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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14. 2020

그래서 여기 와서 맥주를 먹는 거야

#편의점 앞의 두 남자

을지로 3가의 한 편의점.


저녁 약속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먹기로 한다. 산책을 길게 한지라 땀이 났다는 이유로. 계산을 하고 편의점 앞 의자에 앉는다. 도로경계석 쪽이어서 내가 앉은 곳과 편의 점 사이 보도로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몇 모금 마시며 사람 구경하다 보니, 편의점 문 바로 옆 테이블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그 앞에도 맥주 한 캔이 놓여 있다. 내가 마시는 맥주캔보다 큰 캔이다. 그가 마시는 맥주가 필라이트였기에 나는 그를 '필라이트 남자'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 역시 산책을 한 참인지 반팔 차림이다. 남자는 어디를 바라본다는 느낌 없이 조용히 있다가 맥주를 마신다. 동행을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었기에 필라이트 남자를 계속 보고 싶었지만, 그와 나 사이의 보도는 1~2미터 정도여서 마냥 관찰할 수는 없다. 적당히 맥주캔이나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남자를 몰래 쳐다본다.


좁은 공간이었지만 안정적으로 앉아있는 걸로 보아 여기 자주 오는 듯하다. 체크무늬가 있는 회색 헌팅캡은 살짝 커 보인다. 오른쪽에는 검은색 지팡이를 테이블에 비스듬히 걸쳐놓았다. 잠시 후 남자는 무릎 위에 있던 미색 베이지 재킷을 입고 소매를 매만진다. 중간중간 맥주를 마시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후, '참이슬 남자'가 나타난다.



"어르신, 나오셨어요?"

"왔어?"


참이슬 남자는 친근하게 인사를 하고 필라이트 남자의 옆자리에 앉는다. 그 역시 익숙해 보인다. 검은색 등산 모자와 짙은 청색의 바람막이를 입은 남자는 간결하게 참이슬 1병과 종이컵 1개만 사 왔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곳에 앉은 두 남자가 대화를 한다. 소음 때문에 대화의 일부만 귀에 들어온다.


"사무실 갔더니 그 녀석이 죽었대. 참......"


필라이트 남자가 말한다. "그래서 내가 여기 와서 맥주를 이렇게 먹는 거야."라고 말하는 그의 정장 바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바지의 주름이 깊은 걸로 보아 남자의 다리는 나이를 먹으며 얇아졌을 것이다. 이름이 희미한 대화가 이어진다. 


"엊그제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 그러니까 그게 이미 그다음인 거야."


참이슬 남자가 안 왔으면 혼자 삭였을 얘기가 흘러나온다. 필라이트 남자의 목소리에선 격한 슬픔이나 놀람보다는 서운함이 느껴진다. 여러 번의 이별을 겪은 후에 가능한 어투다. 참이슬 남자는 필라이트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친구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난 자리에서 일어난다. 두 남자는 대화를 이어간다. 늦은 소식에 장례식을 가지 못한 필라이트 남자가 세상을 떠난 친구를 느리게 추억한다. 종종 친구 얘기를 전해 들었던 듯한 참이슬 남자가 같이 아쉬워한다. 계절에 따라 점점 늦어지는 노을이 오늘따라 더 길어진 느낌이다.


도시의 소음 속에서 각자의 술병을 앞에 둔 두 남자의 대화만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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