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에 서툰 너에게

#인도르

by 너무 다른 역할

<언젠가 나였던 나에게>는

여행수첩과 일기장에 남아 있는, 과거의 나에게 말을 거는 시도입니다.

지금의 내가 더 나아졌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11월 20일 인도르(Indore)


우다이푸르를 출발하여 밤새 달린 버스는 아침 7시 30분에 Indore에 도착했다.

인도르는 관광지가 아니다. 물론 어느 도시에 역사가 없을 것이고, 어느 도시에 눈에 담을 꺼리가 없을 것이냐 마는, 인도르라는 도시는 그저, 석양이 아름답고 조용하다는,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돌기에 좋다는 Mandu라는 도시로 가기 위해 중간지점이라서 내린 곳일 뿐이었다. 가이드북에는 인도르에 대한 설명조차 없었다. 내가 이곳의 지명이라도 알았던 건, 가이드북 지도 중앙의 까만 철자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왠지 난 인도르라는 이름이 좋았다.


버스에서 내려 배낭을 추리는 동안, 여행객으로 보이는 서양인 일행은 흥정을 마치고 릭샤를 타고 가버렸다. 미리 좀 물어볼걸...... 둘러보니 여행자라곤 나 혼자였다. 누가 보면 굉장히 침착해 보였을 그때의 나의 표정은, 실은 혼란스러움에 대한 본능적인 침착함 정도였을 뿐이었다. 특별한 계획도 없었고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었는데, 뭐가 그리 두려웠는지 모른다. 한 릭샤꾼이 어디 가냐고 묻길래, 터미널이라고 했더니 10루피에 타란다. 릭샤를 타고 간 곳은 모퉁이 돌아 있는 터미널. 걸었더라면 3분이었을 거리. 난 조금 투덜댔다. 여유가 없으면 입이 나온다.


여행자가 나 혼자밖에 없었던 그 버스터미널은 우리나라 작은 도시의 그것과 비슷했다. 정성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세련돼 보이지는 않는 버스 시간표는 예의 손으로 쓴 것이었고, 여기저기 조그만 좌판에는 빵이며 비스킷이며 입담배 등이 놓여있었다. 터미널 구내매점 역시 우리나라처럼 잡지며 주전부리를 빼곡하게 채워놓았으며, 사람들은 여기저기 안고 서고 돌아다녔다. 버스시간표에는 mandu라는 이름이 없었다. 하긴, 영어란 언제나 이방인에게 긴요한 것일 뿐이다. 이런 터미널의 매표소 앞에는 으레 차 시간과 목적지 등을 꿰고 있는 관계자가 한 명씩은 서 있다. 그에게 물어보자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단다. 어디 어디를 거쳐서 간다고 했던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12시간 정도를 밤새 버스에 시달렸고, 그나마 만두에 가는 버스는 일반 시외버스이기에 그만둬버렸다. 게다가 여행 초기다. 아마 이 아침에 혼자서 이 혼란을 침착한 듯 맞이해야 하는 게 익숙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안 가면 또 어때. 따지고 보면, 내 평생에 ‘인도 중부 내륙의 조그만 도시 만두’를 또 언제 가겠냐만, 그때는 뭐라도 하나 얼른 결정해야지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책 없이 나와서 릭샤를 타고 아무 게스트 하우스나 가자고 했다. 중년의 릭샤왈라가 나를 내려놓은 곳은 골목을 돌아 돌아 있는 곳. 다 귀찮아서 좀 비싼 140루피에 방을 얻었다. 장부를 작성하다 보니, 이 곳 역시 외국인은 잘 안 오는 곳처럼 보였다. 짐을 놓고 나가보니, 도무지 식당에도 어디에도 외국인처럼 보이는 족속은 한 마리도 없다. 영어가 안 통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당황한 건 바라나시 이후로 처음이었다. 얼른 외국인 대피소들로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10루피에 바나나 한 무더기와 생수 한통을 사고 전화를 걸고 방으로 들어왔다



외로움이 나를 비껴가기를...

그렇게 바랐을 거야. 인도르의 작은 방에서 넌. 근데 말이야.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도 외로움은 멀어지지 않아. 이렇게 끄적이는 지금도 일요일 내내 혼자 집에서 서성댔어. 그래도, 그 해, 너에게 호의적인 것이 없는 상황에 떨어져 있는 니가 안쓰럽네. 우다이푸르에서 산 조그만 석상을 얼마 전에 꺼내보았어. 간결한 선이 만든 얼굴엔 여전히 표정이 너무 많아서 읽히지 않더라. 여행 내내 넌 어떤 숙소에 가건 그 석상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었지. 티 나게 말을 걸어 대화를 하진 않았지만, 말할 사람이 없는 하루가 지나 저녁이 오면 촛불을 석상 옆에 두고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봤지. 그리곤 일기를 끄적이곤 했어.


그게 너야.
그렇다고 봐야지.

인도에서도 너와 다른 여행 방식은 얼마든지 있었어. 어느 식당에서건, 어느 버스에서건 다른 여행자에게 쉽게 말을 건네고 말을 섞는 여행자들. 그들은 사람들과 금세 친해져 한 도시를 같이 다니곤 했지. 하다못해 지루한 대기시간이라도 잘 흘려보냈고.

