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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an 14. 2021

어느 해의 겨울, 어느 날의 출근

사소한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소한 일 때문에 괴로움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정원의 오래된 연못으로 뛰어든 개구리는 백 년의 우수를 깨뜨린다.

그렇지만 오래된 연못에서 뛰쳐나온 개구리는 백 년의 우수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번거롭고 자질구레한 일' 中,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쓸쓸함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으랴」




아침부터 일희일비한 자신을 발견한다.

다행히 오늘 아침은 희(喜) 쪽이다. 이불속에서 서른 번쯤 기지개를 켠다.

나른함이 몸 구석구석 퍼져 든다.


오랜만에 카메라를 들고 출근하기로 한다.

길게 샤워를 하고 뭔가를 찾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됐지만 괜찮다.

전날 눈이 펑펑 왔다는 사실만으로 지각은 이해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시 한번 일희일비하면 된다.



눈이 많이 왔지만 기온은 높지 않다.

그래도 아침은 0도 근처여서 아직 눈이 녹지는 않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눈은 공평하게 내려앉았다.

어젯밤 폭신폭신한 눈을 밟으며 걸어왔던 길을 고대로 되짚어간다.


 위의 눈들은 사람들의 발자국, 자동차의 타이어 자국 등으로 어지럽지만,

눈 쌓인 길가 풍경의 단정함 사이에 있다는 이유로 간결해 보인다.

파자(字)하듯 저 안에서 우연한 무늬라도 하나 건지면 좋겠지만, 그렇게 눈이 맑지는 않다.


혹시 넘어질까 봐 보폭을 좁히지만,

큰길에 이겨지듯 뭉친 눈은 일부러 소리 나게 밟는다.

사라질 것들은 조금 요란해도 된다.



어제 집으로 걸어오는 길 눈은 한창 내리고 있었다.

취한 눈에, 내리는 눈과 내린 눈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심각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밤 풍경 속에서

나는 한 곡의 노래만 흥얼거렸다. 그것도 제일 좋아하는 후렴구만 반복해서.  


어젯밤 내리는 눈을 찍겠다고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던 가로등 쪽으로 간다.

이제 시선은 하늘에서 내려와 정면을 향한다.

덮인 눈들로 인해, 종묘의 담장과 나무들이 땅에서 30cm쯤 둥실 떠있는 기분이다.



한겨울, 어쩌다 생각난 듯 찾아오는 눈은

그렇게 세상을 잠시 흐트러뜨린다.



출근을 하던 여자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요란하지는 않으나 신남을 감추지 않는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여자가 찍은 방향을 따라서 찍는다.

덕분에 나도 조금 더 즐거워진다.   


눈의 풍경에서 어느 선은 사라지고, 어느 선은 나타난다.

그래서 보이는 것들은 밑그림을 그리다 만 것 같기도 하고,

완성된 그림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고심하며 지워낸 것 같기도 하다.


반나절이면 이 풍경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곳을 다시 지날 때 잠시 헷갈릴 수도 있다.

과연 어느 풍경을 평소라고 해야 할지.

어딘가에서 사라진 선의 끄트머리라도 찾으면 더더욱.


 


최대한 게으름을 피운다고 두 번을 넘기고 세 번째 신호에야 세운상가로 넘어가는 횡단보도를 지난다.

6차선 도로, 회색의 눈들은 질퍽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것들이 옷에 튀지 않도록 걷는다.


덕분에 동선은 제각각이다.  



눈 아래의 것들은 포근해 보인다.

드러나 있을 때 하지 못했던 말들을, 낮은 소리로 나누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겨울을 나야, 제대로 된 발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의 벽에는 낡아보지만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가득이다.

그것들을 지키려는 듯 누군가가 성실하게 비질을 해놓았다.

그 골목을 한참 바라본다.


이미 출근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

오래된 풍경 조금 더 눈에 담는다고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어느 날의 출근, 을 굳이 기억의 앞자리로 두지 않을 것이기에.


어느 해의 겨울, 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수많은 얼굴들을 줄 세우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대신, 오래된 골목을 더 눈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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