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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Oct 20. 2020

속죄형 도보 출근

#낙산공원, 동대문, 광희동

조니의 세계에는 길이 하나뿐이다.

하지만 동물들만 알고 있는 오솔길은 여러 개가 있다.


-소설 「올레오 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 중 _마크 트웨인, 필립 & 에린 스테드





간밤의 음주로 인해 일찍 잠에서 깬 아침,

서두르지 않았지만 매우 이른 시간에 출근 준비를 마친다.

바로 출근해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딴짓이나 잔뜩 할까 하다가,


수 년째 부풀고 있는 뱃살을 더듬고 생각을 바꾼다.

속죄형 도보 출근 쪽으로.


그렇게 아침 7시에 집을 나선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장점은, 조금만 걸어올라 가면 낙산공원이 있다는 점이다.

단점은, 그 조금이 매우 가파르다는 점이고...

다시 한번 뱃살을 더듬고,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골목 끝에서 이어진 낙산공원의 나무계단을 오르면 바로 성벽이 나온다.

부지런한 몇몇이 운동기구 앞에서 몸을 놀리고 있다.

나에겐 특별한 '이른 아침'이 이들에겐 평범한 하루아침이다.


헉헉 대는 숨을 들키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친다.


성벽에 기대 풍경을 보다가, 몇 걸음 떨어져 성벽을 본다.

아침 볕은 먼 지붕들의 풍경을 타고 넘어와 성벽 앞에서 숨을 고른다.

성벽은 군데군데 틈을 내어준다.



시야는 맑지 않다.

바람이 불지는 않지만 차가운 아침 공기는 개운하다.

굳이 미세먼지 농도는 찾아보지 않는다.


우습게, 탁한 공기가 반갑다.

이런 날이 이어지면 왠지,

코로나 이전의 복작복작한 일상의 풍경이 100%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잠시 마스크를 내리고 심호흡을 몇 번 한다.  



성곽 아랫길을 타고 가다가 다시 성곽 안으로 들어와

동대문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간다.


좋아하는 나무가 나타난다.

이곳을 지나갈 때마다 한참 서서 바라보는 나무다.

참새가 떼를 지어 성벽에서 놀다가, 나무로 옮겨간다.

줌 기능이 없는 렌즈를 갖고 나왔기에 참새를 담지 못한다.

나무만 담고 참새는 귀로 담는다.



성벽 밖 신동 쪽 풍경은, 낯익은 선과 색으로 가득하다.

어려서 살던 동네, 지금 사는 동네에서 늘 보던 것들이다.


건물마다 창의 개수가 다르고, 창을 내다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를 것이다.

기상시간이 다르고, 어제 본 TV 프로그램도 다를 것이다.

바라는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다 다를 것이다.


그 모든 다름이 한 풍경 안에 담기는 게 새삼 신기하다.



단풍이 시작된 풍경 속을 걸어내려 간다.



동대문 한복판으로 내려와, 회사로 가는 빠른 길인 종로 5가로 가지 않고 돌아가기로 한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건너편 동대문의 건물들을 쳐다본다.


필요에 의한 것이 입지라면, 이곳의 필요는 확연해 보인다.

이곳을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는, 빵집과 인력사무소, 비뇨기과, 전당포, 쌀국수, 작명원이 필요한 것이다.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두 사람이 뭔가를 외치고 있다.

길을 건너고 보니 젊은 부부가 김밥을 사라고 말하고 있다.

뒤돌아 지갑에 현금이 있는 걸 확인하고 2,000원짜리 김밥을 하나 산다.


동대문이 보이는 풍경에서 김밥을 먹는다.

뛰어난 맛은 아니지만, 빠질 게 없이 들어간 김밥이다.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을 휙 지나쳐 광희동으로 넘어온다.

러시아 골목의 러시아 케이크 가게의 주방에선 벌써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대로를 피해 골목길을 택한다.

큰길에선 자주 바뀌었을 것들이, 골목에선 온전하다.

세탁소의 문에 잔뜩인 궁서체는, 대로변에선 볼 수 없다.


이 아침에 세탁소의 주인은 뭔가를 다리고 있다.



오래된 이발소를 지날 때, 어렸을 때부터 갔던 이발소 아저씨들의 얼굴이 몇몇 떠오른다.


주인아저씨들은 지금 내 나이와 비슷하거나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나같이 하얀 가운을 입고 있던 그들은,

목욕탕 타일을 박은 세면대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세탁비누로 거품을 내고,

무심하게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어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다들 무료하지 않았을까 싶다.

매일 비슷한 동네 사람들을 들이고, 매일 비슷한 모질과 스타일을 상대하면서.

그래서인지, 이발소 주인아저씨들의 손에선 담배 냄새가 나곤 했다.



골목에 얌전하게 정차된 지게차엔 곧 누군가 오를 것이다.

그리고는 인쇄되기 전의 종이 더미나,

상호나 전화번호가 잔뜩 들어간 인쇄물 더미를 이리저리 옮기며

그들만의 하루를 벌이 할 것이다.


7시에 시작한 속죄형 출근길이 어느덧 1시간 반을 넘겼다.

나도 나만의 벌이를 하러 출근길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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