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전, 인도의 숙소 침구가 더럽다고 얇은 침낭을 사서 가면 좋다는 얘기를 듣고 산 거였다.
하지만, 숙소는 생각만큼 더럽지 않고, 나는 생각만큼 깔끔한 성격이 아니어서
몇 번 사용하지는 않았다. 물론, 아무리 겨울이어도 우리나라 여름 날씨와 비슷해서였기도 하다.
점점 많아진 짐들이 배낭에 가득이어서, 굳이 침낭까지 한국까지 되가지고 갈 필요가 없었다.
문득, 몇 주 전에 만났던 한국인 누나가 '인도에선 물물교환을 하면 된다'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인도에서 몇 달 봉사활동을 했던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물건을 바꾸고 싶으면 '바들라 바들리'라고 말하면 돼.'
숙소에서 나와 골목 맞은편에 서너 군데 모여있는 상점으로 향했다.
작은 마을이어서 상점들의 규모도 작았다.
옷과 기념품 등을 파는 상점 쪽으로 가자 밖에 있던 젊은 남자애가 말을 걸었다.
이미 며칠간 숙소를 오고 가며 인사를 터 둔 사이였다.
할로, 유 원트 썸씽?
바들라 바들리
왓?
바들라..바들리?
......
얘가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생각이 들어, 손에 들고 있던 침낭을 앞으로 내밀고 이걸 바꾸고 싶다는 손짓을 했다. 남자애는 그제야 내 의도를 알아듣고 '아, 바들라 바들리'라고 말하며 상점으로 나를 들였다. 상점 안에 들어가자 얘가 아버지나 삼촌 뻘로 보이는 나이 든 사장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익스체인지?'라고 말하며 사장이 침낭을 보자고 했다. 그는 침낭을 꺼내 안과 밖을 꼼꼼히 살펴보며 한국에서 가져온 거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산 저렴한 침낭이었기에 괜히 뜨끔했지만, 한국 제품이고 좋은 거라고 말했다. 사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나한테 뭘 원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선물로 줄 여성 전통의상인 사리와 바꾸고 싶다고 말했더니 그가 다시 물었다.
기프트 포 유어 걸프렌드?
노, 마이 맘.
인도 남자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장이 '엄마 선물'이라는 말에 밝게 웃었다. 그는 '가족은 소중하지. 엄마는 소중하지.'라고 말하며 벽에 걸린 거 중에 아무거라 고르라고 했다. (왠지 젊은 남자애 들으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 보니, 저 놈이 속썩이는 아들인가 싶기는 했다.) 나는 핑크색과 빨간색이 섞인 옷을 한 벌 골랐다. 사장은 연신 나를 좋은 아들이라고 치켜세우며 옷을 담아줬다. 악수를 하고 가게를 나서는데 사장이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을 두어 개 더 챙겨주며 말했다. '엄마한테 잘하는 건 좋은 거야'라고.
여행을 다녀와서 엄마한테 선물을 드릴 때나 (생각해보니, 왜 사이즈 생각을 나도 사장도 안 한 건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물물교환으로 바꿔 온 옷은 엄마한테 작아서 결국 체격이 작은 고모한테로 갔다.) 친구들에게 여행 얘기를 할 때 나는 인도에서 물물교환은 '바들라 바들리'라고 한다고 말하며 침낭과 옷을 바꾼 얘기를 하곤 했다.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가게 사장의 얘기도 곁들여서.
얼마 전, 누군가와 여행 얘기를 하다가 문득 이 말이 생각나서 구글에 검색해봤다. 인도에서 만난 누나가 했던 말이었고, 가게에서도 알아들었던 말이니 당연히 나오겠거니 해서 한글로 검색했다. 하지만 발음을 몇 개 바꾸면서 아무리 찾아도 그런 말은 없었다. 발음 나는 대로 영어로 검색해도 마찬가지였다.
고민 끝에 구글 번역기에 영어-힌디어를 켜고, 물물교환을 뜻하는 'barter'를 쳤다.
힌디어로, 「वस्तु-विनिमय vastu-vinimay」라고 떴다.
음을 들어보니 '바스투 비니마이'였다.
열 번쯤 들어도 그때 들었던 말과 다른 것 같았다.
이번엔 'by barter'라고 쳤다.
「बार्टर द्वारा baartar dvaara」라고 나왔다. '바아터 드바라'...
역시 반복해서 들어도, 내 기억 속 '바들라 바들리'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다른 단어들을 검색했다. 하지만, 어떤 단어도 '바들라 바들리'는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인도에 잠시 머물렀던 그 누나나, 더 잠시 여행했던 내가 힌디어로 물물교환을 알 리가 없었다. 당연히 사전을 들고 다니지도 않았고, 그때는 스마트폰은 물론 인터넷도 겨우겨우 인터넷 카페를 찾아가서 했던 시절이어서 검색해보지도 않았다. 여행을 다녀와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마찬가지였다.
십여 분 진지하게 검색을 하다가 포기하고, 피식했다. 내가 경험하고 기억한 것이니 당연히 물물교환은 '바들라 바들리'라고 믿고 있던 것이었다. 철썩 같이 믿고 있던 내 기억이 오류임을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