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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an 09. 2021

호들갑스러운 온수

최근에 오르밀라는 자신이 사는 세계가 독립된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로는 많은 세계의 교집합이라고 결론지었다. 딱정벌레의 세계가 있고, 아래층 부엌에서 향신료를 빻는 어머니의 세계가 있고, 동생이 사악한 적의 킹과 전투를 치르는 체스의 세계가 있다.

그러니 자신의 인식 바깥쪽에 얼마나 많은 세계가 감춰져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소설 「다락방」, 반다나 싱




이 집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했다.

새해가 됐으니 15년째 살고 있는 데다가,

30평도 안 되는 집이니 내가 모를 게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자신감.

하지만 아니었다.


오늘처럼 한파가 절정인 날,

이 낡은 집은 자신의 세계가 녹녹지 않음을 보여줬다.

하필 집안의 모든 온수를 멈춰버리는 방식으로.


아침 일찍, 부엌과 욕실의 온수 쪽 물이 아예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분명 어제 회사 갈 때 수도관이 얼까 봐 물을 흐르게 하고 나갔는데 왜 문제가 생겼지 하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밤에 집에 와서 내가 무심결에 수도를 잠갔다는 걸 생각해냈다.

씻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물은 계속 쓸 테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잘못이었구나.

간밤에 내가 깨지도 않고 푹 자고 있을 때, 수도관 어디가 얼었구나.


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생각했다. '다 겪어봤는데 뭘.'


몇 년 전의 경험으로, 부엌 싱크대의 바깥 그러니까 뒷베란다 쪽에 있는 수도꼭지만 녹이면 되겠다 싶었다.

걸레를 둘둘 말고 뜨거운 물 몇 번 부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느긋하게 일어나 점심을 먹은 후,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뒷베란다로 나가 수도꼭지를 녹였다.

하얀 김이 냉동고 같은 뒷베란다에 금세 가득 찼다.  커피 드립 하듯 천천히 물을 부은 뒤 자신만만하게 온수를 틀었다. 한두 번 쿨럭 대고 물이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온다. 다시 물을 끓여 두어 번 반복해도 마찬가지다.

혹시 수도꼭지로 올라가는 벽 안의 관이 얼었을까 싶어 전기난로를 가져다 벽을 녹여봐도 소용이 없었다.

전기장판을 틀어놓은 소파에 파묻히다시피 누워서 한참을 고민했다.


이건, 15년 동안 안 겪어본 상황이었다.



이 집에 살게 된 후 처음 맞는 겨울, 주인아저씨는 전화를 걸어와서

"일기예보에 날씨가 영화 10도 이하로 떨어진다고 하면,

외출할 때 온수 쪽으로 해서 물을 졸졸졸 흐르게 틀어놔야 해요. 그래야 수도가 안 얼어요"라고 친절하게 얘기해줬다.

그 이후로도 뉴스에서 한파 얘기가 나올 때마다 주인아저씨는 전화를 걸어서 나에게 물을 틀어놓으라고 주지 시켜주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특별한 연락은 없었다. 내가 어련히 잘하겠거니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달이 나다니...... 자존심의 문제는 아니었는데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당장 뜨거운 물이 필요하진 않았다. 오후 내내 처리해야 할 회사일을 하고, 주말엔 당연히 사줘야 할 낮잠까지 잤다. 혹시나 그사이 알아서 물이 조금 녹을 수도 있겠지 싶어서 싱크대온수 밸브를 열어놨지만, 내내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에 그런 요행은 없었다.


잠에서 깨고도 한참을 소파에서 빈둥대다가, 결국 어떻게든 해결하기로 했다.


구글링을 하며 수많은 보수공사 사진을 봐도 어찌.해야 할지 몰랐는데, 어느 댓글에서 답을 찾았다.

나처럼 빌라에 사는 어느 아주머니가 온수관이 얼어서 드라이기로 녹여도 안된다고 올린 글에 달린 댓글이었다.


"난방이 아주 잘 된다는 가정하에...

집에 있는 모든 수도꼭지에서 온수가 안 나온다

=> 보일러에서 시작되는 온수관 동결......'



이거다 싶어서 옷을 갖춰 입고 뒷베란다에 있는 보일러 쪽으로 나갔다.

20년쯤 된 보일러가 낮은 소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었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보일러로 들어가고 나오는 수많은 관을 관찰했다.

보일러에 붙어 있는 청소방법 스티커 등을 탐독하고 알아낸 건, 보일러에서 물을 끓여서 집안을 돌게 하는 사이클이 하나 있고,

냉수를 끓여서 온수로 내보내는 사이클이 하나 있다는 것이었다.

각각의 사이클마다, 보일러로 들어가는 관 하나, 나오는 관 하나가 있었다.


방금 본 댓글에서 말한 건, 온수 내보는 관이 얼었다는 얘기였다.

드라이기를 가져다가 단열 스티로폼이 없는 부분에 열을 가했다.

하지만 열어놓은 온수 수도에 여전히 기척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보일러로 들어가는 급수관이 문제일까 싶어서 겹겹이 싸맨 보온재들을 뜯었다.

관의 윗부분을 감싼 단열 스티로폼을 잘라서 녹였으나 역시나 실패였다.

몇 년 전 내가 헌 옷과 비닐 등등으로 뚱뚱하게 감싼 관의 중간 부분을 뜯기로 했다.

한두 겹 뜯으니 원인은 바로 나왔다.


몇 달에 한 번씩 보일러에 물 보충을 할 때 흘린 물들로 젖어있던 헌 옷들이 다 얼어있었다.

당연히 그 안의 밸브도 얼었을 터였다.


죄다 뜯어내고 드라이기를 갖다 댔다.

3분도 되지 않아 싱크대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부엌으로 가서 확인하니 온수 쪽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차가왔던 물은 잠시 지나니 따뜻해졌다.

알고 나니, 이렇게 간단한 걸......



뒷베란다에 온통 어질러진 것들을 정리하고,

단열 스티로폼과 뽁뽁이로 관을 빈틈없이 여맸다.

부엌으로 돌아와 하얀 김을 내며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감상했다.

뿌듯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이 낡은 집에 살 자격을 또 하나 얻었다 싶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예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언젠가 다시 이 집은 나름의 고집을 부리겠지만,

구석구석 파고들어 손을 보면 다.

그때도 오늘처럼 온수 하나에 세상 다 얻은 것 같이 호들갑스럽게 즐거워하면 될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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