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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an 30. 2021

저 눈이 사라지기 전에

#겨울 낙산공원

탑과 탑들, 궁전과 궁전, 그 셀 수 없이 많은 궁전들. 나는 지쳤다. 사방을 돌아보면서 나는 친구에게 "잡초에 묻힌 황폐한 돌계단을 찍어서 이 시간을 기념하고 싶은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말했다.

"찍지 말게나. 사진기를 들면 곧 현대가 될 텐데......."


-「중국문화답사기」中, 위치우위(余秋雨)





눈이 온다, 는 누군가의 문자에 베란다로 나간다.

눈은 그치고 있다, 근사하게.

덕분에 토요일 아침근사하다.

머리 감지 않고 나갈 차비를 한다.


눈은 많이 내리지 않았지만

골목 구석구석 다시 돌아보고 싶게 만들 만큼 쌓였다.

제설제가 뿌려지지 않은 오르막을 조심스럽게 걸어 올라간다.



첫 길은 다른 누군가가 갔다.

정확히는 리어카와 누군가이다.

눈이 아주 그치지 않은 새벽이었을 것이다.

남아 있는 걸음은 바퀴와 바퀴 사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리어카의 폭만큼, 풍경은 단정하다.


이 골목 어딘가에 기록이 닿지 않는 구석이 남아 있을까.



낙산공원으로 갈 생각은 없었는데, 낙산공원 쪽으로 오른다.

위로 올라가고 싶었나 보다,라고 생각한다.


자주 멈추고 카메라를 든다.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도 좋을 아침 풍경이다.

먼 곳과 가까운 곳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쌓인 눈 덕분이다.



풍경은 눈을 털어내지 않는다.



낙산공원 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운동이나 산책을 하기 위해 온 이들의 발자국만 몇 있을 뿐이다.

바람도 불지 않아, 눈 위엔 고요함만 덧쌓이고 있다.

곧 해가 뜨면 눈은 녹을 것이다.


눈을 카메라에 담는 순간, 눈의 현재는 과거가 돼버린다.

그리고 이 풍경은 그 과거의 장면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싶다.

그저, 저 눈이 사라지기 전에 담아둘 수 있어서 다행이다.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마스크를 잠시 내리고 심호흡을 한다.

하얗고 평범하고 찬란하다.



눈 아래에서 성벽의 안과 밖은 다르지 않다.



부지런한 개와 더 부지런한 개 주인들이 간간이 지나간다.

개 발바닥에 닿는 눈은 어느 정도의 차가움일지 궁금해진다.


먼발치에 있는 나를 발견한 개가 몇 초간 나를 응시한다.

딱히 지을 표정이 없어서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는다.

개는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린다.

개 주인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줄을 당긴다.


하얀 풍경에 둘이 잠시 각인된다.



이른 아침에 나온 누군가의 움직임이 보이는 듯한 빗자루 자국이다.

쪼그리고 앉아 여러 장 사진으로 담고 확인한다.

사진은 빗자루 자국만큼 호쾌하지 않다.



늘 가던 전망 포인트에서 한참 시간을 보낸다.


아무도 오가지 않는다.

거리낄 것 없는 풍경만 눈 안과 밖을 드나든다.

마음속 작은 것들이 쓸려가는 기분이다.


눈에게 모든 색을 내어주지 않은 도시는 왠지 모르게 포근해 보인다.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으면 도시는 더 따뜻해 보였을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상태 좋을 따름이다.



난간에 가슴을 붙이고 사진을 찍다 보니 아래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엔 눈이 가지 않던 곳에 한 무리의 나무가 있다.

아마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가지들일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아 잎의 눈은 털리지 않고 있다.

그렇게 다 같이 한 무리인 채 몇 나절을 보낼 것이다.



흰 빛이 흰 빛을 덮는 풍경임에도 눈이 부시지 않는다.






한 무리의 등산객이 옆을 지나간다.

더 큰 눈을 기대한 듯한 복장과 장비다.

지나가던 오토바이의 경적에 여자 하나가 잠시 놀란다.


눈이 덮인 건물에서 하얀 김이 새어 나온다.

집에 가서 뭔가를 끓이고 싶어 지는 풍경이다.  



저 눈이 사라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러면 한동안 내 안에 뭔가를 유지할 것 같다.

이런 막연한 기대로 주말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집으로 방향을 잡고 눈이 녹기 시작한 골목으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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