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간에, 세상 무기력했다.
그깟 사회적 거리두기,
평소 지내는 거와 별 차이 없다고 우습게 봤었는데, 아니었다.
혼자 있는 집안에서 뭘 할지 몰라 서성댈 때가 많아졌고,
멍하니 소파에 누워서 음악조차 안 들을 때도 많았다.
이번 주는 심지어 목요일, 금요일 휴가였다.
출근을 즐겨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아침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혼자 있으니,
편한 얼굴 여럿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준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일요일 오후,
며칠 내내 소파, 이불, 의자를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며 보던
재미도 없는 영화, 살 것도 없는 쇼핑앱, 새로울 것도 없는 뉴스를
드디어 중단한다.
그리고는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먼저 처리한 건 파스타 소스다.
엊그제 파스타 면을 끓이면서 선반 구석에서 발견한 병에는
2020년 7월이라고 유통기한이 쓰여있었다.
이걸 언제 샀지, 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걸 먹어도 될까, 였지만
소스 하나에 모험을 할 순 없었다.
과감하게(그래 봐야 어딘가 냄새가 나는 잠옷 차림에 떡진 머리를 하고 병을 집어 든 것뿐이지만)
뚜껑을 따고 개수대에 쏟아붓는다.
물을 몇 번 흘려내리니 거름망에 남는 찌꺼기가 그리 많지 않아서 놀란다.
병을 몇 번 헹구면서 만져보니 기름기가 전혀 없어서 다시 놀란다.
어쩌면 이 파스타 소스는 꽤 건강한 유동식일지도 모른다.
먹어보지도 않은 주제에, 다음에 또 사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철 지난' 소스를 찾은 김에 식재료 선반을 다시 뒤진다.
잊고 있던 땅콩버터가 나온다.
비몽사몽 새벽에 앱으로 주문하다가 실수로 하나 더 주문했던 기억이 난다.
이걸 종종 볼 때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하나 몇 번 생각했었다.
하지만, 땅콩버터 친화형 인간은 아니었기에 미적댔었다.
이번 건 유통기한이 2020년 3월이다.
먹어도 될까, 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역시나 과감하게 폐기한다.
어딘지 모르게 속이 후련해진다.
얼마 전에 산 고무장갑이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싱크대에 얹어놓는 것도, 호스에 걸쳐놓는 것도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뒷베란다로 나가는 문에 달기로 하고
공구함에서 훅을 찾아다가 문에 단다.
고무장갑을 걸어놓고 보니 문에 가득 튄 자국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스레인지 바로 옆에 있었으니 요리하다 튄 것들일 것이다.
오래 살면서 한 번도 이곳을 닦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이곳을 신경 써서 본 적이 없다는 데에 새삼 놀란다.
물티슈를 가져다가 닦는다. 하지만 오랫동안 눌어붙은 것들은 잘 닦이지 않는다.
약품을 뿌릴까, 생각하다가 관둔다.
주방은 적당히 더러운 편이, 요리할 때 마음이 편하니까.
큰 방을 정리할까 말까 한참 고민한다.
침대며 옷걸이며 바닥이며 옷이 가득이어서,
한 번 손을 대면 벽장의 옷들까지 손대야 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달리 할 일이 없기에 정리를 시작한다.
재킷을 옷걸이에 걸고, 옷걸이를 행거에 건다.
(이 말은 재킷들이 옷걸이에 없었다는 얘기......)
방치됐던 티셔츠들은 빨래통에 넣고, 개지 않았던 티셔츠와 바지는 개어 놓고,
스탠드 옷걸이에 일곱 겹쯤 걸려있던 셔츠들은 계절별로 분류한다.
다행히 벽장에 쌓아둔 옷은 손대지 않고 일이 끝난다.
정리된 옷들을 한눈에 보니, 칙칙하기 그지없다.
도대체 나는 패션감각이라는 걸 배운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나는 안다. 잠깐 고민을 해도 결국은 늘 입던 무난한 색의 옷을 입으리란 걸.
먹지 않은 영양제들을 모아놓고 고민한다.
종합비타민, 오메가 3, 맥주효모에 숙취해소제, 다이어트 보조제까지 있다.
평소에 술로, 불면으로, 과식으로 몸을 못 살게 굴면서
이걸 사모은 절박함 혹은 경박함을 생각하면서,
죄다 뜯는다.
그리고는 부엌의 책장 위칸에 입구를 보이게 배치한다.
건강해질 것 같은 착시효과가 생긴다.
소파 옆 낮은 책장, 꽂아둔 책 앞의 공간에 뭔가를 쌓아두는 버릇이 있다.
소파에 누워서 바로 손이 닿는 곳이어서 그럴 것이다.
다시 보고 싶은 책들을 애써 그곳에 모아두었는데, 잡동사니들로 앞을 막아버린 셈이다.
직각으로 마주 보는 다른 책장의 옆 공간에
얼마 전에 산 이중 테이프를 여러 줄 발라 박스를 매단다.
책 앞을 가로막은 것들을 전부 옮긴다.
책이나 다른 것들이나, 모두 제 공간을 찾은 느낌이 든다.
몇 달 동안 한다 한다 하면서 하지 않았던 CD 정리는 다시 미룬다.
이건 체력이나 집중력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여지의 문제'다(라고 생각한다.)
코로나가 당장 나아지지 않는데 집을 100% 정리해버리면 안 되니까.
집에서 보낼 하고 많은 시간에 또 뭔가를 찾아낼 필요가 있으니까.
정리 안 된 구석이 있는 집이 뭔가 더 정이 가니까.
이유를 대려면 더 댈 수 있지만,
생각해보니 그냥 체력이나 집중력의 문제일 듯도 하다.
부엌 구석 스피커 옆에 동전 초콜릿을 던지듯이 놔둔다.
어느 밤 또 집안을 서성이다가 집어먹을 게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둔 거라는 걸 굳이 잊고,
보물 찾기에서 보물을 찾은 듯 헤벌레 하면서 즐거워할 수도 있으니까.
집 안 유폐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정도의 혼자놀기는 필요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