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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31. 2019

되도록 담백하게

#주말 산책 : 창경궁, 창덕궁


궁(宮)은 버려진 공간이다.

재주 좋게, 찬란했던 왕조의 흔적이라고 포장해도 마찬가지다. 왕조는 몰락했고, 남아 있는 모든 궁은 빈 곳이다. 잘 관리된 잔해는 그 아름다운 조형미에도 불구하고 공허하다. 시간을 되짚어 생각해봐도 공허는 여전하다. 궁에는 민(民)이 살지 않았다. 민이 지은 곳에서는 민 위의 사람들이 살았다. 민의 삶을 고민한 왕과 관료가 없진 않았겠지만, 궁은 내내 민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지금처럼 그때도 궁은 공허한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궁을 거닐 때 갖는 감상은 담백할 수밖에 없다.


경외심이나 자긍심과는 거리가 먼 감상이다. 왕조의 역사를 복기하거나 해석할 필요 없이 공간과 건축, 나무가 만들어내는 조형미를 담백하게 즐기면 된다. 그런 제한적인 기준에서 궁은 산책에 최적화된 곳이다. 걸음은 빠를 필요가 없고 시선은 바쁠 필요가 없다. 한적함을 혼자 향유하며 걸으면 끝이다.



창경궁을 갈 때면 늘,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오른쪽으로 꺾는다.


문을 하나 지나면 연못과 식물원으로 이어지는 널찍한 흙길이 나온다. 양 옆에는 공들여 가꾼 식물들이 가득이다. 도시의 협로(狹路)에 길들여진 나 같은 사람에게는 길은 사치스러울 정도로 넓다. 번잡한 광장 이외에, 이 도시의 어느 곳에도 이렇게 넓은 길을 경계 없이 걸을 곳은 없다. 흩어진 생각을 정리하려는 사람에게도, 불필요한 생각을 지우려는 사람에게도 어울리는 길이다. 흙 밟는 소리와 나무에 숨은 새소리, 낮은 담 너머로 겨우 들어오는 자동차 소리 외에 음(音)은 거의 없다.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이나,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의 말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곳에선 큰 목소리로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조용히 말하고 조용히 웃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연못 주위 꽃나무들은 덩치가 크다. 달린 꽃들도 왠지 모르게 풍성하다. 덕분에 연못가 벤치에 앉은 노인들도 풍성해 보인다. 무리 지어 앉은 그들에게선 웃음이 이어진다. 지하철이나 버스, 혹은 식당 같은 곳에서 듣던 웃음과 조금 다르다. 꽃나무 옆에서의 웃음은 박자가 느리고, 군데군데 틈이 많다. 시선을 둘 데가 많아진 사람들의 여유가 묻어난다. 바로 옆 벤치에 혼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남자의 뒷모습에서도 조용한 웃음이 묻어나는 듯하다. 나는 딱히 걸음을 멈추지 않고 웃음 사이를 걷는다.


문득, 내가 오래된 자판기 관리자가 된 기분이 든다.

꽤 먼 간격을 두고 놓인 자판기들 사이를 오가며 물건을 채우는. 해야할 일은 있지만 절대 급하진 않을 것이다. 자판기에 갈아 만든 배나 포도 봉봉이 품절이라고 화를 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오래된 자판기에는 예닐곱 개의 음료수 중 한 종류만 남아있어도 사람들은 사 먹기 마련이니까. 자판기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눈으로 들어오는 주위의 것들에 신경 쓰면서 천천히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그런 기분으로 걸었다는 얘기다.



식물원은 적당한 크기다. 내부는 적당히 덥다. 그 안의 식물들 역시 적당한 생장속도로 자랄 것 같다. 온실에 들어온 사람들은 멈춰 서서 유심히 보지 않는다. 이름은 지나치게 많은데 식물들의 크기와 색은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멋대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꽃과 나무의 형태를 눈으로만 익히며 지나다닌다. 왠지 세기말에도 이곳은 비슷한 풍경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열어놓은 창 너머에도 식물은 천지다. 창 밖의 것들과 창 안의 것들은 태생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창은 의미를 상실한다.


볕이 좋은 날이기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식물원을 돌아 나오는 곳에 문이 있다. 하지만 문보다 문 밖 풍경에 더 눈이 간다. 작은 건물과 담들이 고도를 달리하며 들어서 있다. 누군가가 건물의 미니어처를 손가락으로 짚어서 툭툭 놓은 듯이 옹기종기하다. 어느 건물에 어느 이름이 붙어 있는지 굳이 검색하지 않는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다시 연못 쪽으로 걸어간다.



연못가에 풀들이 가지런히 자란 곳이 보인다. 볕을 가리는 큰 나무가 많은 곳에서 갓 자란 풀들은 유난한 녹색을 갖는다. 편안한 풍경을 오래 보려 축대에 걸터앉는다. 도로에 접한 담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이제 들리는 건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새소리,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뿐이다.


연못의 가장자리에서 움직이던 큰 새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성종 태실 쪽으로 가는 좁은 길로 꺾는다. 수백 년 전 태어나 수백 년 전에 죽은 왕의 태반을 넣은 곳을 보고 싶은 건, 당연히 아니다.


