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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02. 2021

계획에 있었지만 계획에 없던, 토마토 카레

#어떻게든 요리는 완성되니까

그는 편법을 써서 편하게 살려고 했어요


-미국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中, 거스 프링의 대사





원래의 계획은 이랬다. 


토마토 세 개를 모두 끓는 물에 데쳐 껍질을 벗긴다. 

양파와 파프리카를 볶은 후에, 잘게 자른 토마토를 넣는다. 

물을 넣지 않고 진하게 끓인다. 

끓기 시작하면 카레 가루를 조금씩 넣으면서 간을 맞춘다. 

약한 불로 끓이면 토마토 카레가 완성된다. 


토마토 카레를 만들려던 이유는 단순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지지난주에 엄마가 줬던 토마토가 눈에 띄었고, 

몇 번의 경험으로, 카레에 토마토를 넣었을 때 맛이 부드러워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토마토 카레 레시피를 검색해보니, 

토마토는 물이 많으니 그대로 끓여 재료의 풍미를 살리면 좋다고 했다. 

평소 좋은 재료를 챙겨 먹지 않으니, 이렇게 끓인 토마토 카레는 꽤 좋은 건강식이 될 것 같았다. 


며칠 째 머릿속에서 레시피를 반복하다가, 

늦은 토요일 밤에 드디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냉장고를 여는 순간부터, 

나의 토마토 카레는 계획과 다르게 흘러간다. 


우선 냉동실에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른 양파가 없었고, 

내 주먹만 한 크기라고 생각했던 토마토는 생각보다 작고, 세 개도 아닌 두 개다.

토마토를 꺼내보니 둘 다 꼭지 쪽이 짓물러져 있다. 

계획을 빠르게 손절하고 3분 카레나 먹을까 하다가, 모처럼의 요리 욕구를 버릴 수는 없다. 


못 먹을 부분을 칼로 도려낸다. 한 개 남짓 정도의 토마토가 남는다.  


이미 반쯤 자른 상태라, 끓는 물에 데쳐 껍질을 벗길 수도 없다.  

싱크대에 비스듬히 서서 칼로 깎듯이 껍질을 제거한다. 당연히 잘 될 리가 없다. 


칼을 버리고 손으로 으깨듯 껍질을 하나하나 제거한다. 

토요일 밤 12시에 이렇게까지 할 일일까 싶어서 혼자 피식한다. 

그래도 토마토의 질긴 껍질이 씹히는 카레는 영 별로니까 끝까지 벗겨낸다. 



양파가 없으니 굳이 볶을 필요가 없다. 

잘게 썬 파프리카와 토마토를 냄비에 넣고 끓이기로 한다. 


그런데 불을 켜려다 보니 고민이 생긴다. 


원래의 계획대로 토마토에서 나오는 물로만 가자니 토마토의 양이 너무 적다. 

그렇다고 물을 넣자니 너무 밋밋할 것 같다. 



주방을 뒤지니 작년에 쟁여놨던 토마토소스 캔이 눈에 띈다. 

이걸로 부족한 토마토의 맛과 수분을 보충하기로 한다. 


그런데 캔을 따서 냄비에 넣고 보니 애매하다. 

생 토마토를 간 상태가 아니라, 여러 재료를 첨가해 소스를 만든 제품이었기에, 

너무 되직하고 소금 간도 세다. 카레 가루까지 넣으면 심각하게 짜질 게 뻔하다. 


결국 물을 넣기로 한다. 

이미 재료 단계부터 삐걱댔으니, 계획에서 어긋났다고 서운해하지 않는다. 


이참에 생각나는 모든 '편법'을 사용하기로 한다. 

오히려 편하게 요리할 수 있게 됐다. 


목표는 단순하다. 

먹을 만할 형태로 카레를 완성시키는 것.  



토마토 탕, 이라고 불러도 될 것을 끓인다. 


그런데 간을 보니, 마지막에 카레를 넣는 걸 감안하더라도 뭔가 밍밍하다. 

물을 과하게 넣었다 싶다. 


다시 주방을 두리번대다가,  작은 스팸 한 통을 꺼내 자른다. 

양파도 없었으니 뭔가 씹을 게 보충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원래는 비건에 가까운 건강식이 목표였지만 이제 다 수정됐다. 

스팸을 모두 넣고 천천히 젓는다. 


어느새 냄비는 2/3 이상 차 있다. 

배불리 먹겠다 싶다 



끓기 시작하자 카레 가루를 넣고 불을 줄인다. 

집 안 가득 나른한 카레향이 퍼진다. 


카레를 넣었는데도 색은 여전히 토마토의 붉은색이다. 


카레의 풍미가 좀 약할까 싶어서 찬장을 뒤진다. 

오래전에 사놓고 뜯지 않은 큐민 가루가 있다. 옳다구나 싶어서 한 숟가락 넣는다. 

향이, 토마토 쪽에서 카레 쪽으로 한 단계 옮겨온다. 


다시 맛을 본다. 살짝 짠가 싶어서 물을 넣을까 하다가 그만둔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면 냄비가 넘칠지도 모른다. 

게다가 주말 내내 카레만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든 재료가 뭉근해질 때까지 끓인다.  



그렇게, 

매 단계에서 계획에서 벗어났던, 토마토 카레가 완성된다. 


가스불을 끄고 맛을 보니 먹을 만하다. 

내 입맛의 기준이 둔하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기대 이상이다. 

토마토의 형체는 없어졌지만 향은 진하게 남아,  

카레 특유의 자극적인 향과 잘 어울린다.  


애초 레시피대로 양파도 있고 토마토도 충분해서, 

물 없이 진한 토마토 카레를 끓였어도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부족한 대로 만들어낸 이 카레는 그 나름으로 훌륭하다. 


생각해보면, 계획에 있었지만 계획에 없었던 것들은, 꽤 자주 찾아온다. 


우리가 당황하는 순간에도,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 것들은 어떻게든 흘러간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결과를 남기고 일단락된다. 

지금 내 앞에, 어떻게든 완성돼 한 냄비 가득한 토마토 카레처럼. 



그릇을 꺼내 밥을 담는데, 나도 모르게 수북해져 버린다. 

이러려던 아니었지만, 카레를 더 수북하게 붓는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카레를 먹을 때면 늘 카레가 한두 숟갈 부족하거나, 밥이 반 공기 정도 아쉬웠다. 

그래서 밥과 카레 중 먼저 그릇에 담기는 걸 넉넉하게 한다.  

그러면 뒤에 담는 것의 양을 적당히 맞출 수 있으니까.  

뭐 말은 이렇게 해도 양 조절은 실패하기 마련이고, 카레를 할 때마다 늘 과식을 한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준비하고, 

낡은 책상으로 카레 접시와 김치통만 덩그러니 들고 와 앉는다. 


만약에 내가 미식의 기준이나, 원래 레시피의 이행 정도에 집착했다면, 

얼굴을 찡그린 채로 첫 술을 떴을지도 모르지만, 정반대다. 

온 집안에 퍼진 온기와 기분 좋은 냄새 속에서 떠먹는 토마토 카레는 만족스럽기 그지없다. 


그건 아마, 뭐를 해도 이해가 되고 뭐를 하지 않아도 이해가 되는 

토요일 밤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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