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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Sep 15. 2020

절도 없는 시절을 지나고 있다

#월요일 오전 낙산공원

잎이 젖고 있어서 테두리 안은 고요하고 아늑했다

내가 없는 나의 성에서 목소리가 울었다

발자국이 허락 없이 걸어 나갔다


-詩 '놀이터' 중, 조해주 시집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





홑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자다 깬다.

뒷베란다와 앞 베란다 문을 여니 서늘한 공기가 밀려든다.


17도.


예정에 없던, 도보 출근을 결심한다.

오후 1시까지만 사무실에 가면 된다.



산길(?)을 택한다.

그래 봐야, 십여 분 오르막이 다다.

그 이후에는 완만한, 낙산공원의 산책길이 나타난다.



월요일 오전 공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모두 성실하게 마스크를 쓰고 있다, 갑갑한 기색 없이.

하늘이 높아 보이는 착시를 주는 날씨 덕일 것이다.


구름과 하늘의 색도 성실하다.



시야가 트인 지점을 찾는다.


코로나 재확산 후 긴요한 업무 외에는 재택근무를 하라는 지침이 있었다.

간간이 누구와 밥을 먹고 간단하게 술을 마셨지만,

긴 시간, 집에서 혼자 지냈다.


집 여기저기를 정리하고, 냉장고를 비우며 요리를 하고,

사놓고 구석에 꽂아뒀던 책 몇 권을 읽었다.

3주간, 꽤 정돈된 일상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공원에 나오니 알겠다.


처음 겪는 불확실한 공기 속에서 모두,

절도 없는 시절을 지나고 있다는 걸.

알아챌 새도 없이 제각각의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는 걸.   


풍경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다행히 바람이 그치지 않는 날이다.



낙산공원 정상을 지나 벽화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온통 공사 중이다.

축대 쪽 경계석을 새로 세우고 있다.


벽화마을 쪽 모든 골목에도 통행금지 푯말이 세워져 있다.

관광객이 없는 기간에, 동네를 단장하는 듯하다.

중장비의 굉음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친다.



서울에선 어느새 희귀해진 공터에,

버려진 가구와 거울이 몇 개 보인다.   

부서지거나 깨진 부분이 없는 걸로 봐서는,

어디로 옮기려고 잠시 둔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울을 찍는다.

거울은 하늘을 찍고 있었다.



성벽을 따라 동대문 쪽으로 내려간다.

생각해보니, 이쪽 끝까지 내려간 건 아주 오래전이다.

대개 성벽 중간중간에 나 있는 문을 나가는 경로로 산책을 했었다.

볕이 좋은 날 동대문은 한눈에 들어온다.



카메라를 세팅하고 혼자 두리번대다가,

어느새 따가워진 햇볕을 피해 감나무 아래에서 한참 서 있는다.

새 한 마리가 감을 쪼아 먹는다.

직박구리 같지만 확실하진 않다.

열댓 번 감을 먹던 새는, 주저 없이 날아간다.


새에게, 지금의 세계는 이전의 세계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불확실함도, 불안도, 우울도, 서성댐도, 지루함도, 이유 없는 침전도

새에게는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구름의 움직임을 담으려고 카메라를 세팅하고, 다시 혼자 멍하니 서 있는다.

내가 온 길에서 내려온 남자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건다.

자신의 '증명사진'(분명히 그렇게 말했다)을 찍어달라는 부탁이었다.


50대 후반에서 6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의 카메라는,

내 것과 비슷한 기종이었음에도, 뭐랄까 '전문가의 장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남자의 복장 때문이었지 싶다.

그는 목까지 덮는 매쉬천이 달린 모자를 쓰고,

편한 등산바지와 작은 장비들을 넣는 베스트를 입고 있었다.



남자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는다. 표정이 자연스럽다.

사진을 오래 찍다 보면 스스로 피사체가 되는 일에도 익숙해지는 걸까.

찍은 사진을 확인해보라는 나의 말에,

남자는 웃음으로만 답하고 내려간다.  



동대문 교차로 쪽으로 내려가는 길,

사진을 찍어준 남자는 풀 사이에 서서 촬영 중이다.

문득, 남자 역시 반강제적인 쿼런틴에 지쳐있다가,

자신 아닌 것들을 담으려 밖에 나왔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내려가자 그의 렌즈가 내 쪽을 향한다. (착각일 수도 있다.)

자연스러운 피사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얼굴을 굳이 그쪽으로 돌리지 않는다.



공원 가득 심어놓은 풀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남자와 고개 인사를 주고받고 인도로 내려선다.


허락 받을 필요 없이 나가을길,


익숙한 풍경 속에서, 시절이 잠시 안정을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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