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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Oct 29. 2020

밤의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

폭설도 꼭 무언가를 다그치기 위해 찾아온 건 아니었다

지나가는 말로 사소한 질문 몇 개 던졌을 뿐이었다


-詩 '폭설' 중, 송찬호 시집 「분홍 나막신」





몇 시까지 들어갈 수 있나요?

24시간 내내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오후 5시 40분, 이미 어두워지고 있는 주위를 보며 질문하는 내게,

주차장 초입에서 방역 물품을 정리하던 남자가 답한다.

스물에서 많아야 스물다섯 정도의 앳된 얼굴은 내내 웃고 있다.


편해진 마음으로 천천히 주차장으로 향한다.

절에서 가장 가까운 주차장은 예전에 방문했을 때 알아뒀다.



내 옆에 주차한 차에서 중년 부부 2쌍이 나온다.

차에서 내리는 나를 힐끔 봤지만, 딱히 서로 건넬 말이 있진 않기에

마스크를 추스르는 걸로 적당한 호의를 대신한다.

나보다 앞선 그들은 모두 내 걸음보다 빠르다.


덕분에 어수선하지 않게 경내로 들어간다.



정중앙 계단으로 이어지는 문은 닫혀있다. 오른쪽으로 돌아올라 간다.

경내엔 아무도 없다. 불 켜진 경비실에 누군가 앉아있을 뿐이다.

도시보다 이른 어둠은 고스란히 내려오고 있다.

필요한 불 몇 개만 밝힌 절은 점점 어둠과 분간이 되지 않는다.


건물들 사이로 들어가 무량수전으로 오를까 하다가 그만둔다.

그 적막에, 불요한 걸음을 더할 필요는 없지 싶었다.



무량수전은 여전하다.

낮고 채색이 없는 법당은 숲과도 땅과도 닮았다.

저녁에 찾아오니, 저녁과도 닮아 보인다.


낯 모르는 사람들이 뱉어내는 감탄사가 그립기도 하지만,

조용힌 풍경도 뿌듯하긴 마찬가지다.



몇의 사람들이 조용히 사진을 찍고 감상한다.

다른 몇의 사람들은 더 조용히 법당으로 들어가 절을 하고 나온다.


보통의 법당처럼, 누군가의 기복이 가득하다.

소원을 걸고 내려간 이들의 밤은 모두 같은 색일지 문득 궁금해진다.



6시가 넘어가자 남아있던 빛이 빠르게 사라진다.


어둠이 차지한 풍경에는 높낮이가 없다.

어느 곳에서 뛰어내려도 어느 곳에도 닿지 못할 듯한, 아득함만이 있다.



하늘의 빛도 남아 있던 탐방객들도 모두 돌아갈 즈음

산속의 법당은 하나의 질감으로 변한다.


3시간이 넘는 길을 운전해오면서, 별다른 질문은 생각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무슨 질문인가를 떠올렸었다면,

그걸 지우기 위해 시간을 허비해야 했을 것이다.


남아있던 하늘색의 채도와 명도가 천천히 낮아지자,

별의 위치가 드러난다.


언젠가, 이런 수없는 반복이 그리워질 때가 있을 것이다.



내내 법당을 바라보는 곳에 서 있다가,

법당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무량수전 1인칭 시점에서 풍경을 내다본다.


어느 어둠과 여느 어둠이 한데 섞여있다.

 

스님 한 분이 손전등을 들고 올라온다.

법당으로 가는 그의 걸음은 일직선이다.

손전등 빛의 방향도 어지럽지 않다. 비출 곳을 비춘다.


최단거리일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만드는 선이 간결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한다.



독경이 시작된다.


잡소리, 잔소리, 단소리, 쓴소리......

목탁과 독경소리가 이 모든 소리를 대신한다.


소리는 주저함 없이 나와서, 구김 없이 사라진다.

누군가의 애착에도 의존하지 않겠다는 듯이.


소리 중간, 어느 사이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굳이 틈을 찾아 주위의 공기가 멈춘다.  

언제 어디서나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이 밤 산사가 아니어도.



한 남자가 왔다 간다. 그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여자가 따른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둘은 무엇을 지키고 싶었던 것일까.

혹은 무엇을 지키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자기 위치를 찾은 별들이, 밤의 무량수전 위에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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