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엔딩

#비통상적으로

by 너무 다른 역할

"어설픈 친절이 더 큰 상처를 줄지도 몰라." 그런 생각도 했다


-드라마 '연애시대' 6회 중, 동진의 독백




술자리를 스킵한 금요일 밤, 십 년도 지난 드라마를 다시 보다가 이 대사를 듣고 재생을 멈췄다. 몇몇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향했던 나의 어설픔을 하나씩 두드려봤다. 얼굴들 위로 툭툭, 지난한 후회가 올라온다. 그런데, 한참을 그러다 보니 생뚱 맞은 얼굴 하나가 도드라진다. 내 얼굴이다.


몇몇의 연애에서
난 스스로에게 어설픈 친절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상대방을 위했어야 할 시간에, 너무도 친절하게 '나의 처지를 긍휼히 여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어설프지 않은, 확실한 자기애였다면 오히려 상대방도 빨리 판단했을 텐데...그게 어설퍼서 의도치 않게 상대는 혼란스러웠을 듯했다. 스스로에 대한 친절이 만든 자기연민은 반대급부로, 상대방에 대한 주저함을 가져왔다. 지난 몇 년간의 연애에서 특히 그랬다. 안 좋은 버릇이 생겼다.



누군가와 만나기 시작할 때, 엔딩을 고민하는 것이다

이 고민에는 수많은 잣대들이 끼여든다. 직업, 나이 같이 낯뜨거운 속물적 기준들이 난무하고, 대화 상대로서의 편안함 같은 이기적인 기준까지 더해진다. 결국 모든 색이 합해져 검은 색이 되듯, 이런 잣대들로 재단한 만남의 엔딩은 암흑이 된다.


만남이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은 단계에서 이런 고민은,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회피가 아닐까.

지금 내 솔로 생활은 백퍼센트 만족스럽진 않지만, 익숙하고 편안하다. 지금의 나에게 연애를 시작한다는 건, 내 생활이 통째로 변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생활을 바꿀 변화는 지레 거부하고 유보하는 것이다.


결국 연애는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회피엔딩'이 되고 만다.

30대 중반까지의 연애는 달랐다. 물론 그때도 연애는 정신과 물리 양쪽에서 내 생활 깊숙이 들어왔었다. 일상은 연애를 중심으로 짜여졌고, 그게 싫지 않았다. 지금과의 차이는 딱 하나 뿐이다. 결혼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


3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통상적으로 부여된 라벨 같은 게 있다. 결혼 대상자, 혹은 결혼 가능자, 라는 라벨이다. 결국 결혼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기 때문에 연애를 시작하면, 이 사람과의 결혼을 상상하게 되고, 그 상상 속에서 기존의 내 생활은 통째로 변하게 된다. 이런 강박 속에서 연애는 절대 담백하게 이어지지 못한다. 이거였다. 내가 몇 년간 연애를 짧고 이상하게 하곤 했던 이유가.


1. 나이에 따라, 통상적으로 결혼을 생각하게 되고

2. 결혼 생활을 상상하면 통상적으로 내 삶이 통째로 변할 거라고 판단하게 되고


결국 이 두 가지 이유로 연애가 이상한 시발점을 갖게 되고 회피엔딩으로 귀결했던 것이다. (적어도 내 쪽에서는...) 그러면, 저 두 가지만 저 따위로 전개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게 아닐까? 두 문장에서 '통상적'만 빼면 어떨까.


1. 나이는 좀 들었지만...결혼을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다.

2. 결혼을 하더라도, 반드시 내 삶 전체를 바꿔야 하는 건 아니다.


쓰고 나니, 매우 온건하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연애가 결혼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건 강박이다. 비혼으로 가도 되고, 연애를 하다가 '같이 지내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들면 그때는 결혼의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결혼 후에도 덜 통상적으로, 서로의 독립적인 영역을 최대한 지켜가면서 사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내 영역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거다. 형태의 문제라면 합의가 가능한 영역일 테고.


이렇게 쓰고 나니 '말은 쉽지'라는, 타박형 문장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긴 하지만, 그냥 이렇게 해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 문장이 지저분하게 길어지는 건 역시나 주저하고 있는 게 맞는 듯...)

스스로에게 불친절하게, 일단 연애는 연애로서만, 연애답게 시작하고 그 이후는 흘러가는 대로 둬버려야겠다. 나 스스로를 배려한다고 회피엔딩을 상상하는 이기적인 생각 대신,


통상적인 기준 따위는 망각하고
엔딩 같은 건 절대 생각하지 않기.

두근거림을 두근거림으로만 대하고, 막 바라보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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