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무 다른 역할 Apr 24. 2021

순전히, 볶기만을 위한 볶음밥

남은 밥이 마음에 걸렸다. 


먹어치워야지 하면서도 며칠 내내 술자리에 외식이어서 집에서 밥을 먹지 못했다. 

한두 끼 먹을 만큼만 밥을 했으면 될 텐데, 쌀을 안칠 때 쓸데없이 욕심을 부렸다.  

밥솥을 열어보니 서너 공기 정도 되는 밥이 말라가며 푸석해지고 있다.  


오히려 잘 됐다 싶다. 볶음밥을 하기에 딱 알맞은 정도다. 

마침 냉장고 곳곳에 처리해야 할 것들이 있다. 


다 볶기로 한다. 


볶음밥을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순전히 볶기 위해서라니, 

뭔가 뒤바뀐 듯한 기분이 들지만 뭐 어떤가 싶다.  



혼자 사는 집에서는 아무리 부지런하게 먹어도 사온 재료 한 팩을 바로 먹어 없애는 게 버겁다. 

그런 이유로 남긴 것들을 하나씩 보관하다 보면, 1인 가구에 있는 작은 냉장고는 금세 가득차 버린다. 


그렇게 남아있던, 봄 표고버섯과 파프리카, 소시지, 풋고추, 브로콜리 등을 꺼낸다. 


비닐팩에서 꺼낸 소시지에 끓인 물을 부어 놓는다. 

첨가물 같은 게 다 씻겨갔으면 좋겠지만, 

둥둥 뜬 기름을 버리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볶음밥은 풍미라는 말과는 제일 거리가 먼 요리일 것이다. 


각각의 재료에 대한 다양한 손질법과 조리법과의 별개로, 

'볶는다'는 하나의 과정이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볶음밥만큼 만만한 요리도 없다. 

라면과 비교하면 오히려 라면이 더 까다로울 것이다. 

라면은 적정량의 물을 맞춰야 하고, 각자의 취향에 따라 끓는 시간을 달리해야 한다. 


하지만 볶음밥은 먹는 사람의 허용범위가 매우 넓다. 

어느 기름 어떤 재료를 택하느냐는, 엄격한 기준이 필요한 레시피가 아니라 취향의 영역일 뿐이고

어느 정도 짜거나 싱거워도, 어느 정도 기름지거나 퍼석해도, 웬만하면 오케이다. 


그런 허접한 기준에 감사해 하며, 재료를 도마에 올린다. 

부담없이, 차례차례.


버섯과 풋고추를 죄다 썰어서 한쪽에 모아놓으니 수북하다. 

소시지도 같은 크기로 자른다. 역시나 자르기 전보다 양이 많아 보인다. 

싱크대 위에 재료만 한가득이다. 


밥의 양도 꽤 많아서 한 번에 다 볶일까 염려가 됐지만, 걱정은 되지 않는다. 

경험으로 알고 있다. 

다 때려 넣고 볶다 보면 모든 재료가 알아서 제 위치를 찾아간다는 걸. 



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최대한 많이 넣는다. 

마늘향이 집안에 퍼질 때, 냉동실에 있던 브로콜리를 넣는다. 

멋있게 웍질을 하고 싶지만, 웍 모양의 둥근 팬일 뿐이어서 젓가락으로 뒤적인다. 



버섯과 고추를 쏟아붓는다. 팬은 이미 거의 차 보인다. 

불을 너무 세지 않게 해서 계속 뒤적인다. 


버섯의 숨이 죽으면서 미묘하게 공간이 생긴다. 



파프리카를 크게 한 주먹 넣고 소시지는 전부 넣는다. 

그리고 굴소스 차례. 


소스는 욕심껏 뿌리면 안 된다. 


요리 퍼포먼스에 혼자 심취해서, 

굴소스를 과하게 뿌린 요리를 여러 번 만들고 먹은 적이 많다. 

재료가 팬 가득이라 해도 소스는 두세 수저면 된다. 



볶음용 젓가락과 실리콘 주걱을 양 손에 들고 천천히 볶는다. 


"강불로 세게 볶아낸다" 같은 표현이 머리에 맴돌지만, 

지금은 재료를 흘리지 않고 골고루 섞이게 하는 게 목표다. 

채소의 숨이 많이 죽어도 상관없다. 

기름과 온기가 모든 재료에 다다르기만 하면 된다. 


팬의 가장자리에서 소외되는 재료가 없는지 확인하면서 볶는다. 

쓸데없이 성실하게, 한 방향으로 차곡차곡. 



밥솥째 꺼내놓은 밥은 식어있다. 모조리 쏟는다. 

재료는 다시 팬에 가득이다. 

재료만 볶을 때보다 더 세심해야 팬 밖으로 흘리지 않을 수 있다. 


팬 안의 모든 재료에 윤기가 흐른다 싶으면 다 볶은 거다. 

간을 보니 적당하다. 

마지막으로 후추를 꺼내 넉넉히 갈아 뿌린다. 


요리라는 영역에 어떤 평균선이 있다면, 

볶음밥은 beyond보다는 below에 가까운 음식이다. 


누가 만들어도 크게 실패하기 어렵고 크게 성공하기도 어려운 이 요리는, 

누가 먹어도 크게 실망하거나 크게 감탄하지 않는다. 

만드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편하게 해치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같이 흐린 날의 토요일 오전에 딱 맞는 요리이다. 



엊저녁 술자리에서 오갔던 얘기,

이유 없이 안절부절못했던 오늘 새벽의 기분 같은 것들을 생각하며 


천천히 그릇을 비운다. 



배불리 먹었는데도 팬에는 아직 볶음밥이 수북하다. 

보관용기 3개를 꺼내 양을 비슷하게 담아놓는다. 

냉동실에 넣어놓으면 만족스러운 한 끼가 될 것이다. 

마트에서 파는, '한 봉지로는 양이 적고 두 봉지를 뜯기엔 자존심 상하는' 볶음밥보다 훨씬 더. 


요즈음, 별다를 것 없는 일상 속에서 

작은 욕망에 휘둘리고 스스로 만든 기준 앞에서 무력하곤 했다. 


남아있는 재료를 한데 볶아서 먹어버리듯,  

미진하게 남아있는 내 안의 것들을 죄다 꺼내 처리하고 싶어 진다. 

애매하게 남은 것들을 하나씩 처리하기엔 내가 너무 게으르니까,. 

모조리 한 번에 때려 넣으면 편하게 해치울 수 있을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감흥의 주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