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는 축약이 없는 관계였어

#구이린

by 너무 다른 역할

<언젠가 나였던 나에게>는

여행수첩과 일기장에 남아 있는, 과거의 나에게 말을 거는 시도입니다.

지금의 내가 더 나아졌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4월 4일 (월)


오늘 새벽. 꽤 한참 동안 울었다. 어쩌면 난 토해내어야 할 거무끄레한, 반쯤의 부식되고 반쯤은 원래의 질료로 남아있는 덩어리를 속에 담고 있는지 모른다. (...)

제대로 부식되지 않는 건 토해내어 지게 마련이다. 이미 부식되어 버린 부분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서 대신 눈물 같은 걸 꿉꿉하게나마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꿈은 죽음과 후회와 미안함을 만들어내었다. 양쪽 옷의 팔소매가 다 젖도록 눈물이 나왔다. 눈물에선 온기와 축축함이 느껴졌다. 당연한 듯이. 그것의 일상적 질감에 대해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다. 감정을 송두리째 부유하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새벽, 눈물을 흘리면서도 난 되도록 잔인하려 했다.



니가 울던 구이린 역 뒷골목의 초대소를 기억해.


빨간 간판을 달고 있는 마사지촌을 지나 있는 낡은 건물의 초대소. 너와 친구는, 며칠 전 동행을 시작한 중국 친구가 치약 없이 여행을 하고 있었단 사실에 놀랐었어. 비누 하나 비치돼 있지 않은 허름한 욕실, 넓지만 뭔가가 갖춰져 있지 않은 방에 나란히 있던 침대 3개. 그날 술을 먹었던가 안 먹었던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다음날 새벽 쿤밍 행 기차를 타야 했기 때문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 그리고 새벽에 너는, 다른 두 명이 들을까 봐 소리를 삼키며 울었어. 꽤 오랫동안, 이라고 기억하지만 또 모르지. 고작 몇 분이었을지도.


여행을 시작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던 날이었고,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한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았을 거야. 아래위로 한껏 잔뿌리와 잔가지를 펼치던 너의 애정이 갈 곳이 없어진 지 두 달이 안 됐던 거지. 애정의 출구가 없다는 건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야 (라고 지금 쓰고 있지만, 결혼도 연애도 하지 않는 내가 할 말은 아닌 듯도 하네). 졸업 후 바로 떠나온 길 위에서, 넌 앞으로의 사회생활에 대한 걱정보다 출구를 찾지 못한 너의 애정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했지. 내 생각으로 그건, 자기연민과 나르시시즘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는 듯해. 아니구나, 자기연민도 나르시시즘에 속하니... 그냥 자기연민이라고 하자. 왜냐하면, 넌 상대방을 대상으로만 생각했었으니까. 헤어지자 말한 얼마 후, 물리적으로 떠나와서는 넌 그녀를 똑바로 떠올리지 못했어. '첫 이별에 힘들어하는 너'가 주인공이었고, 그녀는 희미하게 뭉개진 배경 같은 게 아니었을까. 넌 예의 없이 이별을 했고 예의 없이 추억을 시작한 거야. 지극히 이기적으로. 그날 새벽, 꿈속에서 그녀의 안 좋은 모습을 보며 느낀 죄책감 역시 니가 주인공인 감정이었던 거야.


널 몰아세우고 싶진 않아.
고작 스물다섯 살이어서가 아니라,

첫 이별,이었으니까.


누군가에게 자문을 구해선 안 되는 과정이었으니까. 너나 그녀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첫 실패,였으니까. 예의가 끼어들었다면 오히려 둘 모두 더 힘들어졌을 거야. 이별 과정을 더 길게 만들었을 테니까. 성숙한 인간인 듯 객관적인 표정을 지어야 했을 테니까...니가 새벽에 깨서 운 건, 슬퍼서라기보다 놀라서였을 거야. 잊고 있던 얼굴이 선명해서였지. 어찌할 바를 몰랐지. 넌 아침에 세수를 하면서, 네 달을 계획한 여행 따위, 나름 세웠던 인생 계획 따위 다 버리고 돌아가서 다시 시작할까 생각하기도 했어. 하지만 잠깐,이었지. 그래서 넌 아침에 서둘러 기차에 올라 일기장을 펴고, 잔인하려 했다, 고 쓰며 자기 위안을 한 거야.


