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무 다른 역할 Jan 21. 2021

눈이 녹는, 겨울 덕수궁

모든 것이 제 안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말하는 듯하다,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쓰였는지, 모든 것이 그 자신처럼 나이 들어, 각자의 무게를 지탱하며 거기 서서, 전에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고요를 내뿜고 있다,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中, 욘 포세





남겨진 모습은 늘 진창이다.

나의 뒷모습도 어디선가 저랬을 것이다.


눈이 그치고도 한나절이 지난 후에 찾은 덕수궁이다.

어제 왔으면 찬란한 눈의 빛을 구경했겠지만,

녹는 눈이 만들어내는 풍경도 만족스럽다.


자신의 무게를 만들어 내린 눈들이,

자신의 무게만 버린 채 사라지고 있다.


진창 속에서도 궁은 고요하다.



켜켜이 쌓이고

차곡차곡 녹는다


풍경을 완성한다는 느낌보다는,

순서를 따른다는 느낌으로.



줄 선 권위들이 살아있던 시대에도

저 뜰에 눈은 내리고, 이지러지고, 녹았을 것이다.


내내 과묵했던 어느 대신이,

주위에 누가 없는지 살펴보고 채신머리없게

눈 녹은 웅덩이를 폴짝 건너뛰는 상상을 한다.



눈이 내린 후에 공간은 더 넓어 보인다.

시야가 말끔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건물과 하늘 사이에,

눈이 오르내리는 궤적이 남아있어서일지 모른다.


착시현상을 즐긴다.



녹은 눈이 물이 되어 내린다.

작은 방울도 빛을 품고 하얗게 보인다.

눈이건 물이건 내린다는 상태 변화에는 변함이 없다.


눈이 가득한 풍경처럼, 호오(惡)가 없는 풍경이다.



러시아 건축가가 지었다는 정관헌은 양지바른 곳에 있다.  


주변에 가릴 게 없는 언덕에 있어서 눈은 거의 다 녹았다.

묘하게 이질감이 없는 건물이다.


왕이 주최한 연회에서도 실없는 농담은 오갔을 것이다.

줄지어 서있었을 시녀들은 어떤 고요를 가장하고 있었을까.



한담(談)이다.

대화의 내용은 진지하더라도, 풍경은 내내 한가하기에,

두 사람 자체가 한담이다.


마주 앉는 것보다, 풍경을 보며 옆에 나란히 앉아있을 때

말은 더 꾸밈없이 나온다.

그건, 눈의 일을 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입의 일에만 신경 쓸 때 말은 가볍고 담백하다.



닫힌 문으로 인해 풍경이 가지런하다.


문이 열리면 건물은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이 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 모습도 괜찮겠지만, 눈이 녹는 지금의 닫힌 문이 더 너그러워 보인다.



서로가 서로의 정물이 된 것들을 시야에 담는다.


문 안의 기척이 새어나가지 않기 위해 심었을,

문 안의 나무 한 그루로 인해, 문 밖의 의도는 무겁지 않았을 것이다.


눈이 마른 풀의 녹색이 무리를 지어있다.

눈으로 덮였을 때 겨울의 녹색은 아마, 잠시 한숨 돌렸을지도 모른다.



시간에 길을 내듯, 눈은 사라진다.


눈과 눈이 아닌 것들이 혼재된 풍경 안에 있으면

취기를 모른 채 잔을 드는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때 웃음들은 각자의 무게를 가지고 흘러나와,

딱 그만큼의 무게를 내려놓으며 증발하곤 했다.


눈을 내어준 길에 사각대는 소리가 정겹다.

풍경을 덕수궁에 내어주고 다시 문 밖으로 나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해의 겨울, 어느 날의 출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