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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n 01. 2021

무탈한 날들의 기록

#15년된 미니 오븐 청소하기

아무도 헤아리지 않고 기록에도 남기지 않는 날들이 지나갔다.


-소설「가을의 감옥」中, 쓰네카와 고타로





주방 구석,

전자레인지 위에 있는 미니 오븐을 손보기로 한다, 드디어.


오븐이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단순한 구조의 이 기계는 15년 전 선물 받은 것이다.

'그때의 그녀'는 골목의 위쪽에 위치했던 내 원룸까지 직접 박스째 들고 왔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혼자 살던 시기에 자주 해 먹었다던 토스트의 레시피를 알려줬었다.


"이거면 충분할 거야."


그녀는 이제 그때에만 남아 있지만,

그 레시피대로의 토스트는 15년 동안 미니 오븐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그녀에 대한 기억도, 그녀와의 이별에 대한 기억도 덤덤해진 지금까지도 충분히 맛있게.



단순한 구조답게 청소도 단순하게 하게 돼있다.

아래에 있는 판을 끄집어내 털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몇 년 동안 그 단순한 청소를 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걸 사용하는 건 토스트를 구울 때밖에 없고, 내부에선 꽤 높게 온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청소를 덜 한다고 위생에 문제 될 일은 없다.


하지만, 부스러기 가득한 이 미니 오븐에 빵을 넣을 때마다 일말의 가책을 느낀 건 사실이었다.

거기다가, 청소를 미루는 게,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릴 일인가 싶기도 했다.  



마음이 내켰을 때 코드를 뽑고 통째로 책상으로 가져온다.

의외로 어울리는 풍경이다 싶어서 잠시 감상한다.


바닥도, 윗판도, 다이얼도 구석구석 충실하게도 더럽다.

손으로 쓱 닦아보니 기름기는 없는데 먼지가 하도 오래돼서 잘 닦이지 않는다.

바닥에 깔린 빵 부스러기는 푸석푸석하다기보다는 딱딱하고 탄 것도 여럿이다.


마음 같아서는 주방 청소용 스프레이를 안팎으로 뿌린 다음에 닦아내고 싶지만,

빵이 직접적으로 닿는 곳에 독한 화학제품을 쓰기는 찝찝하다.

물티슈로 퉁치기로 한다.



밑판을 빼서 싱크대에 세제를 풀고 담가놓고는, 본체를 천천히 닦는다.

밖에 쌓인 묵은 먼지는 의외로 금방 닦인다.


안을 보니 빵 부스러기가 앞뒤 양옆에 지저분하게 붙어 있다.   

거꾸로 들어서 여러 번 털어봐도 말끔하지 않다.

카메라 청소용 블로워를 꺼내와서 이리저리 몰면서 최대한 털어낸다.


그다음엔, 오래돼서 조금 마른 물티슈에 물을 더 뿌리고,

불리듯이 안쪽에 물기를 묻혀둔다.

시간이 지나 다시 닦으니 웬만한 때는 잘 닦인다.

하지만, 드문드문 있는 탄 자국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고집을 부려볼까, 집착을 해볼까, 장인정신을 발휘해볼까 하다가

그대로 두기로 한다.

15년에 걸맞은 낡음은 필요하니까, 라는 논리는 한참 뒤에 생각해낸다.



고작 미니 오븐이다.


처음 살 때에도 지금도 금전적 가치는 별로 없는,

당장 고장 나다시 사기는 애매한 그런.


하지만, 닦아놓은 이걸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고작, 이라는 말은 떼어야 할 듯하다.

별다른 기록 없이 지내온 15년이 이 작은 기계에 고스란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미니 오븐에 카메라가 달려있었더라면,

그래서 뚜껑을 열 때마다 사진을 한 장씩 찍었더라면 어땠을까.  

별다른 표정 없이 빵을 넣는 비슷한 모습이었겠지만,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어느 날은 들뜨고, 어느 날은 무료해 보였을 것이다.

어느 날은 잠옷 차림이었을 것이고, 어느 날은 벗은 채였을 것이다.

어느 날은 누군가와 함께였을 것이고, 어느 날은 혼자임이 익숙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은 밤을 꼬박 새웠을 것이고, 어느 날은 느지감치 일어났을 것이다.


물론, 그런 사진은 존재하지도 존재할 일도 없겠지만,

오래된 미니 오븐을 보면서 그 평범한 날들을 떠올리는 걸 보면,

이 작은 소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특별하게 헤아리지도, 별다르게 기록하지도 않을 날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어지럽히고 치우고, 더럽히고 닦는 단순한 일상이 있기에,

나의 시간이 무탈하다는 걸 안다.

요즘 심심하다, 무료하다, 를 입에 올리며 자주 징징거리지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무언가에 강하게 휘둘릴 때면,

이런 날들을 떠올리며 안심할 거라는 것도 잘 안다.


다시 부지런하게 토스트를 해먹고 지저분하게 빵 부스러기를 흘릴 것이다.

그러다가 청소 욕구가 발동한 어느 밤에 미니 오븐을 통째로 꺼내 닦아내겠지.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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