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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20. 2020

시끄러워? 그러면 꺼야지

아침 8시 55분 혜화역. 


카드를 찍고 플랫폼으로 내려가는데 평소와 다르게 시끄러웠다. 할머니 한 분이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크게 틀어놓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창 인기인 트로트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어린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었다. 음량이 하도 커서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플랫폼에 듬성듬성 서 있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할머니를 흘끗거렸지만 아무도 말을 하진 않았다. 역무원이 있다면 제지를 했겠지만, 출근시간이 끝날 무렵이어서 그마저 힘든 상황이었다. 주위는 아랑곳없이 다리까지 흔들던 할머니는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대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늘 타던 곳으로 걸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나라도 가서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이목이 집중되는 불편한 대화가 될 것 같아서 참았다. 지하철이 오는 1~2분만 견디면 되겠지 생각하면서. 그때 지팡이를 짚는 할아버지 한 분이 나를 지나서, 그 할머니가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 한쪽 다리가 불편해 보였지만 느리지 않은 걸음이었다. 


-시끄러워!


의자에 거의 다 갔을 때 할아버지가 거침없이 말했다. 할아버지의 말투는 공격적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최애 노래를 전파하고자' 하는 할머니 입장에선 기분 나빠하진 않을까. 이 상황이 흥미진진해진 나는 두 사람 쪽으로 아예 몸을 돌렸다. 


-시끄러워?


할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노래를 흥얼거릴 때의 웃는 얼굴을 유지하면서.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옆에 앉으며 다시 말했다. 


-그렇지 시끄럽지!

-시끄러워? 그러면 꺼야지


음악은 바로 꺼졌다. 아무도 말을 못 하던 상황이 그렇게 정리됐다. 누구의 기분도 상하지 않고, 누구의 요구도 거절되지 않는 방법으로.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을 이어가지 않고 앉아서 지하철을 기다렸다. 지하철을 탈 때 잠시 본 할머니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휴대폰 조작법을 몰랐다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에게 관심을 주길 바라서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푹 빠진 노래를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어쩔 줄 몰랐을 것이고, 이 좋은 노래를 다 같이 듣길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팬카페에 가입하고 댓글을 남기는 건 그녀에겐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그렇게 투박한 방법을 택해 노래를 틀지 않았을까. 그건 외로움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녀 나름의 공유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적 한 마디에 기분 나쁘지 않게 음악을 끌 수 있었겠지 싶다. 할아버지 역시 그걸 알았기에 직설적으로 말을 건넬 수 있지 않았을까. 


작은 소란을 남기고 지하철이 움직였다. 속으로 트로트 노래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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