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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Nov 08. 2020

신륵사에서

#경기도 여주

가을은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회 속으로 숨어들고,

풍경들은 곳곳에서 음심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볕이 좋은 가을날에는 어디에 가도 환영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가을을 기록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아서

인접한 겨울의 흔적이 미리 느껴지기 전에

어떤 이유든 대고 길을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


2시간 남짓 운전해 여주의 신륵사를 찾아간다.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금세 잊어버린다.

어차피 억지로 만들어낸 이유였다.



제일 먼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 들어간다.

매표소를 지나자 잘 쓸린 흙길 양옆에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있다.

저마다의 노란색은 이미 절정이다.

절정 후엔 떨어질 일만 남았을 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아이 엄마의 절정은 언제였을지 

아이들의 절정은 언제일지 생각해보다가,

지금 그들에겐 불필요한 질문일 듯하여 지나친다



경내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자마자 풀밭에 토끼 한 마리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 쭈그리고 앉아도 도망가지 않는 걸 보면 산토끼는 아니다.


달랑 한 마리의 토끼를 이곳에 풀어놓은 사람의 심산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다.

같은 이유로, 혼자 풀을 뜯고 있는 토끼의 심경 역시 모르겠다.

다만 한두 번, 탈출의 이력이라도 있기를 바랄 뿐이다.



오후 3시가 넘은 시각, 기운 해가 그림자를 늘이고 있다.

하지만 급할 것 없는 걸음을 빨라지지 않는다.

여러 그림자들을 곡선으로 지나쳐 걸어간다.



법당이 모여선 경내로 가지 않고 바로 강변의 누각으로 간다.

그 옆에, 이곳에 오기 전 사진으로 봤던 삼층석탑이 서 있다.


고려 후기 건립으로 추정된다는 설명이 붙어 있지만, 국보도 보물도 아니다.

그 분야의 기준에 대해선 매우 무지하기에,

설명을 지우고 석탑이 들어서 있는 풍경을 본다.


생각해보니 강변의 석탑을 본 기억이 없다.

이 탑은 독실한 신자들이 탑돌이를 하기에도 애매한 위치겠다 싶다.

하지만 역시나, 석탑의 입지 조건에 대해서도 무지하기에,

석탑이 향하고 있는 풍경을 보기로 한다.


남한강은 잔잔하고 하늘은 야성적이다.

탑은 이곳에 서서 수백의 가을을 맞이하고 보냈을 것이다.



탁 트인 탑의 풍경을 보고 몸을 뒤로 돌리니,

또 하나의 가을 풍경이 쨍하다.

몸을 돌리기 전의 광막한 강과 하늘과는 또 다른 매력이 넘친다.


수종별로 잎을 비우는 속도가 다르고,

위치별로 닿는 볕의 강도가 다르다.

  

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한편으로 몸을 피하고,

한참 동안 아기자기한 가을 한 컷을 감상한다.



강은 지나도 남고, 남아도 지나간다.

바위에 서서 그 모순된 흐름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가을 강은 유독 멀게 흐른다.

수집할 수 없는 형질의 무엇처럼, 잠시 스쳐가듯이.



법당의 담을 사이에 둔 같은 나무 두 그루가 확연히 다르다.

한쪽은 잎을 거의 다 떨어뜨렸고, 한쪽은 색이 변한 잎들을 부여잡고 있다.


과학적으로 어떤 이유인지를 알 턱이 없으나,

한쪽은 다른 한쪽이 있기에 마음을 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르게 가을을 맞이해버린 나무는 꼿꼿하게 버티는 옆의 나무를 보며

마음 놓고 잎을 떨어뜨렸겠다 싶다.


애를 쓰지 않아도 가을은 오고, 기를 써도 가을은 떠나간다.



뜰 앞의 향나무는 공이 많이 들어 보인다.

저 위치에서 하나의 풍경을 완성하기 위해 나무는 많은 기준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꼬듯 올라간 나무 둥치가 안쓰럽지 않다.

나무는 살아남아 스스로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본인의 선택은 아니었겠지만 무엇을 감내했건 그건 온전히 나무의 과거가 되었다.

그 시간을 가지고 나무는 또 다른 시간을 편안히 맞이할 것이다.


그거면 됐다 싶다.


멀리서 잠시 합장하고 돌아나간다.



돌아나가는 길, 은행의 잎은 아까보다 더 노래진 듯하다.


착각일 것이다.

가을은 생각보다 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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