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 심은 데 팥 나고?
학교에서 작은 포트에 강낭콩을 심어왔다.
엄마, 내가 식물 키우기 담당이에요. 라며 당시 가드닝샵을 운영하고 있던 내게 엄마만 믿겠다며 좀 도와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래 까짓 거 잘 키워서 아들 어깨 좀 으쓱하게 해 볼까 하는 생각으로 작은 포트에 심어온 강낭콩에 싹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어린싹부터 기대했던 건 단 하나, 통통하게 여문 콩 꼬투리였다. 싹이 올라오고 생각보다 잎을 많이 내며 쑥쑥 자라 하루하루가 흘렀다.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고, 포트보다 더 자랐을 때 큰 화분으로 바꿔주고 덩굴 지는 특성에 따라 지지대도 세워주었다. 의욕 있게 자란 콩은 어느새 꼬투리를 여물고 곧 콩이 그 안에서 자라났다.
누구도 콩을 심어놓고 왜 팥이 열리지 않느냐며 흙을 타박하거나 씨앗을 원망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이자, 변하지 않는 원소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육아'라는 이름의 자식농사 앞에 서면 다른말을 한다.
부모의 역할이 무엇일까?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은 정해진 이치지만 콩이 한 알의 부실한 열매를 맺을지, 백 알의 풍성한 결실을 볼지는 농부(부모)의 손끝에서 결정된다. 우리는 아이의 종자를 바꿀 수 없지만 아이라는 식물이 뻗어 나갈 '토양의 질'은 바꿀 수 있다.
알맞은 온습도, 거름이 채워지면 이웃집 팥 농사의 풍년소식에 마음이 조급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콩의 가치는 가장 콩다운 맛을 낼 때 완성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탄소가 압력을 견디면 다이아몬드가 되는데, 내가 발견한 아이가 탄소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압력을 가해도 다이아몬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글이 완성될 때마다 발견과 반성이 늘어간다.
아이가 귀여운 나머지 "이그~ 똥강아지"라고 불러주면 "나는 금강아지~"라며 인정을 갈구했다. 밥톨이가 혼자 학원 시간을 맞춰 이동하던 중에 서점 앞에서 행사로 돌림판을 돌리고 있었나 보다. 아이는 내게 전화를 해서 한 번만 돌리고 가도 되냐고 물어왔다. 나는 학원시간이 늦어진다고 단호하게 안된다고 거절했다.
가끔 내가 할머니라면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해 본다. 작은 약속들을 지켜 성실한 아이로 자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을 둘러보고 싶어 허락을 구해보는 아이의 마음을 난 읽어주지 않았다. 한 번의 공감이라도 해줬더라면... 결국 전화기 너머로 속상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제시간에 학원에 보냈지만 그래한번 돌려보고 가렴이라고 말해주지 못한걸 가끔 후회한다.
밤톨이는 성인이 될 준비를 하는 청소년시기를 거치고 있다. 여전히 둘러볼 시간보다는 압력만 가하고 있지만 이제는 아이가 가진 변하지 않는 색을 발견하고 그릇의 크기를 알고 콩인지 팥인지를 구분하고, 편안한 토양의 질을 높이는 부모가 되기로 다짐해본다. 모든 수확이 풍작일 필요도 없다. 자신이 콩임을 알고 건강하게 자라난 아이는 그 자체로 온전한 결실임을.
p.s 입춘이 얼마 전에 지났습니다.
입춘은 한 해의 씨앗을 심는 날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씨앗이던 잘 자라날 2026이 되도록
아직 조용한 이곳에서의 만남을 환영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