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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08. 2020

다시 친해져야 할 아빠가 찾아왔다

"김동주의 애창곡 시간입니다. 처음 들려드릴 곡은 석지훈의 '당신은 나의 운명'입니다."


장지(地)에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형과 어머니는 거실에 누워 있었다. 이런 상황은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나는 뭘 할지 모르겠어서 아빠의 휴대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빠의 휴대폰을 직접 만지는 건 오랜만이었다. 명함 크기의 종이에 빼곡히 적은 연락처를 휴대폰에 입력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오래전이었다. 휴대폰을 컴퓨터에 연결했다. 마지막 가시기 전 찍었던 사진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렇게 파일들을 찾던 중 음성 녹음 폴더에 들어갔다. 그곳에 아빠가 남겨둔 노래 20곡이 있었다.


평소 습관대로 당신이 좋아했던 노래의 리스트를 종이에 써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 앞 좁은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 녹음 버튼을 눌렀을 것이다. 반주 없이 노래하는 걸 좋아했던 터라 목만 몇 번 가다듬었을 것이다.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세 번쯤 다시 녹음했을 것이다. 엄마와 형을 불렀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맨 처음 고백, 그대 그리고 나, 남자라는 이유로, 인생, 불 꺼진 창, 울고 넘는 박달재...... 벌써 그리워진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여' 같은 소리와, 녹음 종료 버튼을 바로 찾지 못해 허둥대는 소음도 중간중간 섞여있었다.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빠를 잃은 두 아들이 조용히 노래를 들었다. 한 손으로 책장을 짚고 서 있던 엄마가 말했다.


"아빠 노래 이제 못 들어서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다."


장례식 내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그의 부재가 그제야 확실해졌다. 아빠는 갔다.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 잠깐이나마 내 어깨를 쓰다듬던 손길을 다시 느낄 수 없다. 불과 10일 전까지 상상도 못 한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중환자실에 있던 일주일 동안의 모습으로 아빠를 기억하기 싫었다. 급성 뇌경색으로 실려간 후 온갖 기계를 달고 누워 있던 아빠의 모습에 일주일 내내 괴로웠다. 수십 년 동안 가족 옆에 있던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아빠의 부재를 '감당'하고 '적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빠의 부재와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남아 있는 우리와 떠나간 당신이 온전할 터였다.


그렇게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친해져야 할 아빠가 찾아왔다.




"이런 작업은 저도 처음인데 노래가 좋네요. 계속 들었어요."


CD 제작 업체 사장님이 최종 검수용 CD를 건네며 말했다. 회사일로 몇 번 작업을 했던 터라 헛말을 하지 않는 분이란 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부분이 없나 들어보고 다시 연락을 주기로 했다.


엄마는 70세에 에세이집을 내고, 아빠는 75세에 음반을 내기로 했었다. 두 분 평생의 목표였다. 휴대폰에 남겨진 20곡의 노래는 음반을 내기 위한 연습이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늦었지만 아빠의 CD를 제작하기로 했다.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평소에 노래를 좋아하던 아빠의 음반 좋은 추모 선물일 듯했다. 파일을 정리하는 동안 집 안에 아빠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표지 디자인을 의뢰하며 그동안 찍어둔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사진 속에서 몇 달 전부터 수십 년 전까지 시간이 거꾸로 흘러갔다. 흰머리 가득했던 아빠가 점점 젊어졌고, 온화한 미소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사진을 추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 버릴 사진이 보이지 않았다. 사진이 표지에 들어가지 않을 뿐이겠지만, 왠지 당신의 흔적이 사라질 것 같아서였다. 디자이너에게 선택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최종 선택한 사진을, 엄마는 한참 동안 바라봤다.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얼마 뒤 완성된 CD가 배달됐다. 비닐을 벗기고 하나하나 확인한 후에 재생 버튼을 눌렀다. 노래가 흘나왔다. 노래 사이로 기억이 떠다녔다. 마지막 트랙인 조항조의 '고맙소'가 끝났다. 아빠는 여기에 없지만 여기에 있었다. 다시 찾아온 그는 편안했다.




"니 아빠는 밤에는 이 길로 안 다니려고 해."


고향에 내려가 산길을 드라이브하던 중 엄마가 말한다. 밤에는 가로등도 없이 깜깜해서 무서워한다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아빠가 등장하는 엄마의 문장은 늘 현재 진행형이다.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가 아직 세상에 있는 것처럼 말했다. 처음에 엄마의 어미는 낯설었기에 잠시 의심했다. 혹시 아빠의 부재를 몸이 거부하는 걸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현실을 부정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엄마가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새로운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긍정해버릴 수는 없 일이었다. 익숙한 모든 걸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 최소한의 발판을 남겨둬야 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그만큼 긴 세월이고, 한 사람의 부재는 그만큼 큰 공백이었다. 엄마가 주저 않지 않기 위해 남겨둔 발판을, 그 조심스러운 시도를 우리는 함께했다.




"세상에 올 때 내 맘대로 온 건 아니지만은~ 이 가슴엔 꿈도 많았지~"


첫 조카의 백일, 흥에 겨운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김성환의 '인생'을 불러준다. 그리고는 혹여 생채기라도 날까 큰 손으로 볼을 살짝 건든다.  "이게 니 얘기다, 인마."라고 말하는 아빠의 눈엔 애정이 가득이다.


얼마 전 외장하드의 모든 폴더를 열어서 아빠가 찍힌 동영상을 모았다. 총 37기가였다. 몰래 찍기도 하고 대놓고 찍기도 한 짧은 영상들이다. 더 오래 전의 모습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가장 오래된 영상은 2011년 5월이다. 같은 해 12월 영상 하나를 엄마와 형이 있는 단톡방에 올렸다. 아빠가 운전을 하며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르고 나서 노래 가사에 대해서 나한테 설명해주는 영상이다. 굳이 찍고 찍히고 하는 게 어색해서 카메라는 내내 흔들리는 중이다.


"고운 손으로 넥타이를 맨다고 한 거 보면 아내가 죽는 거란 말이야? 그다음에 크고 투박한 두 손으로 당신을 감싸주던 그때를 기억하오,라고 한 거 보면, 이게 아빠가 엄마한테 하는 얘기인 거지."


영상을 올리고 나서 몇 번을 다시 본다. 고향에 있는 엄마도, 조카들과 거실에 있을 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잠시 뒤, 엄마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참 재미있게 살았네.'




3년이 지난 지금, 아빠와 다시 친해졌다. 우리는 아빠가 했던 농담을 추억하며 웃을 수 있고, 아빠의 사진을 빙그레 쳐다볼 수도 있다. 그럴 때면, 여기에 없는 당신과 여기에서 같이 살아가는 데에 익숙해진 듯하다. 엄마의 현재 진행형 어미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언젠가 과거형으로 바뀔 어미를 종종 속으로 고쳐보지만 재촉하지 않는다.


마지막에서의 시작은 느려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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