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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Nov 16. 2020

그녀의 눈 안엔 어떤 장면이 떠올랐을까

#가을 창경궁


가을, 일요일 오후의

햇살이 많고, 색이 많고, 잎이 많다.

유모차도 많고, 웃음도 많고, 카메라도 많다.


저마다의 유람이 담긴다.


단풍은 원래 잎이 가진 색이라고 한다.

녹색을 거침없이 지우고, 자기를 아낌없이 드러낸다.

원색은 주저하지 않는다.



한 바퀴 돌고 난 후,

출입구가 있는 홍화문으로 바로 나가지 않는다.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간다.


표지판에는 화장실 표시밖에 없지만,

풍경이 온통 가을이어서 볼거리는 충분하다.


느리게 걷는다.



한복을 화려하게 차려입은 두 명의 여성이 나를 앞질러간다.

무슨 내용을 말해도 웃음이 이어질 것 같은 대화가,

그녀들의 걸음을 따라 길게 흐른다.


쓸쓸해지는 것들 사이에 두 소녀는 화사했다.



나무와 담 외에 거칠 것 없는 길의 끝에 화장실이 보인다.

그 옆에 자판기가 보이길래 음료수를 마실까 해서 그쪽으로 향한다.


화장실을 20여 미터 앞뒀을 때 앞서 갔던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나온다.

여전히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상태로 얘기 중이다.

그녀들이 걸을 때마다 하얀색 분홍색의 한복이 기분 좋게 바스락거린다.

머리에 얹은 화관 장식이 오후의 빛을 받아 반짝인다.


풍경의 흐름에 방향이 있다면,

분명 어떤 흐름이 그녀들에게서 나와 주위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때,

나와 다른 방향에서 화장실로 들어가려던 할머니 한 명이 보인다.


베이지색 양장에 보라색 모자까지 단정하게 갖춰 썼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젊은 여성들을 바라본다.


그녀의 시선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젊은 여성들을 따라갈 때,

그러니까, 열댓 걸음 떨어져 있는 내가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의 얼굴에 짧게 떠올랐다 사라지는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지그시'의 느낌보다는, '불현듯'에 가까웠다.


주름이 졌지만 여전히 고운 얼굴이 잠시 드러냈던 건,

잊고 있던 것을 갑자기 마주했을 때의 어떤 감정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순간,

그녀의 눈 안엔 어떤 장면이 떠올랐을까.


지금 그녀의 눈 안에 가득한 장면은

어느 색으로 가득할까.


그녀가 기억 속에서 불쑥 가져온 얼굴은,

가을의 쓸쓸함 따위는 침범할 수 없던,

어느 시절 자신의 모습이었을까,

혹은 그 시절 그녀의 앞에 있는 누군가였을까.


한복을 입은 두 명이 여전한 화사함을 흩뿌리며 나를 지나갔다.  

짧은 미소를 거둔 노년의 부인은,

주저함이나 황급함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와 그녀들이 모두 떠난 곳에서 음료수 하나를 뽑았다.

자판기 옆 의자의 주위엔 낙엽이 가득했다.

자신의 본래 색을 유지한 채 떨어져 버린,

하지만 그 화려한 색으로 인해 더 쓸쓸해져 버린.


볕이 스스로의 각도를 낮추며 빛의 꼬리를 늘인다.  

밤은 멀었지만 이미 풍경이 사윈 느낌이다.



궁을 나서 집으로 가는 길,

아빠의 품에 안긴 아이의 뒤로 커다란 잎 하나가 떨어진다.


이 가을은 아이의 미래를 모르고,

아이는 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자신을 안은 아빠가 낙엽 위를 걸을 때,

그 걸음마다 전해지던 작은 진동이 아이의 몸에 새겨진다면,

언젠가 아이가 커서 하나의 장면을 온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가득,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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