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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Nov 12. 2018

안개 내린 날, 무령왕릉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유명 관광지답게 길은 널찍하다.

하지만 유명 관광지답지 않게 조잡한 인공(人工)은 거의 없다.


눈을 가리는 것이 없는 풍경은 늘 반갑다.

요즘처럼 눈 앞으로 달려드는 것들에 지칠 때에는 더욱.



능(陵)의 선(線)은

산(山)의 선을 뜻하는 능선(稜線)을 닮은 듯하지만,

모난 부분 하나 마련해두지 않았기에 닮지 않았다.

땅에서 시작된 낮은 곡선이 안갯속으로 맺음 한다.


안개 낀 날을 굳이 택하지는 않았으나,

안개가 있는 날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 모두,

97년 이후로 일반인들에게 영구 폐쇄하기로 했다는 설명글이 있다.

잘했다는 생각과 아쉽다는 생각이 동시에 드는 결정이다.


71년 파묘(破墓) 후 26 년,

그리고 다시 닫힌 후 21 년,

무덤 안의 공기는 시절마다 어떤 소리를 담았을까.



송산리 5~6호기와 무령왕릉을 왼편에 두고 올라가면

나란히 붙어 있는 송산리 1~4호기가 나온다.

길을 따라가는 이의 시선에,

석문 하나가 위쪽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석문은 이곳에서 유일한 직선이다.

하지만, 굳이 직선으로 보이진 않는다.


역시나, 폐쇄된 안쪽이 궁금했지만

안개조차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아마 궁금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호기, 2호기 같은 명명이 내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발견한 이를 지우고, 묻힌 이를 드러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모든 무덤이 도굴을 당해,

묻힌 이의 무엇도 모르겠지만...



모든 무덤을 지나면 길은 위로 이어졌다가

왼쪽으로 크게 돌아 다시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 나무 사이로 왕릉의 융기가 다시 보인다.

위에서 보는 선이 낮은 데서 보던 선과 다를 바 없는 곡선이다.


나무의 뿌리들이 해마다,

비어있는 왕릉 쪽으로 뻗어가는 상상을 한다.



내려가는 길에 가을이 이미 막바지다.

소나무를 제외한 나무들은 서둘러 잎을 떨궜다.

자연은 사람과 다르다.

미련이 병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나무의 아래에서 자동모드로 찍은 사진을 다시 보니,

초점은 둥치 중간 즈음에 맞춰져 있다.


대개 그렇다.

너무 가깝거나 너무 먼 곳보다는, 적당히 떨어진 곳에 늘 눈이 간다.


하지만, 대개 그렇다고 해서

늘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음에는 가장 높은 가지의 끝에 초점을 맞추고 찍을 생각이다.



안개가 천천히 걷히는 땅에서 자연들은 화려하다.

나무들이 가을을 버리는 이맘때,

어쩌면 땅의 색(色)은 가장 다양할지도 모른다.


능에 묻힌 왕과 왕비, 귀족들도

능을 파고 쌓아올렸을 누군가들도

지금 능을 눈으로 구경하고 가는 관광객들도

다 같이 보았을 색이다.


별다른 예감 없이도, 흘러가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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