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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an 16. 2021

어수선할 땐 매달면 될 일

#좁은 집에서의 정리정돈

여기 침대가 완전 울퉁불퉁하긴 해도, 눈을 붙일 수 있잖아. 

여기 침대에 어떻게 누우면 편할지는 각자가 알아내면 되고.


-소설 「니클의 소년들」中, 콜슨 화이트헤드





얼마 전에 충동구매한 영양제가 며칠 내내 눈에 밟힌다.


택배 상자에서 꺼내자마자 책 위에 아무렇게나 놓은 채 치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이걸 어디에 놔야

집이 지저분하지 않으면서도 잊지 않고 챙겨먹게 될지 고민한다.

(넓은 집에 살면 하등 필요 없는 고민일 텐데, 라는 생각이 잠깐 스치지만,

이런 일로 이사 갈 일은 없지 싶다.)


박스를 책장 구석이나 거실 스피커 옆에 둘까 하다가,

어딘가에 붙여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술 먹은 다음날 먹을 테니 아예 현관문에?

아침에 일어나서 물을 먹을 테니 냉장고 문에 붙일까?

아님 숙취에 절어서 기어갈 화장실 문에?

그러다가 잡동사니를 두는 걸개 아래에 방치된 줄을 본다.


걸리적거리지도 않고, 눈에 잘 띄는 곳이다.

건다. 혼자 뿌듯해한다. 


희한한 일이긴 하다.

뭔가를 바꾸는 걸 싫어하면서도 이것저것 사는 걸 좋아하는데도

15년 동안 살고 있는 이 좁은 집이 터지질 않는다.

종종 티브이에서 보는, 몸 누일 공간도 없이 잡동사니로 가득 찬 집이어도 이상할 게 없을 텐데......

그런 생각으로 집을 둘러보니, 집 구석구석 뭔가를 많이도 매달았지 싶다.

(역시나 이런 생각을 한다고 이사 갈 일은 없겠지만.)



이 집에 이사 올 때 선물 받았던 발은,

현관 옆 천장에 대충 매단 후 15년째 옮기지 않았다.


쇠고리에 연결한 끈은 급하게 쇼핑백에서 떼왔던가.

제대로 된 끈으로 바꿔야지 하면서도 손을 댄 적은 없다.


나를 포함해서, 이 집에 들렀던 몇 사람이 술에 취해 비틀대는 통에

나무 고리 여기저기가 잡아 뜯겼지만

빈 곳을 눈대중으로 맞춰서 이어 붙이면 된다.


저 발을 천장에서 떼어내는 날이 이사 가는 날이지 않을까.

사진을 찍으면서 윗부분에 먼지라도 털어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그러면 일이 커진다. 휴일엔 일을 만드는 게 아니다.



현관 위에는 친구가 3년 전에 티베트에서 가져온 흰 천이 걸려있다.

밑엔 11년 전 터키에서 산 악마의 눈알이,

그 옆에는 16년 전 중국 시골에서 찍은 고양이 사진이 있다.

인테리어라고 할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되는 대로 매단 것들이다.


물론, 고양이가 댓돌에 얌전히 앉아 누군가 돌아오길 기다리듯

나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었고,

악마의 눈알이나 기도할 때 쓰는 티베트의 천이,

액운을 막아주면 좋겠다는 작은 요행이 있긴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정도면 꽤 그럴 법한 이유지 싶다.



뭔가를 매달 때 조심스럽지 않다.


인도의 가네쉬 신을 그린 이 천은 딱풀로 붙였다.

나중에 벽지가 같이 뜯길 수 있겠지만,

10년 전 벽에 붙일 때 그런 건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 살았던 터여서 나갈 때 도배는 새로 하겠지 싶어서.


인도의 신이 딱히 한국에 미련이 있을 건 아닐 텐데도

딱풀로 슥슥 붙인 천은 떨어진 적이 없다.

덕분에, 거실에서 부엌을 오갈 때마다 보살핌을 받는 느낌이다.

오래 보니 귀엽기도 하고.



전에 살던 부부가 박은 못들엔, 액자 같이 무거운 것들이 걸려 있다.


이사온 후 나도 몇 개의 못을 추가했으나, 전 사람들이 박은 못이 제일 튼튼하다.

못질할 때 힘이나 요령이 모자라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살짝 분하긴 하지만,

다행히 이전의 못들은 적절한 장소에 적절한 개수로 박혀 있어서 불만은 없다.


거실 벽, 비어 있는 못 하나를 본다.

아직 여력이 있는 집이다.



공간은 좁고 미련이 많으니,

어수선하게 살지 않으려면 매달면 될 일이다.


이게 이 집에 오래 살면서 내가 알아낸 방법이다. 

마치 처음 누워본 침대에서 어떻게 누워야 편할지 알아내듯. 


이건 매달고 말 일, 과는 다르다.

뭔가를 눈 앞에서 치우고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눈이 가는 장소에 나의 필요를 걸어두는 거랄까.


바람이 그치지 않던 제주도의 어느 숙소 주방 사진을 욕실 문에 걸어두고

들어갈 때마다 군더더기 없는 그곳의 풍경을 떠올리는 것 같이,

나만 누릴 수 있는 그런 필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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