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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Dec 12. 2017

탈주를 위한 도시 -하노이

베트남 하노이 #1

일은 늘 다가온다.

일은 일로만 다가오는 게 아니다.

일은 감정으로 다가오고, 사람으로도 다가온다.


그래서 늘 일을 하다보면 치인다.

특히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약해진 요즘에는 더더욱. 


하노이 행은 몇 주 전 새벽에 결정됐다. 이른 술자리에 이은 이른 잠자리. 새벽에 잠에서 깨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미처 가지 못한 여름 휴가가 떠올랐다. 자학이 일상이 돼 버린 직장생활에서 그나마 챙겨야 할 휴가였는데, 휴가를 쪼개 며칠만 쓴 후 가을이 다 가도록 '남은 며칠'을 잊고 있었다. 주말을 이어 쓰면 나흘. 나흘이라는 시간은 모든 걸 뮤트하기에도, 먼 이동거리를 감내하기에도 애매한 기간이었다. 머릿속에서 몇 개의 도시 이름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거리는 지극히 물리적인 요소여서, 아무리 새벽 감성을 동원해 충동적으로 결정해 버리려 해도, 확연한 기준으로 작용했다. 그러다 떠오른 도시가 하노이였다. 


꽤 오랫동안 동남아는 나의 여행 사정권 밖이었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고, 물리적으로 가까운 그곳에는 나이가 한참 들어 패키지여행으로 가려고 했던 결심 때문이었다. 그 전에는 '최대한 멀리, 최대한 안 뻔한 곳'이 늘 여행지의 선택기준이었다. 하지만, 그 새벽 이불 속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먼 미래를 위해 그곳들을 예비해두기엔 그 이유가 옹색했다. 예약과 발권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시나 이불 속에서였다. 


#lomo    #kodak_film    #hanoi    #noibai_airport

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40여 분,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면서 

몸의 기어를 하노이 모드로 바꿨다. 


관광객으로서는 거의 준비없이 떠나왔기 때문에, 기어 전환은 쉬웠다. 최대한 흘러가는 대로 갈 것, 다음 일정은 현재 일정의 막바지에 잡을 것, 놓치는 관광지 같은 건 신경쓰지 말 것. 생각해보니 이 차에 타는 과정부터가 하노이 모드였다. 공항의 정식 택시 승차장으로 가기 전 환전 부스 옆에서, 허가증(?)을 흔들며 택시 운전사라고 밝힌 젊은 남자의 뒤를 따라 '나라시 택시'를 탄 것이다. 그를 무표정으로 무시하고 정식 택시를 타러 갔어도 무방했는데, 아무 생각없이 이 남자를 따라가도 무방할 것 같았다.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돈 버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의 능숙함 같은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15달러를 지불하고 택시가 아닌 승용차를 타고 도심으로 들어갔다. 실제로 운전한 사람은 허가증을 흔든 그 남자보다 훨씬 어려보이고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다른 남자였다. 우리 둘 다 차 안의 모기 한 마리는 결국 잡지 못했다. 

#lomo #kodak_film #hanoi #street

하노이에 간다고 했을 때, 

호치민이 더 크고 볼 게 많은데 

왜 하노이냐고 물었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다낭이 리조트가 많고 놀기좋은데 왜 하노이냐고 물었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4일 내내 하노이에만 있을 거냐고 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딱히 하려는 게 없는 여행'으로 이번 여행이 규정돼버렸다. 나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특가로 예약한 숙소는 재밌었다. 

사이트에 있던 사진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안 보여주고 싶은 건 사진에 담기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내가 예약한 방이 호텔 주방 바로 위여서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호텔 직원들이 일하고 떠드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거나, 천장이 '매우'는 아니나 '꽤' 낮다거나, 통유리로 된 창문 밖에는 바로 시멘트 벽밖에 없다는 그런 사실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불만족스럽다기보다 재밌었다. 3일 밤 방에서 잘 잤고, 일도 했고 심지어 생각도 많이 했다.  내가 필요한 공간이란 게 그리 크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오토바이와 경적소리, 가 

하노이에 가본 적 있는 친구들이 말한 첫 단어들이었다. 

직접 가 보니, 그건 단어라기보다는 끈질긴 실체였다. 


길에 선 순간, 오토바이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경적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적의 따윈 담아본 적 없는 눈빛으로 울려대는 경적들과 괘념 따윈 흘리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들은 처음엔 낯설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들이 이곳의 기표라는 걸 인정하고나서는, 그저 스쳐지나갔다. 


수없이 다가오고 멀어지는 오토바이들을 보며 나는 그들이 어딘가에 정주하고 싶을 거라고 믿었다. 어쩌면 영원히 멈춰쉴 수 있는 곳을 찾아 이렇게 계속 달리고 있다고. 그런 일방적인 해석의 기저에는, 하노이의 오토바이들이 내뿜는 조심스러움이 있었다. 그곳의 오토바이들은 조심스러운 기척으로 끊임없이 움직인다. 공격적인 질주 같은 건 없었다. 


#lomo   #kodak_film   #hanoi   #street   #hangbe_street

커피는 진했다. 


많은 카페에서 다양한 Italian style의 커피를 메뉴의 맨 위에 올려두고 팔고 있었지만, 단기 여행자인 나는 늘 맨 아래에 있는 베트남 커피를 시켰다. 어느 곳이건 맛은 같았다. 쓰고 진하고 아담했다. 블랙커피인 카페 덴(caphe den)과 달리 연유커피 카페 쓰아(caphe sua)의 잔 아래에는 포기할 수 없는 단어들처럼 찐득한 연유가 깔려있었다. 사람들은 작은 잔에 담긴 진한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그런 느린 행위에 나도 곧 익숙해졌다. 물론 희미한 두통과 의도치 않은 각성이 반복되긴 했지만.  



