그립고 아련한 것은 현재(의 삶)가 그만큼 힘겹고 지리멸렬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첫사랑이 오해여서가 아니라 오해인지 알면서도 그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그게 첫사랑이고 인생이니까.
알면서 후회하고 후회하면서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면서도 언제나 떠나보내야만 하는 잔인한 것이 삶일까, 첫사랑일까… 첫사랑은 첫사랑이라서 이뤄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찾은 안락을 깰 용기가 없어서일 것이다. 그만큼 현재의 삶이 힘겹고 고되기 때문인데,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둘은 결국 지난날 서로가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서로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헤어진다. 과거엔 서연이가 먼저 떠났고 현재는 승민이가 그녀를 떠난다.
그런데 왠지 둘의 헤어짐이 끝이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다시 10여 년이 흐르면 그들은 어떤 관계일까. 그들은 삶을 또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까… 사랑이란, 첫사랑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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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면
꽃이 피면 올까…
그녀는 끝내 소식이 없고
내 몸에서 일고 있는
꽃씨의 흔적,
내 몸에서 피어난 향기 없는 꽃
썩지도 않고
나를 병들게 하네
그녀에게 다 줘버린 마음…
기다림이 윤회를 거듭하여
또 다시 꽃이 피는 날
잊을 것이다
그녀도 그녀와의 추억도 그 시간도
그런 나도 잊을 것이다
나 이렇게라도 살아가야지
아무 것도 깨닫지 말고,
이제 정말 행복하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