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낡은 집에 삽니다
저 양반 저기 할까 봐
by
너무 다른 역할
Nov 26. 2020
아래로
주문했던 전구가 중국에서 배달됐다.
불이 여러 색으로 변하는 플라스틱 LED 전구였다.
거실의 불을 다 끄고 집에 있는 스탠드에 차례대로 달아본다.
뭔가 아쉽다.
이런 키치스러운 빛은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공간에
애매하게 친한 친구처럼 켜 있어야 하는데......
전구를 묵힐 수 없으니, 어울리는 스탠드를 사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래서 어느 주말 아침, 동묘를 찾았다.
나의 애매한 기대를 충족할 것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확신을 가지고.
10시경, 좌판들은 보도의 절반 이상 들어차 있었다.
도로의 끝쪽으로 가서 거슬러 올라오기로 했다.
첫 번째 좌판에 마음에 드는 스탠드가 있었다.
전등갓이 없어진 트로피 모양의 스탠드였다.
어차피 전등갓은 빼고 쓸 요량이었기에 상관없었고,
고급스럽지 않은 모양이 전구와 더 잘 어울릴 거 같다.
잠깐 들어보니 묵직한 느낌이 좋았다.
무뚝뚝해 보이는 좌판의 주인 남자는 내가 스탠드를 들건 말건
쳐다보지도 않고 가져온 물건들을 진열하고 있었다.
그에게 얼마냐고 묻자, 대답이 돌아왔다.
만 원. 오늘 처음이니까.
첫 손님에 대한 반가움 같은 건 일절 없는 음성이었다.
작정하고 흥정해도 만 원이겠구나, 라는 생각과
누가 와도 만 원이라고 부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냥 살까 하다가 온 김에 더 구경하기로 했다.
한 시간 남짓 여러 좌판을 돌아다니며 스탠드를 살펴봤지만,
다들 지나치게 '어른스럽거나', 지나치게 '청소년적 취향'이었다.
그나마 찍어뒀던 후보군들을, 다시 길을 되짚어 하나하나 삭제하니,
처음 본 트로피 모양의 스탠드만 남았다.
1시간 정도밖에 안 됐으니 내가 다시 온 걸 주인 남자가 알아챌까?
이제 처음 손님이 아니니 만 오천 원쯤 부르려나?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다시 그곳으로 갔다.
스탠드를 다시 들어보고 가격을 묻는 내게
남자는 아까와 똑같이 말했다.
만 원.
존대도 반말도 아닌, 어떻게 들으면 문어체처럼 들리는
덤덤한 말투에 여전히 신뢰감이 갔다.
만 원을 주니 남자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여보, 하고 부른다.
여기 만 원. 이 스탠드 이거.
60대를 갓 넘긴 것 같은 주인 여자가 만 원을 받아 들고 몇 초간 말없이 남자를 봤다.
남자는 스탠드를 여자에게 건네고, 발치에 있던 상자 하나를 들고 사라졌다.
전구를 돌려 빼 신문에 감싸면서 여자가 나한테 말했다.
우리 아저씨가 잘못 불렀어.
이거 원래 이만 원은 받아야 되는데.
나를 슬쩍 떠보나 싶어서, 속으로 '얼마까지 깎아야 하나'를 잠시 생각하는데
여자가 피식 웃으면서 말한다.
이미 만 원에 팔기로 한 걸 뭐.
근데
내가
아무 말 안 하잖아. 저 양반 저기 할까 봐.
여자의 말에서 남자에 대한 오랜 애정이 느껴졌다.
아마 남자가 오천 원에 스탠드를 팔았더래도 웃고 넘겼을 듯한 여유가 둘 사이에 있어 보였다.
신문지에 싼 전구와 스탠드 본체가 든 까만 비닐봉지 건네줄 때, 남자가 다시 돌아왔다.
내가 허허 웃으면서 여자에게 "아저씨 덕분에 횡재했네요"라고 작게 말하니,
여자가 검지를 입에 대며 쉿,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문장을 짧게 말하고 무뚝뚝하지만 누군가에게 애정을 받는 남자를 옆에 두고,
여자와 나는 작은 공모를 한 듯 웃었다.
저녁을 기다렸다가 스탠드를 켰다.
빨강, 초록, 파랑 등의 빛이 차례로 거실을 낮게 밝혔다.
마음에 들었다.
자주 듣는 CD를 걸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그러니까,
집에 도둑이 들어 스탠드로 내려칠 일이 생긴다거나,
집 안의 모든 망치와 펜치가 사라져서 스탠드로 못을 박다가 부서지는 일이 없는 한
이 스탠드는 이 집의 한 구석을 차지할 것이다.
왠지
좌판의 남자처럼 무심하고 덤덤하게.
keyword
에세이
동묘
부부
14
댓글
댓글
0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작가에게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너무 다른 역할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
일을 하고, 여행을 시도하고, 사진을 반복합니다.
팔로워
1,622
제안하기
팔로우
매거진의 이전글
겨우, 등갈비 김치찜
그 새벽, 두부된장찌개
매거진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