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새벽, 두부된장찌개

by 너무 다른 역할


새벽 5시, 텅 빈 탄산음료 캔을 보고서야,

취했던 어제 기억이 서서히 살아난다. 아......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지만,

이미 잠은 달아났고 속은 애매하다.

컴컴한 거실에 한참을 앉아있는다.

뭐라도 볼까, 뭐라도 들을까 하는 생각마저도 정지된 상태로.


그렇게 30분, 삐걱대는 몸을 일으킨다.

된장찌개나 끓여볼까,

혼잣말은 굳이 입밖으로 나온다.



냉동실 구석에 있던 '된장찌개 키트' 하나를 꺼낸다.


아무리 소포장이어도 한 번에 산 채소나 버섯을 냉장 상태에서

모두 소비하기는 쉽지 않다.

혼자 사는 집인 데다가, 어쩔 수 없이 외식이 잦기 때문에.

그래서, 남은 것들을 한 번 끓일 정도로 한 통에 모아서 냉동실에 보관한다.

냉동실에 늘 서너 개쯤 있는 이런 찌개 키트의 재료는 열어봐야 안다.


열어보니 이번 건,

배추-느타리버섯-애호박ㅡ아욱이다.


어제 양꼬치 집의 음식들은 다 맛이 강했어서,

심심해 보이는 이 기본적인 재료가 반갑기 그지없다.



해동 같은 건 필요 없다.

얼어있는 재료를 통째로 냄비에 넣고 물을 부은 후에,

된장을 넉넉히 풀고 끓이면 끝이다.


청양고추와 양파도 들어있는 걸 보니,

꽤 충실한 찌개가 될 듯한 기분이 든다.



멍하니 찌개가 끓어오르는 걸 보다가, 두부를 꺼낸다.

유통기한이 며칠 가뿐히 지났지만 팩을 뜯어 맛을 보니 괜찮다.


한 모를 통째로 깍둑썰기로 썰고, 찌개에 모조리 집어넣는다.

두부는 늘, 많다 싶을 정도가 적당하다.


잠시 낮췄던 불을 다시 세게 올린다.



새벽 6시, 기분 좋은 찌개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진다.


어려서부터 아침밥을 잘 먹지 않았다. 먹더라도 밥보단 빵이었다. 아침식사에 대해서, 아빠와 엄마는 확연히 취향이 달랐다. 아빠는 빵 쪽이었고, 엄마는 밥 쪽이었다. 그리고 형과 나는 아빠 쪽 취향이었다.


주말처럼 다같이 아침을 먹는 날이면,

엄마는 아빠, 형, 나를 위해 프렌치 토스트나 계란 토스트 등을 해주고,

본인은 혼자 밥을 해 드셨다.

식탁에 앉아 1인분의 식사를 하는 엄마의 모습은

외롭다기보다는 호젓해 보였다.


그 시절 식탁은 어쩌면 엄마의 공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식탁에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학교에서 가져온 과제물을 채점했다.


아빠의 공간은 거실에 있는 커다란 교자상이었다.

아빠는 상에서 가계부를 쓰고 서류를 정리했다.

밥도 식탁보다는 상에서 먹기를 선호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평범한 아파트였던 우리 집에,

안방 외에 두 분의 개인적인 공간은 극히 적었다.

형과 나는 각자의 방이 있었지만,

엄마에겐 화장대 정도였고, 서재로 쓸 방이 없던 아빠에겐 아예 없었다.

식탁과 교자상은 그런 의미에서 두 분이 각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최소한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기본적인 된장찌개에 어울리는,

기본적인 반찬을 더하기로 한다.


'후라이' 하나는 늘 아쉬우니, 두 개로.

총각김치는 먹을 만큼만 꺼내 반으로 자른다.



찌개의 온기는 정직하다. 한 그릇의 온기는,

혼자 사는 이 집의 거실을 정직하게 채우고

숙취로 헤매던 내 안으로 정직하게 들어온다.


가끔 시끌벅적한 어느 자리에서 혼자 멍하니,

집으로 돌아가 찌개를 끓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아무런 말 없이, 냉장고 있는 기본 재료로만.


오늘 끓인 두부된장찌개가 딱 그런 맛이었다.


상을 치우고 밖을 보니 아직 컴컴하다.

겨울도 정직하게 왔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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