넌 그렇진 못했어. 함피에서 만난 3명의 한국 사람 외엔. 그리고 그중의 한 명과 고아로 같이 가서 며칠 있던 거 외에 넌 2달 동안 죽 혼자였어. 술을 잘 팔지 않기도 하거니와, 돈도 아껴야 하는 가난한 대학생 배낭여행족인 너는 저녁 식사 후의 긴 시간을 외롭게 보냈어. 주황색의 카프카 전집 1권과 주로 김광석 노래가 돌아가는 CDP에 연결된 조악한 스피커가 그나마 위안이었지. 아마 넌, 외롭다는 말을 너도 모르게 입밖에 낼 정도로 외로울 거야. 돌이켜 생각해보니, 많은 밤, 스스로의 외로움에 대해 자책을 하기도 했었던 것 같아. 그런데 그게 너야. 그렇다고 보는 게 좋아.


내향적인 사람들이라고 외로움을 덜 타지 않아.

다만, 외롭다고 느낄 만한 상황에 더 자주 처해지긴 하지. 그건 너(그리고 나)의 성향이야. 바꾸려는 생각을 꽤 많이 했었어. 아니 정확히 하자. 바꿔야 한다는 당위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다소의 노력을 했었어.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지. 될 턱이 있나. 그건 성향이니까. 지금은 그러한 나(그리고 너)의 성향을 긍정적으로 인정해. 성향은 타고나는 거라는 게 내 지론이야. 그리고 타고난 성향에 따라, 선호하는 방식이 다르지.

너는 콰이어트한 사람이야. 남들 앞에 나서길 부끄러워하고, 목소리를 높이 내는 것도 꺼려하는. 나서서 남들을 이끌기보다 조용히 뒤에서 일을 하는. 브레인스토밍보다 사무실의 책상에서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게 더 편한. 관계 맺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야. 먼저 나서서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못 만들어내지. 누군가 그렇게 하면 악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뒤에서 조용히 건배를 제의하는 것 정도가 니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거고.


그건, 매력적이야.

스스로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게 얼마나 낯 뜨거운지. 이 글을 읽는 너도 같이 낯이 붉어질 거야. 그런데 억지로라도 생각해야 해. 머릿속으로 또박또박.

매력적인 성향이야. 너의 그것은.

천박한 양분법으로 내향, 외향을 가를 생각도 없고 혹여나 가른다 해도 어느 쪽의 우위를 말할 생각은 없어.

다만,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너의 성향이 움츠려들만 한 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거야. 외로움에는 취약한 성향이라는 걸 알지만, 그 외에는 좋은 점도 많아. 넌 사람들의 작은 장점들을 조용히 파악하는 눈을 가졌고, 시끄러운 상황이 놓치는 안정감들을 주워서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손을 가졌어. 강한 주장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억지스러운 어깃장에는 말없이 저항하는 표정도 있고. 너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걸 알아. 하지만 그런 평가 역시 낯 뜨거운 영역에 있는지라 너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을 뿐이야. 생각해 봐. 큰 소리만 내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볼품없을까.


외로움은 누구나 서툴어.
지치지 않았으면 해

서툴다,의 반대말이 능숙하다, 라면 외로움은 서툴다,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감정이야. 그건 너처럼 조용한 성향의 사람들에게도, 그 반대나 다른 성향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야. 아까 말했듯이 너는 니 성향으로 인해, 외로움을 느낄 상황을 조금 더 겪을 뿐이야. 니가 지치지 않았으면 해. 남들보다 조금 더 찾아오는 외로운 상황에 말이야. 나도 여전히 서툴어. 가끔은 어쩔 줄 몰라하기도 하고. 하지만 가끔 이외의 시간, 은 잘 넘기고 있어. 몇 종류의 유희 거리, 몇 무리의 술친구들, 몇 개의 바보 같은 프로젝트들이 있거든. 인도르에서 머무는 니가 한 달 뒤에 한국에 돌아와서도, 남들과 너 스스로를 비교하며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해.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고 대화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 단호히 말해서 그건 불가능해. 대신 너의 성향을 인정한 후에 편안한 사람이 되었으면 해. 그건 가능해. 매우.


막막함을 겪는 건 좋은 일이야.

인도에 수행을 하러 간 건 아니지만, 막막함을 겪고 견디는 건 앞으로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살면서 막막함은 수시로 찾아와. 놀랍게도 겪을 때마다 새롭고.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막막함의 세부내용은 늘 새롭지만, 무거운 공기 속에 있는 너는 조금씩 달라지거든.

어떤 막막함을 겪으면서는 너의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어떤 막막함에서는 니가 의외로 강단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 요는 막막함을 겪다 보면, 막막함이 가끔 온다, 는 사실을 깨닫게 돼. 왜 하필 나에게만, 일어나는 특수한 막막함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보편적이고 뻔한 막막함이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되는 거야. 인도르의 숙소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시장 통의 코너에 있는 건물이었다는 것 외에는. 그래서 실은 그곳에 지금 있는 니가 부럽긴 해.


그럼...



P.S.

얼마 전, 친구 한 명이 인도 패키지 여행을 가서 인스타에 사진을 실시간으로 올렸는데,

놀랍게도 거기에 인도르가 있는 거야. 매우 타이트한 일정으로 여러 도시를 도는 투어였는데 말이지.

어찌나 반갑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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