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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Sep 29. 2020

그 낡음,에의 감응

#영등포 문래동, 문래창작촌



오후 3시 30분, 지하철 2호선 문래역을 나선다.

일부러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왔기에, 서두르지 않는다.  

딱히 서두를 것도 없는 동네이기도 하다.



저녁 장사를 시작하기 전의 골목은 한산하다.

주말이라 곳곳의 작업장들의 문은 닫혀있다.

문을 아직 열지 않은 술집도 꽤 있다.

정물(物)이 된 골목을, 연인과 가족들이 산책한다.

마스크 덕분인지 다들 조용히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닫혀 있는 곳은 은밀해 보인다.


철제 셔터를 올려 젖히면

날짜가 지난 협잡이나 음모가 쏟아져 나올 것 같다.

아니면, 눈을 가늘게 뜬 남자들이 모여,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을 보고서를 쓰고 있을 것만 같다.


사진을 찍고 자리를 떠나며 굳이 귀를 기울여본다.



페인트칠이나 별다른 마감을 하지 않은 시멘트 벽은 무엇과도 어울리지만,

어지럽게 늘어진 검은 전선과 가장 잘 어울린다.

잠시 두듯이 간판을 얹고 선은 되는 대로 한쪽으로 치워두듯 했다.

사람들도 왠지 저 바 안에선 되는 대로 말을 하고, 되는 대로 잔을 비울 것 같다.



덜 자란 고양이 한 마리가 낡은 공업소의 옆 공간에 앉아 있다. 쪼그린 채로 조금씩 다가가는 나를 관찰하는 눈에선,

특별한 동요가 느껴지지 않는다.


동네에서 나고 자란 고양이에게,

카메라를 든 이방인은 잊기 좋은 풍경에 불과할 것이다.



벽에 걸린 상징들은, 인간의 전리(利)나, 풍경의 종료(了)를 의미할 수 없다.


실제 박제된 동물이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연에게서 빼앗은 것들은, 얻을 수 없는 이익이나 끝낼 수 없는 풍경일 테니까.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가 없기에,

가볍게 이 골목의 한편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구름의 흐름에 따라, 가을볕이 강해지다 말다를 반복한다.

골목의 각도에 따라, 걸음의 속도가 변화하듯이.


문득 사람들이 선호하는 구름의 두께는 얼마일지 궁금해진다.



수없이 기념일을 갈아치웠을 자리가, 다시 예비돼 있다.

착석의 순간부터 시작될 새로운 이야기를, 테이블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연인들이 걷는다.

손을 잡고 있는 연인들, 늘 같은 의 발을 뗀다.

덕분에, 둘이 내딛는 곳마다 길폭신해진다.


그들은 이 골목을, 서로의 옆얼굴에 떠오른 미소로 기억할 것이다.



이 골목에서 치장은 어지럽지 않다.

간결한 것들을 매달아, 시선의 방향을 제시해줄 뿐이다.

무례하게 드러난 것들에 지친 눈이 자연스럽게 쉬어간다.



눈높이의 풍경을 담다가, 문득 카메라를 내릴 때가 있다.

어느 장면을 놓칠까 봐 서두르는 스스로의 모습에 놀라서.


놓친 풍경, 같은 건 성립할 수가 없다.

그건, 소유된 풍경, 이 성립할 수 없는 말인 것과 같다.


그럴 필요가 없는 행동을, 나는 얼마나 반복하며 살고 있을까.



누군가의 일터를 몰래 찍는다.

낯선 일터를 우리는 엿보고 싶어할까.

그곳에도 낯익은 것들이 있는지 궁금해서일 수도,

아니면, 그곳을 유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궁금해서일 수도 있다.


골목 곳곳에 초상권과 촬영 예절에 대한 당부가 적혀있다.

사람이 없는 풍경만 살짝 담고 다시 걸어간다.



낡음, 에 우리가 감응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 대신 세월을 잘 버텨줘서일까,

우리가 모르던 시절을 잊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모든 것이 명백한 현재에서 도망쳐 흘러들어 갈 곳이 필요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대충 사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거나 안달하지 않아도,

우리의 민낯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보잘것없지 않다는 걸,

이 낡은 풍경이 대변해줘서일까.


그렇게, 이 잊기 좋은 골목에 멈춰 서서 물끄러미 바라봤던,

나라는 풍경이 남기 때문이 아닐까.



여전히 뭔가를 준비해둔 골목이,

오후를 넘어온 저녁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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