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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an 27. 2021

감흥의 주방

#묵힌 재료 처리하기

그 술집은 데커가 평소 들락거리는 술집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 인생이 던져주는 건 뭐든 술로 마셔 없앨 수 있는 곳.


-소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中, 데이비드 발다치




냉장고를 연다.

일주일 상간에 사놓고 묵히는 것들이 몇 눈에 띈다.

비우기로 한다. 죄다 꺼내놓는다


급할 필요가 없는 날이다.

차려입고 나갈 약속도 없고, 불쑥 찾아올 사람도 없다.

배는 적당히 차 있고, 음악은 알아서 흐른다.



구매할 때는 충동적이었다.


마트의 매대에 쌓여있는 시금치 더미의 녹색에 이끌려서,

포장된 랩을 뚫고 나올 듯한 얼갈이배추의 짱짱함이 맘에 들어서,

비닐 입구를 뜯기만 해도 우르르 쏟아질 것 같은 시래기를 지나치지 못해서,

이유는 늘 많다.


요리할 일이 많지는 않아서,

신선한 재료를 살 때면 몇 번씩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지만,

눈에 확 꽂히면 충동을 자제하지 못하고 한 개씩 사게 된다.


여하튼 샀으니 어떻게든 처리를 해서 뱃속에 넣는다.

그렇게 1인 주방이 굴러간다.



일단 말라비틀어지고 있는 당근을 집어 든다.


일주일 전쯤, 어느 밤에 하이라이스를 당장 끓일까 해서 비닐포장을 벗겨둔 당근이다.

꼭지 쪽은 이미 거무스름해졌다.

버릴 부분과 남길 부분을 나누는 선을 넉넉하게 정하고 과감하게 자른다.

버려야 할 것들은, 버리기 전에는 눈에 먼저 밟히지만 버린 후에는 말끔하게 잊힌다.


샐러드를 만들 것도, 찌개에 넣을 것도, 당근 케이크를 시도할 것도 아니다.

이 주방에서 당근은 술안주로 길게 잘라서 생으로 먹거나,

카레라이스 혹은 하이라이스에 넣는 용도가 전부이다.

몇 개 집어먹으면서 죄다 비슷한 크기로 자른다.


어느 밤이나 새벽, 당근을 볶고 카레나 하이라이스를 넣어 끓이고 싶을 때,

통 하나 가득한 당근으로 인해 충동은 충동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작은 팩에 있던 얼갈이배추는 네 포기나 된다.

잎을 하나하나 떼면서, 손으로 뽀득하는 느낌이 들 때까지 씻는다.

요리에 취미가 있다면 양념을 뚝딱 만들어서 겉절이를 만들겠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 능력치는 되지 않는다.


수북이 쌓아둔 잎을 보고 만족해한다.



시금치를 찬물에 씻는다.

몇몇은 잎을 다 떼어내고, 몇몇은 줄기째 놔둔다.

일주일쯤 봉지 안에 있었음에도,

잎은 색이 변하지도 힘이 빠지지도 않았다.



소금을 한 수저 넣고 끓인 물에 시금치를 넣는다.  

시금치는 다른 나물처럼 급격히 숨이 죽거나,

갑자기 짙은 풀색으로 변하지 않는다.

꽤 고집이 있는 나물이었구나, 새삼 감탄한다.


축 늘어지지 않게, 정도의 얕은 기준을 가지고 노려보지만

어느 정도 데쳐야 할지 감이 없기에 젓가락으로 계속 뒤적인다.

2-3분 지나 체에 따르고 찬물에 헹군다.

식감에 민감한 편은 아니니 어찌 됐든 먹겠지만,

눈대중으로 보니 흐물거리지는 않는다.

녹색은 여전하고, 부피도 여전하다.


물기를 털어내고 반 주먹씩 손에 쥐고 물기를 짠다.

차갑고 따뜻한 기운이 동시에 느껴져서 기분이 편안해진다.



시래기를 꺼내 물에 헹군다.

포장지에는 '깨끗이 세척했지만 간혹 이물질이 있을 수 있으니 잘 씻어야 한다'라고 쓰여 있다.

대충 뒤적이지만 깨끗해 보인다.


몽땅 끓이기로 한다.



다 넣고 나니 냄비 가득이다.

더 큰 냄비에 넣거나 양을 나눴어야 하나 생각하지만, 일단 끓으니 됐다.

물이 몇 번 요란하게 넘치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다.


긴 젓가락을 꺼내 젓는다.

워낙 빽빽해서 손에 힘이 들어갈 정도다.

뭔가를 저을 땐 그게 시계방향이건 아래 위건 가운데에서 가장자리로 가건 상관없다.

한 방향만 유지하면, 그 방향을 모두 따른다.


포장지에는 안 질기게 잘 끓이는 방법이 적혀 있었지만, 가볍게 무시한다.

어치피 나 혼자 먹을 것이고, 나는 식감에 둔감한 편이다.



세 개의 통을 늘어놓고 재료를 채운다.


버섯을 나눠서 넣고, 물기를 짠 시금치를 한 덩이씩 넣는다.

그다음엔 얼갈이배추를 양이 많다 싶을 정도로 차곡차곡 채운다.

크게 뭉친 시래기를 그 위에 넣고,

냉장고 구석에 남아있던 쌈배추 조금을 3등분 해 채운다.

마지막으로 냉동실에 있던 다진 마늘 한 덩이씩과 썰어놓은 대파를 듬뿍.



꽉 찬 통을 닫고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는다. 뿌듯해진다.


씻고, 손질하고, 적당량으로 나누기 정도의 단순한 과정이었지만,

이 정도 '상태의 변화'만으로도 만족스럽다.  


간헐적으로 요리를 하는 이 작은 주방은,

누군가가 볼 땐 작고 평범해 보일지라도, 나한텐 꽤 감흥이 넘치는 곳이다.

누구에게 보여줄 일도 자랑할 일도 아니지만,

이곳에서 재료의 손질 같은 쉬운 작업들이 켜켜이 쌓여 일상의 만족을 준다.


요리에 익숙하지 않다고 요리에 대한 욕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뭔가를 굽고 끓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러니까 불현듯 마음이 내켜 냉동실을 열었을 때,

시간을 들여 담아놓은 재료가 몇 통 있다는 건 꽤 괜찮은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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