The young girl and lotus flowers 

(by Nguyen Sang) 


한 유화 앞에서 한참을 보냈다. 구시가 지역에서 살짝 벗어난 베트남 미술박물관(Vietnam Fine arts museum)은 직원과 관람객 수가 비슷했다. 물론 작품 수는 훨씬 많았다. 미술을 보는 체계적인 안목이 있다고는 말 못하지만, 나만의 그림을 찾으려는 욕구는 있다. 이 그림은 나를 세웠다.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한참을 눈맞춤 했다. 지겹지 않았다. 그림 속, 젊은 여자의 눈빛은 직선이었다. 

쓸데없는 배려나 쓸모없는 주저함은 담겨있지 않았다. 

'일로만 다가오지 않는 것들'에 치인 나에게, 무언의 질타와 위로를 하는 듯했다.  


첫 날 본 그림을 마지막 날 다시 찾아갔다. 도도한 눈빛 아래에서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어 한참을 앉아있었다. 부끄럽지 않았다. 휴대폰과 로모에 담긴 이 그림은 흔들리고 색감도 다르지만 다시 봐도 여전하다.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미술관에 있는 한 작품에 이어 두 번째로 즐겨찾기 해 놨다. 다시 보러 갈 것이다.  


일요일 밤, 

호암끼엠 호수 주변은 모두 봉쇄됐다. 


호수를 둘러싼 꽤 큰 길 모두가 차와 오토바이 대신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곳에 다양한 소리들이 있었다. 휴대폰의 녹음기능을 켜고 티셔츠 앞주머니에 꽂은 채 1시간 남짓 그 소리들을 담으며 한 바퀴 돌았다. 


외국인과 현지인, 기타 솔로와 밴드를 망라하는 다양한 종류의 버스킹, 작고 화려한 색깔의 물건들을 파는 노점상들, 사람들에게 빙 둘러쌓인 채 나무토막을 쌓는 사람들, 도로에 분필로 선을 그어놓고 공기놀이(?)를 하는 여러 팀들, 깔끔하게 갖춰 입고 탱고 춤을 추는 아줌마들, 바구니 하나에 여러 가지 과일을 담아 비닐봉지에 잘라 파는 바구니 노점상들과 장난감 차를 빌려주고 빌려타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 그들은 최대한 자기를 뽐내고 있었다. 드러내는 자와 구경하는 자 사이의 경계와 벽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거리낌없이 여유로웠고 부끄러움 없이 즐기고 있었다.  나와 달라서 편했다. 나는 적진에 위장잠입한 2차대전 스파이처럼 이방인 색깔을 지우고 소리와 소리 사이를 유영했다. 


#hanoi   #hoamkiem_lake    #night    #people



셋째 날 저녁, 

롱비엔 역과 롱비엔 철교까지 걸어갔다. 

딱히 특별한 동기는 없었다. 

무료했고 갈 곳이 없었다. 


호텔에서 준 지도의 거리들엔 이름이 생략된 곳이 많았지만 모양은 선명했다. 굳이 휴대폰의 지도를 들여다보지 않고 종이지도를 두 번 접어 뒷주머니에 넣고 찾아갔다. 월요일 저녁 퇴근길이었다. 그곳의 사람들에겐. 난 하나의 풍경의 보러 갔지만, 그들에게 난 풍경의 점조차 아니었을 것이다. 에펠탑의 그 에펠이 설계했다는 롱비엔 철교의 중간까지 걸어갈 심산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살짝만 발을 헛디디면 오토바이 치여 죽거나 아래 도로로 떨어질 것 같은 좁은 인도 때문이었다. 걸어서 건너라고 만든 다리는 아니어서 가로등도 없었다. 나를 앞질러 간 독일 노부부-엄밀히는 독일어를 쓰는 노부부-는 조심스럽게 어둠 속 롱비엔 철교의 풍경으로 사라졌다. 나는 초입을 조금 넘어서까지만 겨우 가서 사진을 찍고 다시 롱비엔 역 쪽으로 나와서 안도했다. 


시골의 간이역 같은 롱비엔 역 열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렸다. 호객을 하는 오토바이 택시기사들이 몰려들고 다양한 나이 대의 사람들이 큰길로 걸어나갔다. 걸어가는 사람들 무리에 슬쩍 껴서 일부러 느리게 걸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에겐 그날 하루가 온전히 묻어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활기가 있었다. 

요즘의 나에게 없는 것이었다. 

아마 누군가가 나를 봤다면 내 얼굴에서 부러움 같은 걸 발견했을 것이다.

#hanoi   #night   #longbien_bridge
#lomo    #lomo_xproslide_film    #hanoi   #night   #longbien_station   #go_back_home

하노이는 여행자에게 무심한 곳이었다. 


여행자 거리의 숙소와 기념품 샵, 마사지 샵, 식당 들의 사람들조차 무심했다. 처음엔 혼자 다녀서 굳이 호객 권유를 당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럿이 다니는 여행자들에게도 사람들은 무심했다. 호객행위는 가볍고 단발적이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그 풍경이 내 눈엔 어울렸다.


 정작 제대로 탈주하지도 못하면서 탈주를 꿈꾸고만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하노이는 다정한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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