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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r 04. 2021

정량의 출근이 쌓인다

#아침 종로 을지로

따분해하는 사람들은 주로 따분한 사람들이다.

나는 사샤의 권태에 인내심을 잃기 시작했다.

나는 자신의 내부가 흥미로워 굳이 도시까지 ‘흥미롭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을 원했다.

(...) 결국 사샤와 나는 오래가지 못했다.


- '따분한 장소의 매력' 中,  알랭 드 보통 에세이집 「동물원에 가기」





지각을 인지하고도 회사까지 걸어가기를 택한다.

어떻게 봐도, 성실한 직장인은 아니다.


며칠, 나 자신이 무미건조하다고 느꼈다.

환절기에 으레 겪는 감정이려니 했지만, 스스로를 약간 괴롭혀도(?)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어제의 도보 출근, 퇴근, 밤 산책에 이어서 오늘도 걷기로 한다.



골목의 점포들을 지난다.

문 열린 점포마다 오토바이 기사들이 물건을 싣고 있다.

누군가의 소용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누군가에게로 배달될 것이다.



'정량의 출근이 쌓인다고 정량의 행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 해도 지나갔다고,

따분한 날들의 적립이 인생의 뭔가를 결정해선 안 된다는 생각.

이래도 저래도 비슷한 출근과 사무실 풍경 대신,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내 안의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꽤 오래, 나의 출근길을 심드렁하게 대했다.

출근은 돈을 벌기 위해 가야만 하는, 임시적인 어떤 상태였다.



하지만 정량의 출근이 수없이 겹쳐진 언젠가부터,

출근길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건 굳이 행복을 위한다는 거창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늘 가던 길을 오늘도 가고 있다는 편안한 기분 때문이었다.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잠시 올라탄 것처럼,

출근을 시작하면 그제야 머리가 돌고 하루가 시작되는 기분이 든다.  


그때부터 매일의 출근을 똑같이 대하지 않는다.

같은 시간에, 같은 사무실에 올지라도, 매일 출근길의 속도를 달리한다.

어느 날은 일부러 뛰다시피 가기도 하고, 어느 날은 지각을 해도 최대한 느리게 걷는다.

그렇게 하면 나의 하루의 밀도가 달라질 수 있다.




내 안의 풍경과,

나의 소용을 다하기 위해 출근하는 일터의 풍경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종종 반목하거나 조화롭겠지만,

적어도 둘은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지하철을 타건 걸어가건,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의 출근길은

내 안의 무엇들이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사무실에 착석하는 순간 직장인들은,

자기만의 조그만 창(窓) 하나를 갖는다.


그것을 닫고 스스로에게 질문과 답을 반복하는 시간과,

창문을 열고 누군가에게 기대는 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번갈아 찾아온다.



회사에서 머지않은 골목, 노부부의 작은 칼국수 집을 지난다.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아마 부부는 안에서 재료를 손질하고 있을 것이다.


점심 내 팔 칼국수를 끓일 들통과 물통 들이 가지런하게 준비돼 있다.

오랜 세월 부부가 지켜온 정량의 풍경이다.

부부의 하루는 어떤 밀도일지 상상하며 걸음을 빨리한다.


다행히 아무에게서도 재촉하는 전화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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