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거짓말 왕궁의
아홉 겹 담장 안에
김치 속 속배기의
미나리처럼 들어 있는 나를
놋낱같은 봄 햇볕 쏟아져 나려
육도 삼략 (六韜 三略)으로
그 담장 반남아 헐어
-詩 '봄볕' 중, 서정주 (미당 시선집)
걸으면 내가 멈춰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말이 많아지면 내가 주저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듯이.
흐린 날, 골목길을 택해 운현궁으로 걸어간다.
절차를 거쳐 마당으로 들어선다.
요즈음의 복잡한 심사를 뚝 떼어내 대문 밖에 두고 오고 싶지만,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주렁주렁 달고 걸음을 옮긴다.
봄 잎이 나지 않은 나무가 눈에 한가득 들어온다.
땅 밑에 퍼져있을 나무의 온전한 부분을 같이 상상한다.
어쩌면, 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욕심들에도 숨겨진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걸 동경(憧憬)이라 부르기로 한다.
검색해보니, 동경(憧憬)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1.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여 그것만을 생각함
2. 마음이 스스로 들떠서 안정되지 아니함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들뜬 마음은,
얼핏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정반대일 수도 있겠다 싶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건 자신의 내면의 평화를 위해서일 텐데,
그러는 와중에 마음이 들떠서 안정되지 못한다.
욕심을 반복하면서도 닥치면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늘 그랬다. 늘 그렇다.
고요한 건물 사이를 걸어 다닌다.
하나의 문은 자신이 감당할 만큼의 공간을 품고 있다.
문으로 인해, 문의 안과 밖은 평화롭게 나뉠 수 있다.
문의 반경(半徑)은 다른 문의 것을 침범하지 않는다.
하나의 반경을 조용히 구경하고,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
문과 문 사이는 잘 쓸려 있다.
각도를 가진 빛이 창을 넘고 있다.
빛은 당도할 수 있는 곳까지만 들어간다.
문처럼, 그 역시 자신의 영역을 지킨다.
건물의 뒤편을 걷는다.
눈에 담기는 모든 직선이 정갈하다.
휴대폰 진동이 울린 듯해서 확인해보지만 전화도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내가 나의 영역을 늘리려 너저분하게 끌고 다니는 것들은,
과연 날 설명할 수 있을까.
칠칠치 못한 기분으로 휴대폰을 만지다가
가방 앞주머니에 넣어버린다.
빈 궁(宮)을 돌아다니며,
이곳에 사람의 발길이 가득했던 때를 굳이 상상하지 않는다.
그 시절, 사람마다 욕망을 내보였을 것이고,
좌절된 욕망과 실현된 욕망이 난잡하게 뒤엉킨 이곳에는
푸석푸석한 조바심이 널려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지금 모두 사라졌기에 빈 궁을 즐길 수 있다.
내 내면의 공간에도 비슷한 일은 가능할 것이다.
정원 어느 구석, 곧지 않은 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나무는 옆에 대비시켜둔 대나무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누군가가 쉽게 칭송했을 대나무의 직선이나, 겨우내 유지했을 녹색의 이파리 따위는,
굳이 상관하지 않는 듯 보인다.
대나무를 동경했다면 나무는 구부러지며 자라는 자신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나무는 네 갈래로 갈라져 스스로의 방향을 찾는 줄기들에 집중했다.
줄기가 굵어지면서 나무의 밑동은 자연스럽게 땅과 더 밀착했을 것이고,
그렇게 하나의 반경이 완성됐을 것이다.
처음 들어왔던 마당으로 다시 나선다.
자판기 옆 쉼터에 몇 명의 관광객이 다리 쉼을 하고 있다.
흐린 날이지만, 변덕스럽지 않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