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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Feb 27. 2021

밋밋한 계절

#봄이 오기 전의 서촌 산책

봄은 향기, 색채, 광선의 굴절, 문학, 유행, 홍당무와 어린 양파만이 아니라 위험한 야생적인 치유력도 가지고 있다. (...) 삶을 제멋대로 요란하게 표현하는 봄은 삶처럼 약이면서 독이다. 


-산문집 「하늘과 땅」中, 산도르 마라이





약속시간을 넉넉히 잡고 서둘러 나간다. 

오랜 습관이다. 


그러면 먼저 도착한 동네를 찬찬히 둘러볼 수 있다. 

아무도 산 적이 없는 새 집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운이 좋아 상대방이 조금 늦기라도 하면 더더욱 좋다. 

20여 분 혹은 그보다 긴 시간 동안, 아무런 방향으로 걸어볼 수 있다. 


서촌에서 약속을 잡고도 마찬가지였다. 

적당한 시간을 두고 일찍 도착한다. 

온화해진 날씨를 맞은 사람들이 꽤 많다. 


거리를, 잠시 혼자 걷는다. 



이른 오후 번화가의 식당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사람을 기다리는 것들은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2월 같은 풍경이다. 


2월은 봄으로 쳐주지 않는다.

겨울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2월로서는 서운할 일이겠지만, 

봄의 것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다. 


대신, 모든 풍경이 겨울을 벗어던지고 봄을 기다리고 있다. 

요란한 봄의 풍경과는 다른 차분함이 거리 곳곳에서 배어난다. 



20여 분 늦는다고 일행의 연락을 받고 어슬렁대다가 

필운동 홍건익 가옥을 잠시 둘러본다. 


관리되고 보이는 집들은 늘 비어있다.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흔적을, 매끈한 전시품들이 대신했다. 

집의 단아함과 공간의 호젓함이 어울려서 다행이다. 


뒷마당과 맞닿아있는 왼쪽 집의 정원에서 남자 둘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둘의 이야기에 끼어들 순 없었지만, 

둘이 맞고 있는 2월의 오후 볕은 같이 즐길 수 있었다. 

앞으로도 사람이 살 리 없는 가옥의 구석에서 천천히 시간을 보낸다. 



일행을 만나, 원래 가려던 골목 쪽으로 간다. 

몇 번이나 왔었는데 이 동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간판마다 적힌 옥인, 이란 글자를 보고 일행이 옥인동 아니냐고 묻는다. 


아마, 다음에도 골목의 이름은 잊은 채 이곳으로 발길을 향할 것이다. 

왠지 그래도 될 만큼 거리는 낯익고 편안하다. 



위로 올라갈수록 빌라들이 많아진다. 

동시에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내려온다. 

이 골목 끝이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라는 건 처음 알았다. 


산책하는 사람과 동네 주민과 등산객들이 한데 어우러진다. 

이 골목은 안정감을 준다. 

누구도 빠르게 움직이지 않고, 불필요한 왁자지껄함도 없다. 



봄이 아닌 밋밋한 이 계절에도, 사람들은 색(色)과 선(線)을 잊지 않는다. 

색을 묻히고, 선이 새겨진 풍경은 적당히 들떠 있다. 



아무 골목을 택해 위쪽으로 걷는다. 

집들은 가차 없이 지어져 있다. 

필요가 앞선 이들이 먼저 올린 한옥의 너머, 빌딩들이 즐비하다. 


시야가 막혀 있지만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갑갑한 기분이 들진 않는다. 

큰 소리를 낼 일도 없는 평온한 오후지만, 일부러 더 조용히 걷는다. 



문 닫힌 꽃집 앞 골목에, 꽃다발 하나가 놓여있다. 

아니 그냥 다발이라고 해야 맞다. 

꽃다발을 포장하듯 종이로 깔때기 형태의 포장을 해두었다. 

그 안의 내용물은 굳이 확인하지 않고 가던 길을 간다. 


이 오래된 골목엔 무엇이 놓여있어도 제자리인 듯 보일 것이다. 

화려함을 의도하지 않는 골목이다. 



느리게 걸으며, 요즘 나의 저생산적(産的) 생활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코로나로 조심스러운 탓도 있지만, 

회사에서건 집에서건 낮은 자세로 생활하는 느낌이다. 


뭔가가 생각나면 바로바로 확장하면 좋을 텐데, 

그래야 부득이하게 갇혀 지내듯 하는 이 생활에 조금이라도 생기가 돌 텐데, 

회사에서는 책상을, 집에서는 소파를 잘 벗어나지 않는다. 

생각도 의욕도 좁은 공간을 뱅뱅 도는 느낌이다. 


어쩌면 그건 내가 안전망 몇 개를 내 주위에 둘러서일지도 모른다. 

엔간해선 흐트러뜨릴 수 없는, '나'라는 아담한 공간에 스스로 갇혀서 쉬고 있는 게 아닐까. 


굳이 의욕을 끌어올리지 않아도, 

흐릿한 이 계절을 지나 봄의 야생성이 내 안으로 스며든다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자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그 핑계로, 술집을 찾아들어간다. 


안주를 넉넉히 시키고, 소주는 천천히 먹는다. 

꼬막무침도, 낙지칼국수도, 고추전도 봄이 것들이 아니어서 좋다. 


그렇게, 

선명한 봄이 오기 전 밋밋한 이 계절의 산책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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