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는 인류보다 술친구라는 인류에게...

#상상력

by 너무 다른 역할

상상력이 존재하는 한 선택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다수의 바람직한 선택지와 맞닥뜨렸을 때, 나머지 전부의 가치를 합친 것과 비교해보면 어떤 '한 가지' 선택도 오래 만족스러울 수 없다. 일 대 일로 비교하면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 선택이라 해도 말이다.


- 존 바스 ( 에세이집 '사는 데 정답이 어딨어'에서 재 발췌 )




누군가와 술을 마신다는 건 단순하지 않다.


일단 그 누군가가 누구일지를 정해야 하고, 시간과 장소를 미리 생각해야 하며, 만났을 때는 무슨 주종을 택하고 어떤 안주를 맞출지를 고민해야 한다. 술을 마실 때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깊게 들어가야 할지, 적당히 들어가야 할지를 따져야 하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2차를 갈지 말지도 판단해야 한다. 2차를 가서는 같은 고민이 반복되며, 그다음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리가 완전히 파할 때쯤 버스나 지하철이 끊겼다면 누구를 먼저 보내고 어떻게 집에 가야 할지까지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서, 이 단순하지 않은 과정을 마다하지 않고 같이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게 가끔은 경이로우며 내 앞과 옆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고마울 뿐이다. 이야기가 갑자기 점프하는 듯하지만, 이런 편한 술자리를 (꽤 자주) 갖다 보면, 굳이 연애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인과 데이트를 하는 과정도 술을 마시는 것과 같다.

어디서 언제 만날지, 만나서 무엇을 할지, 무슨 얘기를 어느 정도로 할지, 다음엔 어디를 갈지, 어떻게 집에 갈지 등등을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모든 과정에서 무리가 없어야 서로 맘 상하지 않고 즐겁게 보낼 수 있다. 그런데, 술친구와 술을 먹을 때 선택하는 것과 연인과 데이트를 할 때의 선택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버려진 선택지에 대한 태도다.

술을 먹을 때는 단순하다. 조금 더 먹고 싶은 걸 대충 고르면 된다. 대개 술자리에는 그런 선택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그 사람의 주도 하에 선택은 별 무리 없이 마무리된다. 그리고 나머지 선택되지 못한 것들(술집, 안주, 주종)은 바로 폐기된다. 술친구들은 오늘 고른 술집과 안주와 술에 집중한다. 모든 술은 취하는 속도가 같다. 고민 없이 잔을 비울 수 있고 앞에 앉은 사람과의 시시껄렁한 대화에 집중할 수 있다.


데이트를 할 때 버려진 선택지는 얘기가 좀 다르다. a, b, c, d 중에 a를 선택했다면, 자꾸 b, c, d에 눈이 간다. 게다가 종종 커다란 오류를 저지르기도 한다.


이번 데이트에서 하지 못한 게, b나 c나 d가 아니라,
b+c+d라고 합쳐서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아쉬움은 조금 더 늘고 현재에 대한 집중력은 조금 더 낮아진다. 대개는 이런 아쉬움은 별다른 내색 없이 지나가지만, 뭔가 수가 틀린 게 생기면 불이 옮겨 붙는다. 물론 왜들 그러는지 이해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하는 시간이 더 특별했으면 하고, 그 시간을 더 충실히 채우려는 욕심이 있으니까. 연애는 늘 서로에게 더 큰 상상력을 기대하는 것이니까.


몇 번의 연애를 거치면서 그런 과정을 수없이 거쳤다. 좋으려고 데이트를 하다가도 서로 삐쳐서 집에 가곤 하는. 그러니, 맘에 잘 통하는 술친구와의 술자리를 하다가, 연애가 필요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그렇게 뜬금없는 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여자라는 인류보다, 술친구라는 인류에게 더 가까운 삶이라는 건
역시나 반길 일만은 아니다.

그게 술을 많이 먹으면 건강을 해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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