시간이 흘러 몇 번의 연애와 이별을 거친 지금, 만약에 다시 돌아가 그 새벽, 초대소 침대에서 눈을 뜬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이별은 연속성이 없기에 별다른 차이는 없을 거란 걸 전제로 얘기한다면, 나이 드는 게 성숙의 과정이 아니란 걸 전제로 얘기한다면,


그녀와 같이 한 기억을 좀 더 찬찬히 정리해 뒀으면 해.


놀랐건, 이기적이었건 간에, 새벽에 울고 난 후 넌 며칠 동안 그녀의 얼굴만 떠올렸지. 하지만 그 얼굴이 내내 슬픈 표정이어서 넌 계속 생각할 수 없었어.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넌 그녀를 다시 만나지도 않았어. 물리적인 사실이 그래. 둘 사이의 기억은 그렇게 급작스럽게 중지되고 정리되지 않았던 거야. 첫 이별이라고 특별히 더 아프지 않아. 그 말은, 첫 이별이라고 특별히 더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자기연민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그건 익숙해져야 하는 부분이야.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같이 했던 시간들을 왜 그렇게 묻으려고만 했을까. 왜 내 몸에 남길 생각은 못 했을까. 그랬다면 미안함과 힘듦이 있긴 했겠지만, 이후의 사람들에게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그녀와 너는 축약이 없는 관계였어.

축약할 이유와 시간이 없었지. 좋아하기 바빴으니까. 같이 있는 시간이 늘 짧다고 느꼈으니까. 애정이 익숙함이 되고, 익숙함이 소홀함으로 변한 후에도 마찬가지로 축약할 수 없었어.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둘 사이 이외의 일들을 같이 얘기할 가장 좋은 상대였으니까. 서로가 힘든 걸 토로하는 게 자주 싸움의 원인이 됐지만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인 과정들을 스킵해서 짧게 정리할 수 없는 관계. 그게 너와 그녀의 관계였어. 그리고 그런 이유로 둘은 길게 사랑하고 짧게 헤어졌어. 그 이후에 기억을 묻어버린 후에도 마찬가지네, 축약이 없던 건. 짧게나마 정리하지 않고 소멸. 같이 한 시간도, 그 시간 속에 있는 그녀도 너도 같이 없어졌던 거야.


충고라고 생각하진 마.
'너'에서 '나'는, 성숙의 길을 밟진 않았으니까.

부탁, 같은 거야.

스물다섯 살 이후에도 넌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할 거야. 두려워하지 말고, 너와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해 둬. 어떻게 사랑을 하게 됐고, 그로 인해 니 삶이 얼마나 변했었는지를. 사람에게 감정을 품는다는 게 너라는 인간의 조건을 어떻게 바꿨는지를. 그리고 어떤 변화를 겪으며 헤어지게 됐는지를... 축약이 없던 관계를 축약해서 정리하는 건 매우 힘들 거야. 하지만... 그게 없으면, 지금의 나에게 그렇듯, '만났고 헤어졌다'는 문장 외엔 남는 게 없어. 정리를 하면서 거울을 자주 들여다봤으면 좋겠어. 거울 속의 너의 입꼬리와 귀의 색깔 변화를 보면 니가 제대로 정리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럼...


P.S.

저 일기 바로 다음 장에 "L양은 순진하다"로 시작하는 글이 있는 건 너의 악취미야.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욕망을 품는 게 솔직하긴 하지만...

여행 중에 만난 낯익은 감정이긴 하지만...


일기에 집중할 시간은 한정돼 있으니, 일기 쓰기로 모든 감정을 적당한 수준에서(안전한 수준에서) 갈무리해두려는 욕심은 조금 버리고, 그걸 적을 시간에 어느 쪽이건 관계를 발전시키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게 관계의 심화이건, 관계의 정리이건.



The State I Am in - Belle and Sebastian

https://youtu.be/_2OcymYkkq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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