그리로 올라가는 산길을 다시 걷고 싶었다.

몇 년 전 그 길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던 적이 있었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시선을 길 쪽이 아니라 산 쪽에 뒀다. 깊은 산도, 시원하게 트인 시야도 아니었지만 한참 동안 편하게 앉아 있었다. 아쉽게도 벤치는 없어진 상태다. 그대로 걸어 올라가, 성종 태실비 하단의 거북이를 잠깐 본다. 대가리에 새겨진 조각이 투박하다. 만져볼까 하다가 만다. 잘 다듬어진 돌만 보면 드는 생각이다. 스스로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이라 그런지 모른다.



창덕궁으로 넘어가는 길, 지대가 높고 조망 좋은 곳에 벤치가 여럿 있다. 주말 오후 2시임에도 많이 붐비지 않는다. 아래로 펼쳐진 전각(殿閣) 마루의 선은 무게감이 있다. 끄트머리에 있는 벤치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한다. 멀리 보이는 사람 몇이 까르르 웃는다. 그보다 멀리 보이는 한 사람이 어딘가를 응시한다. 옆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대화 중이다. 이 모든 원경을 한 자리에서 감상한다.


지붕 너머 나무들이, 녹색인 채로 천천히 움직인다.


창경궁과 창덕궁의 경계에서 다시 표를 사서 창덕궁으로 넘어간다. 비원(祕苑)의 입구엔 늘 사람이 많다. 비밀(祕)이라는 수식어 덕분일 것이다. 비밀을 가진 이는 이미 세상을 뜬 지 오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흔적을 보고 싶어 한다. 기다리는 것과 줄 서는 것 모두를 싫어하는 나는, 이번에도 비원 구경은 쉽게 포기한다.


어쩌면, 나에게는 이런 의미로 계속 비원(祕苑)일 것이다.



관광객이 적은 쪽으로 계속 방향을 튼다.

명칭과 구조는 무시한 채, 창덕궁의 건물들을 돌아다닌다. 축대 아래 층층이 쌓은 화단마다 녹색이 가득이다. 구석, 유난히 낮은 어느 벤치에 앉는다. 바람이 강한 날이다. 처음엔 돌풍이 불어 바닥의 흙먼지가 날리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오래 앉아 있다 보니 날리는 것의 절반 정도는 송화가루다. 큰 바람이 불 때 소나무는 거침없이 가지를 턴다. 가루는 일시에 떨어져 나와 천천히 흩어진다. 먼지나 송화가루를 굳이 맡고 싶지 않기에, 바람이 불 때마다 카메라를 옷 안에 숨기고 숨을 멈춘다.


개량 한복과 개화기 양장을 빌려 입은 여자들이 먼지가 일 때마다 고개를 숙인다. 별다른 의도 없이 바라보게 되는 풍경이다.



낮고 굵게 자란 나무의 뿌리가 땅 위에까지 울끈불끈 하다.


수없이 밟혔을 텐데도 상처 입은 티는 나지 않는다. 내원(內苑)을 이루기엔 적은 개체이지만 몇 그루만으로 주위의 전각에 있던 사람들은 즐거웠을 법하다.



왕의 집무실이었다는 희정당을 훑어본다.


어두운 실내에 가구들은 듬성듬성이다. 그곳에 앉았던 누군가들은 볕 좋은 날이면 볕 때문에, 바람 좋은 날이면 바람 때문에 엉덩이가 들썩였을 것이다. 참지 못하고 업무를 파하고 마당으로 내려설 때도 있었을 것이다. 풍경을 밀어내 숲이나 거리로 나가지는 못했겠지만, 마당을 걸으며 머릿속에 쌓인 걸 천천히 녹였을 것이다. 모든 것은 추측이다. 사람이 사라졌으니 추측이 가장 합리적이다.



문 앞에 놓인 한 그루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다만 한 명의 관광객으로서 구석에 앉아 감상할 뿐이다. 한 그루의 풍경 안에 사람을 들이기 싫어서, 카메라를 가슴팍 즈음에 들고 한참을 기다린다. 하지만 주말의 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문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고, 요행히 끊겼다 싶으면 이미 들어온 몇몇이 나무 아래를 떠나지 않는다. 사람을 불러들이고 머무르게 하는 게 풍경의 일이라, 내가 딱히 의도할 게 없다. 결국 사람이 완전히 배제된 사진은 포기한다. 최대한 사람이 적을 때를 기다려 몇 장 찍는다. 본인이 피사체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다. 찍어놓은 사진은 만족스럽다. 사람은 사람으로만 보이지 않고, 나무는 한 그루로만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한 그루의 의미를 알지는 못한다. 도리 없는 일이다.



창덕궁의 입구 방향으로 나간다.


궁의 빈 공간을 채우는 큰 나무들이 곳곳에 있다. 궁에 살던 사람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 건 새삼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잠시 들른 듯 공간을 모두 내어주었다. 어쩌면 왕조의 중간에도 이들은 자신들이 잠시 머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권력을 탐했을지도 모른다. 완전한 영속을 기대할 수 없다면 현재는 사람들이 집착할 유일한 대상이니까.


끊임없이, 관광객들이 궁의 공허를 채운다. 이들의 얼굴에 기대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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